주말에 바쁜 일이 겹쳐서
연재가 많이 늦어졌네요.
참고 기다려주신 여러분의 인내에 원츄를 날리며
발업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 뒷발꿈치에 이어 목부상. 대략 낭패 ==========================
연극 시작 5분 전.
모든 배역들이 분장을 마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막이 오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박군 - 하아.... 수아.....후우......
어깨 - 후하후하후하후하.....
덩치 - 단~~~~~!!
그 폭풍전야 같은 침묵 속에서도
박수를 치거나 자기 뺨을 두드리거나 하며
태극권 같은 이상한 자세를 취해대는 박군 일당.
긴장을 풀려는 건지 힘을 모으려는 건지는 몰라도
주변엔 상당한 민폐인 것 같다.
=좀 가만히 있어 이놈들아....=
싸늘한 힐책의 눈길이 가득한 대기실.
그래도 박군 일당은 꿋꿋하기만 하다.
기억 - ........
난 공연 시작 전까지 대본이나 훑어볼 생각이었지만
평소에 로션도 발라본 적 없는 탓에
얼굴을 덮고 있는 두꺼운 분장이 신경 쓰여
좀체 집중이 되질 않았다.
얼굴이 답답한 게 가려운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좀 더운 것 같기도 하고....
슬슬 밀려오는 짜증.
난 목 언저리에 와이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이런 일에까지 화를 내고 싶진 않았다.
기억 - 후우........
한숨을 푹 내쉬며 옆을 돌아봤을 때
바로 옆에 앉아있는 민아는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눈을 옅게 감은 채
완전한 집중모드에 들어가 있었다.
규칙적으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민아 - .....쌕.......쌕......
......자, 자고 있어?!
이제 곧 막이 올라가는 데
아무래도 위험한 게 아닐까 싶었던 난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깨웠다.
민아 - .....으응? 엄마얏?!
눈을 뜨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튀어 오르듯 옆으로 물러앉는 그녀.
지금 나 보고 놀란 거 맞지?
자는 데 깨워서 그런 게 아니라....
민아
- 아아...어제 긴장해서 한 숨도 못 잤더니
깜빡 졸았나봐. 미안, 미안....
..... 그녀도 긴장이 되는 걸까.
하긴 당연한 일일지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위안을 삼는 사이
그녀가 대뜸 내게 물었다.
민아 - ..... 그렇게 하면 긴장이 좀 풀려?
기억 - 응?
민아 - 아까부터 계속 손을 주무르고 있잖아.
기억 - 아... 왠지 좀 저려서.
민아 - 으음, 나도 그런데.
긴장하면 손이 저리다.
공감가면 추천.... 인가.
백번 듣기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고
백번 보기보다 직접 한 번 해보는 게 나은 법.
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도 맞은편 손을 주물러 보며
효과를 시험해보는 듯 했다.
민아 - 음... 좀 더 꽉꽉 주무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기억 - ....주물러줄까?
민아 - 응?!
기억 - 아,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무심코 대답하긴 했지만
내용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어색한 한 마디.
그렇게 단번에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겨버리자
그녀는 무릎 사이에 두 손을 끼운 채
몸을 앞뒤로 기우뚱거리며 달랬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기억 - ........
그건 서로 몹시 쑥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난 최대한 꼼꼼히 그녀의 손을 주물러주었다.
잠시 후 손을 바꿔
그녀의 왼손을 내 무릎언저리에 놓고 주무르자
왼편에 앉아있던 그녀는 자세가 불편했는지
몸을 조금 틀어 어깨를 내 팔에 기대왔다.
민아 - ......
그렇게 있다보니 또 높이가 적당해 보였는지
내 어깨에 머리를 얹는 그녀.
점점 늘어나는 접촉면적에 비례해서
내 심장은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순으로
장단를 바꿔 뛰어댔다.
심장 = 제비 몰러 나간다! 앗싸 좋고! 좋아도 간다! 에헤이!
....... 위험하다.
하지만 떨쳐 낼 수 없는 푸근한 체온과
귓가에 들리는 그녀의 숨소리.
민아 - 색.....색......
또 자고 있어?!
기억 - ..... 일어나, 일어나.
민아 - 응?!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잠기운에 몽롱하게 흐려진 눈동자.
대기모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윈도우me의 구동화면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민아 - .....엄마야!
기억 - ......
민아 - 아, 맞다. 기억이구나....... 미안.
........ 세수하고 와버릴까.
잠시 후.
공연 시간이 다되었다.
연출은 옷매무새를 점검한 뒤
크게 심호흡을 두 번 하고
무대 위로 걸어 나갔다.
연출
- 레이뒤르뮈르귀르뒤스~!!! 앤 줴르줴르줼줼줴룰맨~!!!
