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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고기 |2007.04.05 19:46
조회 361 |추천 0

 

■ 환단고기가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때는?  
 

                                                                                                                                                             

 


1979년 [환단고기]가 등장했는데, 그럼 재야사가들은 이 책을 과연 알고 있었을까? 아니, [환단고기] 신봉자들은 1911년에 이 책이 발간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한국 역사 찾기에 목숨을 건 듯이 떠들던 재야사가들은 언제 이 책을 알게 되었을까?

 

1981년 11월 26일 국회공청회 자리에서 안호상은 이런 발언을 한다.

 

여기서 왜놈들이 단군이 신화다, 기자조선이 없다 하며 단군 47대 임금들의 1048년 역사와 부여조선의 164년, 기자조선의 41대 임금들의 928년 합 2140년의 역사를 완전히 잘라버리고 서기전 194년 위만이 조선왕이 된 때부터 우리 역사를 시작했다.

 

저 발언은 매우 흥미롭다. 안호상은 이 시점만 해도, [환단고기]를 몰랐다. [환단고기]를 알았다면 [기자조선]을 언급했을 리가 없다. 또한 저 인용에는 [단기고사]도 배제되어 있다. [단기고사]에서 [기자조선]의 연대는 1052년이라고 적혀 있다. (사실은 더하기를 할 줄 몰랐던 인간이 저술한 탓인지 합산하면 1097년이 나온다.) 더구나 [단기고사]의 기자조선은 41대가 아니라 42대로 되어 있다.

그럼 저 발언에 나오는 연대는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그것은 [제왕운기]다. [제왕운기]에는 기자의 41대 후손인 준왕을 끝으로 928년간 기자조선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으로부터 164년이 공백으로 되어있는데, 안호상은 그 기간을 “부여조선”으로 메꿔놓은 것이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는 참고하지 않은 발언이지만 [규원사화]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단군 47대 임금이라는 것은 [규원사화] 이외에는 전고가 없는 이야기니까. (혹시 다른데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다만 저 단군조선의 연대를 1048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규원사화]를 신뢰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규원사화]의 역년은 1195년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단기고사]처럼 더하기를 잘못해 놓았다. 실제 연도를 다 더해보면 1205년이 된다. 쯧쯧.

[삼국유사]에는 단군 치세가 1500년으로 나온다. [제왕운기]에는 1038년이다. 그럼 1048년은 어디서 나온 말일까? 이것은 [역대세년가]라는 책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역대세년가]는 1436년 세종의 명에 의해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를 7언고시로 지은 책이다. [제왕운기]와 유사한 형식을 지닌 책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 처음 단군 치세를 1048년으로 잡은 이후 이 인식이 널리 퍼졌다. 단기를 결정한 [동국통감]도 이 역년을 따르고 있다. [동국통감]은 단기를 결정했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영향력이 컸던 역사책이다. 이 책의 단군 치세는 상식으로 전해졌던 것이고 안호상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안호상의 저 짧은 발언만으로도 당시 재야사가들의 수준과 참고문헌을 추리해낼 수 있는 것이다. 안호상은 [규원사화]는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후 여러 사서가 인용되지만 한번도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어쩌면 안호상은 그저 단군이 47대 내려왔다는 정도로만 귀동냥했을지 모르겠다. 이 공청회에는 [한단고기]로 유명한 임승국도 나와서 한마디 거들고 있는데, 임승국도 이 당시에는 [한단고기]의 ㅎ도 꺼내지 못하고 있다. 역시 몰랐던 것이다.

일본인 녹도승(가시마 노부로)은 1982년 7월 일본어판 [환단고기]를 출간한다. 재야사가 임승국의 말을 따르면 미국 도서관에서 영역 환단고기를 보고 일본으로 저자를 찾아갔다가 한문본 환단고기를 알게 되어 번역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임승국의 번역본인 [한단고기]는 1986년에 나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민수 역 [환단고기]도 1986년에 나왔다. 즉 재야사가들은 1986년이 되어서야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떡밥에 재야사가들은 바로 걸려 들었다. 1987년 12월에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나온 [시원문화를 찾아서]라는 책에서 안호상은 이런 말을 합니다.

