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데이가 지났습니다.
사탕 드려야 할 분들이 많았는데
요새 여러모로 바쁜 일이 많아 못 드렸네요.
.... 이 후환을 어찌할 지.
올해 사탕 못 받은 솔로 여성분들...
내년엔 꼭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하나라도 주고 그런 소릴 해라 =========================
고립 6일 째. 목요일.
갑작스럽게 찾아온 위기 앞에
모두가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협력과 단결을 강조하며
조촐한 아침식사를 마쳤다.
덩치 - ..... 조금만 더 먹으면 안 될까?
어깨 - 어허! 이놈이 지금 무슨 소릴!
메뉴는 부족해도
양적으로는 부족하지 않던 식사마저
이제는 절제의 대상이 되었다.
거실 한쪽에선 연출과 회계가 탈출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김씨와 허씨가 매일 조깅을 하면서 알아낸 주변 상황을 기반으로
차가 다니는 곳까지 하산해보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다.
회계
- 이 이야기대로라면...
아무래도 우리가 올라올 때
빙빙 돈 게 맞는 것 같은데?
연출
- 이쪽 능선을 타고 곧장 가면
3~40분 정도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회계
- 문제는 산의 경사야.
눈도 녹다 말아서 미끄러운데
잘못 발이라도 헛짚으면....
마냥 밀어붙이기엔 너무도 부족한 정보.
결국 정확한 루트 탐색을 위해
몇몇이 탐사대로 지원했다.
김씨 - 꼭... 살아서 돌아올게.
허씨 - 가자! 사내자식이 눈물은....
김군 - 나.. 나도 가요?
회계 - 넌 나가는 게 안에 있는 거 보다 안전할 거다.
탐사대의 평균 체력수준을 보통으로 맞추기 위해서인지
김군의 신변 보호를 위한 것인지
도살장 끌려가는 소 마냥 엉덩이가 무거워 보이는 김군을 끌고
탐사에 나서는 김씨 브라더스와 회계.
마음 같아선 나도 함께 가고 싶지만
아침부터 민아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인다.
기억 - 어디 아파?
민아 - 응? 아.... 아니.
기억 - 열이 있나?
민아 - 괜찮다니까.
말은 괜찮다고 해도
역시나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
난 슬쩍 민아의 이마에 손을 짚어 봤지만
열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억 - 열은 없는데... 체한 건가? 손 좀 줘봐.
민아 - 아이... 참.....
기억 - 손이 차네.... 방에 가서 좀 누워있을래?
내 손이 따듯한 편이 아님에도
그녀의 손은 냉기가 느껴질 만큼 찼다.
꾹꾹 손마디를 주무르는 내 행동에
그녀는 몹시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그냥 지나치긴 힘들다.
민아 - 나 정말 괜찮아.
기억
- 무슨 소리야 손이 이렇게 찬데.
여기 나가면 병원에 한 번 가보자.
요즘 계속 몸이 안 좋았잖아.
민아 - 아...아니 그게....
그녀는 쑥스러운 듯 앞머리를 내려 얼굴을 가리며
내 손에 잡혀있던 손을 빼냈다.
한나
- 흠... 걱정도 관심도 다 좋지만...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은데요?
기억 - 예?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다 한 마디를 보태는 한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갸웃해 보였고
한나는 내 옆으로 자리를 바짝 당겨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한나
- 원래 여자들은 가끔 그럴 때가 있어요,
몸도 좀 안 좋고 이것저것 다 신경 쓰이는....
기억 - 흐음....
한나 - 눈치 없기는....
난 잠시 한나와 민아를 번갈아 보며
지금 들은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짚이는 곳이 없었다.
기억 - ....... 그런 거야?
한나의 말을 그대로 받아 넘겨 묻자
푹 숙인 고개를 끄덕이는 민아.
하지만 그 안색은 방금 전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다.
기억
-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네...
정말 괜찮은 거야? 그냥 있어도 돼?
민아 - ........
한나 - 아이 나참! 고등학교 때 안 배웠어요?
민아
- 하...한나야, 그만.... 그만.
아무래도 방에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기억 - 그래, 그쪽이 낫다니까. 같이..
‘따악!!’
방으로 향하는 민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누군가 내 뒤통수를 제법 세게 때렸다.
욱하는 기분에 미간을 찌푸리며
휙 돌아본 그곳엔 금연 2일차에 접어든
김양이 허리에 손을 집고 서있었다.
김양
- 내 진짜 가만있으려고 해도
답답해서 못 보고 있겠네! 바보냐 너는?!
기억 - 왜..... 왜 그러십니까?
민아 - 어...언니....
김양
- 잇...그.... 아오 나 진짜.... 말도 못하겠고...
민아야, 가자. 내가 빌려줄게.
기억 - 에? 뭘 빌려줘요? 뭐.... 뭐가 필요한데?
한나 - 오빠.... 제발 그만해요.
끝까지 민아를 따라가려는 나를 한나가 붙잡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사람들이 앉아있는 쪽을 보니
한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쏠려 있었다.
기억 - ....... 어라.
민아 - 에이씨! 바보야! 으아아앙!!
‘퍼억!’
