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
"찬미야! 정신이 좀 드니?"
"……."
아침이 찾아오기전 희뿌연 회색빛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듯 처음 눈을 떠 바라본 세상은 온통 뿌옇기만 했다. 그리고 흐릿한 그녀의 눈속으로 큰 눈동자 가득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있는 미경이 보였다.
나는 살아 있구나… 살아서 다시 숨쉬고 있구나… 감사하고 기뻐해야할 이 당연한 사실에 찬미는 절망했다. 살아 숨쉬는 것이 고통스러웠고, 흐릿한 눈동자 안으로 비춰지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왜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까… 왜 내게는 죽음 조차도 쉽사리 찾아와 주지 않는 것일까… 다시 감겨진 찬미의 눈두덩이 아래로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뜨거운 눈물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그래, 차라리 울기라도 해라."
죽지 못하고 살아있는게 한스럽겠지….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조차도 축복받지 못한 사랑이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싶어 미경은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는 친구의 아픈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경은 며칠사이 몰라보게 헬쓱해진 찬미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 보며 스물넷 아침이슬을 한껏 먹음은 프리지아 처럼 싱그럽게 피어나던 그때의 그녀를 떠올려 보았다.
짤랑거리는 맑은 웃음이 사랑스러웠던 찬미…. 그녀가 어느날 미경을 찾아와 봄햇살 아래 상큼하게 빛나는 새싹처럼 고운 얼굴가득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품고 사랑에 빠졌다 하였다. 세상사람 모두가 더럽다 손가락질 하고 방탕하다 질책하여도 자신에게 만은 축복받고 싶다고 그러니 이해해 달라 했었다. 아무리 닫아놓고 단속해도 오직 그에게로만 향하는 마음을 자신도 어찌할수 없었노라며 한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늪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가겠다 했다.
그렇게 간절히 자신의 힘든 사랑을 축복해 주길 바라던 찬미를 미경은 서릿발처럼 매섭게 외면해 버렸었다. 타오르는 불길같은 분노로,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경멸을 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자신의 둘도없는 친구에게 더럽다 소리치고 가증스럽다 빈정대며 다시는 그녀를 보지 않겠다 날카로운 칼끝처럼 냉정하게 잘라내 버렸었다.
그런 찬미가 온몸에 상처입고 더이상 살아 숨쉬기를 거부하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미경은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죄인듯 가슴이 무겁기만 했다.
그때 끝임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상념 속으로 힘에겨운듯 애처로운 찬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니?"
찬미의 그 짧은 물음에 미경은 심장이 내려 앉는것만 같았다. 왜 살려 놓았느냐고…. 이제는 가슴에 조차 품을수 없게 되어버린 그남자를 왜 또다시 꿈꾸게 만드냐고…. 왜 다시 기대하게 만드는 거냐고…. 자신을 바라보는 찬미의 눈동자가 그렇게 미경을 질책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차마 마주 바라보지 못한 미경이 애써 시선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미경의 대답에 생명의 빛을 잃어버린 찬미의 눈동자가 현실을 인정하기 싫다는듯 다시 닫혀버렸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가슴 무너지게 아파보여 미경이 차갑게 식어버린 찬미의 여린 손을 맞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찬미야, 그사람…."
아무런 미동도 없이 마치 인형처럼 조용히 누워만 있던 찬미가 미경의 말허리를 잘랐다. 지금은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듯….
"미경아, 나 졸려…."
"그래, 아픈 사람한테 내가 주책이다."
미경은 억지로 말간 웃음을 지어보이는 찬미의 손등을 몇번 토닥여 주고 급히 병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스산한 병원의 창문 밖으로 겨울의 끝자락에 내리는 깨끗한 눈송이가 너무도 예뻐 미경은 주책맞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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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넓은 사무실, 그 사무실을 사용하는 주인의 성격을 말해주듯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짙은 밤색의 넓은 책상에 아찔하도록 위험한 매력을 내뿜고 있는 남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계속하세요."
성민은 보고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채 자신의 수행비서인 강주석 실장의 보고를 무덤덤 하게 듣고 있었다.
"위험한 고비는 일단 넘겼다고 합니다. 상처가 깊고 출혈이 많아 접합수술을 하는데 애를 먹긴 했지만 일상 생활을 하는덴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또 동맥을 끝으며 약도 함께 먹었다고 합니다. 영양상태도 좋지 않아 일단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합니다."
강실장의 보고에 한순간 펜을 잡고있는 성민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듯 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듯 다시한번 얘기했다.
"병원은 어디라고 합니까?"
"중앙병원 7203호 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가보세요."
성민의 대답에 강실장이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장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딸깍! 문이 닫히는 작은 소리가 남자의 귓속을 예민하게 자극해오자 더이상은 참을수 없다는듯 아까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고있는 서류를 탁 소리가 나도록 매섭게 덮어버리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어슴프레 해가 지고있는 창문너머의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성민, 그녀의 안위에 가슴 쓸어내리며 안도하고 있는 너의 마음은 무엇이냐! 더이상 그녀에게 휘둘리지 않겠다 다짐하여 네 눈앞에서 죽어 없어지라 그토록 모질게 내쳐놓고 이제와 너는 무엇을 바라고 그녀에게 향해있는 마지막 줄을 잘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성민은 무엇하나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자신의 마음에 울컥 짜증이 솟았다.