더러 우리나라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상고사는 자료가 부족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왜 부족합니까? 우리즉의 기록만 해도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신단민고사, 그리고 단재 신채호 씨의 조선상고사, 정인보 씨의 고조선연구, 최동 씨의 조선상고민족사 등 많은 자료와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사료에 후대의 역사서까지 포함하는 센스는 일단 넘어가주자. 1981년에는 언급하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던 [환단고기]가 제일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1986년 [환단고기] 출간 붐을 타고 그 책이 재야사가에게 알려진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그 책에 실린 다음 대목을 한번 보면 이 점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해가 단기 4320년입니다. 단기란 단군의 연대이며 단군은 47대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단군 47대 2096년이고 거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역사 연대를 합쳐 가지고 4320년이 되는 것입니다.

불과 6년 사이에 인식이 확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1981년 발언에서 "단군 47대 임금들의 1048년 역사"가 "단군 47대 2096년"의 역사로 천년이 뻥튀기 되었다. 단군 47대를 2096년으로 보는 사서는 [환단고기] 뿐이다. 안호상은 [환단고기]를 수용하면서 전날 이야기했던 "기자조선"은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일단 1986년 이전에 재야사가들이 환단고기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연도는 1981년을 넘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안호상이 국회 공청회에 출석했을 당시에는 역시 [환단고기]에 대해서 알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다.

[환단고기]에 대한 재야사가의 최초 언급은 1981년 12월 [자유]지에 실린 박창암 장군(1921-2003 육군 소장, 월간 자유사 대표)의 권두 논설이었다. 그 논설에는 이렇게 환단고기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단국대학에 계시는 윤내현(尹乃鉉)교수께서 《民族의 고향 古朝鮮을 가다》라는 제목으로 괄목할만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 전문(全文)을 전재(轉載)를 할 수 없어 내용만을 기초로 하고 요약함과 동시에 환단고기 등 기타 자료에 의한 본인의 역사 상식을 첨부해서 진행하겠습니다.

내가 본 사이트에서는 [환단고기]를 [한단고기]로 표기해 놓았는데, 비록 [자유]지를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이 시기에은 "한단고기"라는 표현은 없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이는 사이트 측에서 임의로 변경해 놓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이상시의 책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를 보면 박창암은 이유립과 함께 [환단고기]를 녹도승에게 건네준 인물이라고 한다. 박창암은 [환단고기]의 진행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이다.

박창암에 대해서 조금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박창암은 함남 북청 태생으로 간도 연길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43년 만주군 간도 특설대에 입대했다. 행적이 박정희와 닮은꼴이다. 백선엽 장군과 동기라고 한다. 박창암은 국군에 갑종 7기로 입대하여 대위가 되었다. 6.25 때 소령으로 공비토벌을 했으며, 5.16에 참여하여 혁명검찰부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뒤 박정희와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검찰부장 시절 장도빈(1888-1963 독립운동가/단국대학교 설립자;육사 국사학 교관 역임)을 만나 극우 역사관에 눈을 뜬 모양이다. 최태영, 박시인 등과 어울리며 국사찾기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1968년 [자유] 지를 만들어 재야사학의 기관지 노릇을 하게 했다.

또한 1984년에 초판이 나온 김정빈의 [단]에서도 [환단고기]를 언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07쪽에 [환단고기]를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단] 자체 내용은 아니고, 김상일의 [한철학]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었다. [한철학]은 1983년 초판이 나왔던 책인데, 초판본을 구해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1983년에 [환단고기]를 인용한 책이 있었다는 것은 확인된 셈이다. *추가* 1985년판 [단]을 헌 책방에서 구입했다. 위에 언급한 책은 2000년에 나왔던 책이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가 없다. 페이지도 2000년 판이 313쪽이나 되지만 1985년판은 281쪽에 불과하다. 2000년판은 증보판이었던 것이다. 1984년판에도 [환단고기]가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983년 [한철학]에 환단고기가 실려있었을 것 같기는 하다. 왜냐하면 [한사상]을 출전으로 하여 "환인 시대 3301년, 환웅 시대 1565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대를 밝힌 책은 [환단고기]뿐이다.