계단을 오르던 민아는
멍하니 서있는 내 뒤통수를 향해
들고 있던 쿠션을 힘껏 던지곤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뭐지 이 분위기는?
나만 뭘 모르고 있는 건가?
한나 - ...... 이럴 줄 알았어.
기억 - 왜.. 왜 그러는 거야 다들?
한나 - 좀 따라와 봐요.
잠시 후.
기억 - ......
한나 - .......
두둥....
기억 - 어쩌죠?
한나 - 눈치도 너무 없으면 죄인 거 알아요?
기억 - 아니.... 나는 뭐랄까....
고등학교 시절 내내
프로게스테론이니 에스트로겐이니 하는
생소한 이름들을 죽어라 외워놓고도
막상 현실에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버린 나.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제도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그건 아닌가?
어찌됐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회생불가의 정신적 데미지를 입고
방에 틀어박혀 버린 그녀를 달래는 일이었다.
기억 - 저기.... 공주님.
민아 - 몰라 바보야!
‘투웅!’
문 밖에서 그녀를 부르자마자
쨍하고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함께
그리 딱딱하지 않은 무언가가
문 안쪽에 맞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억 - 저기.... 내가 잘못했어.
민아 - 메기! 아구! 멍게! 이마에 혹 달린 금붕어!
생선 중에 이상하게 생긴 건 다나오는 구나....
난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문고리를 돌려보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단단히 잠겨있는 방문.
기억 - 자기야~ 그러지 말고....
민아 - ..풋?!
기억 - 어? 지금 웃었지? 그지? 문 좀 열어줘요~.
그렇게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떨어가며
그녀를 달래고 달래서야
난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민아 - 무릎베개 해줘.
기억 - ..... 아....응.
민아 - 에이... 바보.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없으려면
달력에 체크라도 해두는 게 좋을까...
비스듬히 무릎을 베고 누운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앞으로 있을 수많은 고비들을 어찌 넘길 지
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비책을 강구해보는 나였다.
김씨 - 다녀왔습니다~!
허씨 - 으드드드... 춥다 추워.
탈출 루트를 찾아 나선 지 두 시간가량이 지나
일행들이 무사히 돌아왔다.
드디어 기나긴 고립생활의
종지부를 찍을 지도 모를 결과를 듣기 위해
나와 민아는 거실로 나갔다.
연출 - 어떻게 성과가 좀 있어?
회계
- 음... 더 이상 눈만 안 온다고 하면
그럭저럭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일기예보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처럼 날씨 좋을 때 돌파 하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김군 - 으으으.... 또 가요?
회계 - 누구 때문에 이 꼴인데 인마!
출발 예정시간은 2시간 뒤.
예상 소요시간 40분.
사람들은 각자의 짐을 챙기고
주변을 정리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억 - 괜찮겠어?
민아 - .....으응. 아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한나 - 그래요, 사람 무안하게....
그렇게 민아는 방으로 들어갔지만
그녀의 상태를 가늠할 수가 없는 나로선
막연히 불안하기만 하다.
2시간 뒤.
준비를 마친 부원들이 거실에 모였다.
이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와
불안이 반반 뒤섞인 어수선한 분위기.
회계
- 이제부터 실족 사고에 대비해
로프로 모두의 몸을 하나로 묶을 거야.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집으로 간다.
히말라야 원정대를 연상케 하는 철저한 대비.
어찌 보면 좀 지나치다 싶은 면도 있지만
본래 ‘사고는 한 순간’이라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출 - 이야.. 그런데 이거 다 어디서 났냐?
남녀가 교대로 서서 허리에 줄을 묶는 사이
연출이 로프 한 자락을 흔들며 물었다.
여러 가닥의 짧은 끈을 매듭으로 연결해 만든 안전띠.
길이나 형태를 생각해 볼 때
그 중 상당수는 야외 창고에 있던 개 목줄로 추정된다.
회계 - 음.... 그.... 지하 창고에 있던 거야.
연출
- 그래? 흠.. 거긴 내가 거의 다 찾아봤었는데...
어? 여긴 이상한 고리도 있네, 목에 묶는 건가 이거?
회계 - 그....글쎄? 기둥 같은 데 묶는 게 아닐까.
주변에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로프 한 쪽 끝에 매달려 있는 개목걸이를 들어
자신의 목에 둘러보는 연출.
견공용 장난감을 먹다보니 왠지 끌린 걸까...
이제 더 이상 사냥개라는 별명은 되돌릴 수 없게 됐다.
회계 - 자! 모두 준비됐으면 나가자!
부원들은 회계의 신호에 따라
설산다운힐을 향해 밖으로 향했다.
‘빵빵......’
그리고 바로 현관 앞에 버티고 서있는
불도저처럼 생긴 거대한 제설차량과 마주쳤다.
119대원
- 어이쿠? 어떻게 딱 맞춰서들 나오셨네?
거 어여어여들 타세요.
허리에 끈들은 또 뭐래요?
제설차의 뒤로 힐끗 보이는 검은 색 아스팔트.
우리가 도착 첫날
한 시간여에 걸쳐 빙빙 돌아 올라온 눈길은
차량 진입을 위한 포장도로였던 것이다.
119대원 - .... 안 가요?
...... 그 순간의 뻘쭘함이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