장난으로 시작한 찬미와의 관계…. 그는 찬미를 하룻밤 쾌락의 상대로 끝낼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독히도 아름다운 그녀는 마셔도 마셔도 타는듯한 갈증을 해소할수 없는 뜨거운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여자였다.
한 여자에게 절대로 깊이 빠져들지 않는 다는 그의 원칙은 만개하는 꽃처럼 유혹적으로 혹은 만월의 달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찬미에 의해 처참히 깨어졌다.
그는 자신의 뇌에서 맹렬히 보내는 위험 신호도 무시하고, 한발자국만 다가가면 뜨거운 불꽃에 온몸이 타버릴것을 뻔히 알면서도 불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성민은 그렇게 그녀에게 무방비 상태로 빠져들어 갔었다.
아마도 그래서 였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향한 그리움에 미쳐서… 더이상 참아낼수 없을 만큼 그녀에 대한 갈망으로 허덕이며 이성이라는 가느다란 끈을 놓아버리고 또다시 찬미라는 여자를 찾아가지 않도록 그의 눈앞에서 영원히 죽어 없어지기를 바랬다.
하지만…….
"제기랄!"
성민은 끝임없이 계속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국 지고 말았다. 그리고 더이상 생각하기 싫다는듯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려있는 자신의 상의를 낚아채듯 거칠게 집어들고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와 그의 아름다운 연인 찬미가 있는 중앙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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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가슴이 설레는 밤이었다. 온통 어둠뿐인 병실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결코 정겹지 않은 이밤에 찬미의 가슴은 병원에 들어와 처음으로 힘차게 뛰고 있었다.
찬미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병원밖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고요한 적막과 함께 그와 같은 무게로 찬미의 작은 가슴을 내리 누르는 깊은 상념…. 그 상념의 끝엔 언제나 그가 있었다. 그녀의 남자, 단 하나의 사랑 성민….
그때… 굳게 닫혀있던 병실문이 열리고 옅은 빛줄기와 함께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눈앞에 성민이 나타났다. 약간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마지막 보았던 냉정한 표정 그대로 그가 그녀의 앞에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찬미는 꿈인듯 몽롱한 시선으로 눈앞의 연인을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녀가 그렇게 정신을 놓고있는 사이, 아무리 보아도 사라지지 않는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내 소식을 들었군요. 그래서 당신이 내게 와주었군요. 내게 찾아와 다정히 안아주며 아프지마라 얘기해줄 당신이 아니란걸 난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이렇게 당신의 존재 만으로도 가슴 미어지게 행복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렇게 사랑하는 당신을 어떻게 내 마음밖으로 밀어내야 하나요…. 가르쳐 줘요. 내 사랑, 나의 연인이여!' 하지만 찬미의 이런 간절한 마음은 입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고 뜨거운 눈물이 되어 그녀의 야윈 볼위로 흘러 내렸다.
성민은 며칠사이 형편없이 망가져버린 찬미의 얼굴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흔들리지 말자 마음을 다잡으며 아무런 말없이, 그리고 소리도 없이 가슴으로 흐느껴 울고있는 찬미에게 다가가 그녀의 야윈 볼위로 쉼없이 흐르는 눈물을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닦아내며 가면처럼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굴에 비열한 냉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실망인걸, 송찬미 네 엑션은 아웃이야."
"……."
'이러지 말아요. 당신의 눈동자에 어려있는 진심을 얘기해 줘요. 내게 억지로 상처주지 말아요. 당신 날 걱정 했잖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 왔잖아요. 그게 당신의 진심이잖아요.' 찬미는 그렇게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려있는 그의 마음을 읽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착각하지마! 네 마음대로 날 해석하지마. 나에게 넌 손쉬운 장난감일 뿐이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성민은 자신의 감정을 들켜버려 자존심이 상한 성난 맹수의 표정으로 마지막 그날처럼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찬미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미안해요, 당신 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 당신 뜻대로 당신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줄께요. 그러니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줘요."
찬미는 이미 곪을대로 곪아버린 상처에 또다시 새로운 상처를 만들어 내고 있는 성민의 잔인한 말에 절망하고 있었다.
"시간을 달라… 이런, 어쩌지? 난 그렇게 느긋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못하겠다면 내가 도와줄수도 있어.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성민은 찬미의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움직여 그녀의 가녀린 목을 아프게 움켜 잡았다. 당장이라도 널 내 손으로 죽여 줄수도 있으니 말만 하라는 듯이….
"성민씨…."
찬미의 낮은 신음소리에 성민은 이내 그녀의 목에 감겨있는 자신의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성난 맹수의 으르렁 거림처럼 혹은 사냥감을 찍은 매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얗게 사색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마지막 쐬기를 박았다.
"난 내인생에 너라는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아. 명심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성민은 찬미에게서 등을 돌려 병실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을 뒤로한채….
자신의 이중성에 몸서리 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