[단]을 다시 훑어보니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999년 안에 통일된다는 예언이 틀렸다는 이야기를 포함해서.)

뭐든지 왜곡하는 환빠의 세계 - 타고르 [동방의 등불] [클릭]라는 글을 예전에 쓴 바 있는데, 이 왜곡된 시 전문이 [단]에 실려 있었다.

[단]의 주인공인 봉우 권태훈은 대종교와 관련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대종교는 [환단고기]와 나름 인연이 있다. 우선 공청회에서 설친 안호상이 대종교 교주격인 총도전(14대)의 지위에 있었던 사람이다. 대종교를 창교(대종교에서는 "중광"이라고 한다.)한 사람은 "나철"이라는 사람이다.

1916년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계연수가 그 내용을 보낸 단체도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천부경], [삼일신고] 등을 교의 경전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환단고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환단고기] 2세 단군 부루 때 나오는 노래 "어아가"도 대종교에서 부르는 신가라고 한다. (웃기는 것은 이 "어아가"에는 일본을 물리치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해석이라 하겠다. 수천년 전에 이미 일본을 물리치자는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다.)

 

대종교를 창시한 나철은 독립운동가로 본래 과거급제하여 벼슬도 산 양반이었다. 나철은 1907년 을사오적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실패하여 체포되기도 했다. 이때 유형 10년의 형을 받았으나 연말에 고종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나철은 1906년 1월24일(음력 1095년 12월 30일) 밤에 서울 거리에서 "백전"이라는 도사로부터 백두산 "백봉" 도사가 전하는 [삼일신고]와 [신사기]라는 책을 받았다. 그리고 1908년 12월 5일 동경 여관에서 "두일백" 도사로부터 [단군교포명서] 등의 책자를 받았다. 다시 12월 9일 단군 대황조의 교화를 펼치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나철은 득도를 했다.

 

물론 위에 나오는 저 도사들이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한홍구 교수는 나철이 일본에서 "신도"에 감명을 받아 대종교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단군교(대종교의 원래 이름은 단군교)의 득도 자리가 동경 여관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나철은 처음에 자기가 만든 종교 이름을 신교神敎라고 했다. 이 이름부터 일본의 신도神道를 연상케 한다. 대종교에서는 일본의 신도가 신교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주장하는데, 우습게도 신도에서는 대종교가 신도에서 파생된 종교라고 여기고 있다. 일본 신도도 세계의 모든 종교가 신도에서 퍼져나간 것이라 주장하는데, 대종교는 그중 지위가 제법 높다고 한다.

나철은 1909년 1월 15일 밤 12시에 서울에서 단군교를 창시했다. 나철은 1910년 8월 5일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꾸었다. 일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골수분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교를 떠나기도 했다. 대종교는 일제로부터 심하게 탄압을 받았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한 때문인지 나철은 1916년 8월 15일(음력)에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교주의 자리는 김교헌으로 넘어갔다. 김교헌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자. 먼저 [단군교포명서]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단군교포명서는 1904년 10월 3일에 백두산 도사들이 회합해서 만든 문건이라고 한다.

이 단군교포명서가 정말 1904년에 쓰여진 것일까? 이 문건에는 배달倍達이라는 말이 나온다. 따라서 이 문건이 진짜 190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배달"이라는 말이 나온 최초의 문건 자리를 차지할 지도 모른다. 여기에 나오는 배달의 뜻도 좀 특이하다.

배달은 조광祖光을 뜻하는 것이며, 조광 즉 조상의 광휘가 변하여 조선朝鮮이라는 말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 링크한 최남선의 견해, 즉 단檀의 훈이 박달, 배달이어서 배달국이라 했다는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다르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최남선과 흡사하다.)