정말로 오랜 시간, 유구한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이 광활한 소공연장을 꾸역꾸역 매워주신
여러분의 성원에 골수까지 감사드리며
바로 지금!! 역사적인 무대의 막이 올라갑니다!!
............ 드디어 시작이다.
민아 - 다녀올게.
기억 - .... 응.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향하는 그녀.
방금 전까지 마주 잡고 있던 손과 어깨에
그녀의 체온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곁에 있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반쯤 드리워져있던 장막이 완전히 걷혔다.
동시에 =솨아-.= 하고 관객석을 지나는 박수소리의 파도....
땅거미가 지는 것처럼
관객석을 비추던 조명들이 꺼지면서
무대 위는 더욱더 환하게 빛나보였다.
이야기는 선희와 철수라는
지극히 평범한 연인의 일상적인 삶에서 시작된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비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평화롭고, 행복하고, 조촐한 낙에 살아가는.....
무대 중앙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는 선희.
옆에 있는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바느질거리들은
그것이 결코 본인을 위한 일이 아님을 알게 해주었다.
철수 - 자기야~!!
그때, 무대 밖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철수의 목소리.
선희는 깜짝 놀라 하던 일을 바구니에 쑤셔 담은 뒤
어떻게 숨길지 허둥지둥 거리다
펑퍼짐한 치마를 이용해 바구니를 덮고 앉았다.
선희 - 아하하.... 오늘은 일찍 왔네요.
곧 무대위로 뛰어나온 철수는
몹시 어색한 그녀의 자세나 행동에도 아랑곳없이
손에 들고 온 보자기꾸러미를 풀어 양은냄비 하나를
선희의 앞에 내려놓았다.
철수 - 자기야 자기야 이거 봐, 응?
선희 - 에? 이게 뭔데요?
철수
- 오늘 생선가게에서 일해주고 왔는데
거기 사장님이 저녁에 찌개를 해주시더라고.
먹어보니까 너무너무 맛있어서
자기 주려고 한 그릇 더 얻어왔어.
아직 안 식었으니까 빨리 먹어, 응?
선희 - ........ 고마워요.
철수
- 에이.... 또 울려고 그런다.
자꾸 그럼 내가 더 미안하잖아.
선희 - .......
철수 - 식는다, 빨리 먹어.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걸까?
자신에게 걸 맞는 크기의 행복....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큰 꿈을 가진 사람이
가장 즐겁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조촐한 행복감에 젖은 식사를 계속하던 중
선희의 얼굴에 짙은 고통의 그림자가 스쳤다.
마냥 행복해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철수는
바로 그녀의 변화를 눈치체고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철수 - 왜 그래,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선희
- 아...아뇨, 사레가 콜록, 들려서....
콜록, 물 한 잔만 가져다줄래요?
철수 - 아....응.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철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선희는 비틀비틀 힘겨운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치마 뒤춤을 뒤적거리던 그녀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두 뼘 길이에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두께를 가진
초대형 바늘을 쑥 꺼내들었다.
선희 - 아야.....
재빨리 바느질거리 속에 바늘을 넣은 그녀는
바구니를 들어 무대 밖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놓은 뒤
다시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풋-=
너무 잔잔하고 진지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개그에
관객들은 뒤늦은 웃음을 터트렸고
가볍게 환기된 분위기에서 연극은 계속되었다.
철수 - 여기, 물!
선희 - 콜록, 고마워요.
철수 - ..... 어때? 맛있지, 응?
선희 - 예, 정말 맛있어요.
이후에도 두 사람은 행복했다.
정해진 일자리는 없어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열심히 일하는 철수와
철수 몰래 빨랫감이며 바느질거리를 얻어다
생활에 보태가는 선희.
빈곤해도 부족하진 않은....
그들만의 낙원 속에 두 사람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꾸물꾸물 자라나기 시작한
불행의 씨앗.
철수 - ....응? 자기 또 밥 안 먹는 거야?
선희 - 아... 전 아까 먹었어요.
철수
- 거짓말.... 요즘 안색도 안 좋고
어디 아픈 거 아냐? 응?
선희 - 아니에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철수 - ..... 정말 괜찮은 거야?
선희
- 네, 괜찮아요. 아참, 내 정신 좀 봐.
아까 장조림 재워놨었는데....
도망치듯 일어나 자리를 피하던 그녀는
일어서기가 무섭게 복부를 감싸며
자리에 고꾸라졌다.
선희 - 헉........
철수 - 응?! 자기야!!!!
그녀의 위 속엔
그동안 낙원을 지키기 위해
참고. 참고, 또 참아왔던 인내의 눈물이 모인
종양이 뿌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