하지만 이 문건이 1904년에 작성된 것이라고는 믿을 근거가 없다. 우선 백두산의 도사들이 진짜 존재했다고 이야기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남선의 1918년보다 빨리 나온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나철은 1916년에 죽었으니 그 전에 이 문건이 대종교인들에게 보여졌다면 "배달"에 대한 가장 이른 자료가 되겠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대종교 측 증언을 따르면 최남선도 대종교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배달"이라는 말을 접한 곳은 대종교 문헌에서였을까? 최남선은 "배달"이라는 말만 취하고 그 해석은 버린 것일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당시 대종교는 비밀결사와 비슷했던 모양이니 약간의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배달 문제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고,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이 [단군교포명서]에는 역대 단군의 재위라든가, 단군 조선 이전의 나라 이야기 같은 것은 없다. 즉 [환단고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문건이다.

2대 교주인 김교헌은 두 권의 책을 썼는데, 하나는 [신단실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단민사]이다. 나는 1914년에 쓰여진 [신단실기]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목차로 보건대 역사 관련 부분은 신단민사와 다를 것이 없음은 분명하다.) 1923년에 쓴 [신단민사]만 보았다. 문제는 1923년에 만들어진 [신단민사]도 [환단고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책자라는 사실이다. [환단고기]와 관련이 없을뿐만 아니라 [규원사화]하고도 관련이 없다. 이 책에는 역대 단군의 수라든가, 역대 단군의 이름 따위가 전혀 없다.

특히 [신단민사]에서는 단군 조선 이전의 신시 시대를 불과 124년으로 잡고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단군교포명서]는 우리가 아는 단기와 연대가 같다. 1904년을 단기 4237년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나철이 죽을 때 남긴 유서에는 1915년을 4373년이라 쓰고 있다. 단기로는 4249년이어야 한다. 이 무렵 대종교는 기원을 올려서 신시 시대인 124년을 포함한 연대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대 교주인 김교헌도 그것을 착실히 따른 것이다. 즉 이들은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또한 [규원사화]도 전혀 참조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성수 교수에 따르면 [환단고기]가 최초로 소개된 것은 이유립이 발간한 월간신문 [커발한]에 실린 것이라고 한다. 1960년대 초라고만 하는데, 그때는 [환단고기]라는 이름이 아니고 [환단유기桓檀留記]였다고 한다. 이 신문은 대전에서 발행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은 이유립이 이 책의 이름을 뭐라 지을까 고심했다는 것 정도라 하겠다.

박성수 교수 역시 재야사가인데, 이 사람은 환단고기 발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환단고기』가 시중에 나오 것은 군사정부가 물러난 뒤의 일이었다. 80년대 후반으로 알고 있는데 [환단고기]가 한번 시중에 나오자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한번 읽은 사람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환단고기] 한글 번역본은 1986년 전두환 시절에 나왔다. 그런데 이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무렵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라 하겠다.

따라서 이유립 자신을 제외하고는 1979년 이전에 환단고기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유립은 [환단고기]가 [규원사화]와 충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규원사화]를 일제시대 위작으로 몰아야 했다. 그때문에 1979년말에, “현전하는 규원사화는 윤덕영尹德榮이 대종교의 입장에서 원본 규원사화를 다소 개작한 것이며 1920년대 말경 시흥의 녹동서원에서 그것을 등사하여 판매하였다. 원본 규원사화는 삭주부사 권현權俔이 지은 것이며 그 사실은 <권현행장>에 나온다. 또 나 자신도 이 원본 규원사화와 행장을 본 일이 있다. 이 <권현행장>은 권현의 후손들에게 전해졌는데 지금은 같은 문중의 한학자인 권오돈(1983 작고)이 소장하고 있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권오돈은 금시초문의 일이라고 했다.

 

아직도 [환단고기]가 1911년에 나왔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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