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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 수기] <5> 잊지못할 기억

김항준 |2002.07.28 22:30
조회 61 |추천 0

94년 미국월드컵. 너무 힘들었다. 볼리비아전 당시 문전에서 2∼3차례 허공으로 공을 차올린 뒤 나는 그야말로 '죽일 놈'이 됐다.
 
모든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일부 축구팬과 언론들은 끊임없이 나를 몰아세웠다.
 
나를 좋아하는 팬들과 '안티 황선홍'파로 갈리어 PC통신을 통해 서로 글을 띄우며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지금도 팬클럽 홈페이지를 이따금씩 들여다볼 뿐 인터넷과는 별로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 글을 직접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똥볼'만 찬다는 숱한 비난…. 지금와서 얘기지만 그때 문전에서의 나의 판단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슛에서의 실수이지 결코 '판단 미스'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골키퍼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수비수 2명이 골라인에 서 있었기 때문에 순간 위쪽으로 차야 골을 넣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리 이하로 차면 수비수에게 걸릴 수 있었다.
 
주위의 비난이 컸지만 그래도 위안이 됐던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었다. '나는 아직 젊다'라는 생각이 오기처럼 치밀어 올랐고, 또다시 기회는 온다고 굳게 믿었다. 적어도 한두번은….
 
그래서 98년프랑스월드컵에서의 절망감은 더욱 컸다. 부상으로 벤치만 지키고 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4년간 이를 갈았는데….
 
모든 게 끝났다는 좌절감뿐이었다. "황선홍이 겁이 많아서 큰 대회를 피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주먹으로 벽이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는 대회가 끝난 뒤 잠적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 축구인생은 여기까지구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흘 정도 집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후 나흘쯤은 시골에 내려가 있었는데, 충남 예산의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묘비를 끌어안고 한나절 내내 펑펑 울기도 했다.
 
축구를 했기 때문에 이런 절망감에 빠져야 하는구나…. 야속함과 좌절감이 계속 교차됐다. 스스로를 이길 방법이 없었다. 누가 공을 하늘로 차고 싶어 차고, 부상을 당하고 싶어 당하겠는가….
 
98년 월드컵 이후 내 가슴 속에 2002년 월드컵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예회복이라는 말은 그저 남들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유니폼을 벗고 싶은 생각뿐이었으니까.
 
당시 긴 암흑의 터널에 빠져 있을 때 황새 팬클럽 회원들과 집사람에게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졌다.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큰 위안이 됐다.
 
다른 팬모임에 비해 유별난 황새 팬클럽.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내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 같은 존재다. 힘들 때는 이들의 얼굴을 밤새 차례차례 떠올려 보기도 했다.
 
짧고도 긴 방황이 끝난 뒤 일본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내 축구인생은 다시 시작됐다. 99년 득점왕에 오르면서 '불운'을 떨칠 기회는 또 온다는 희망이 조금씩 보였다. 부상에 민감하게 신경을 쓴 것도 '한번 더 다치면 정말 끝'이라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홈페이지에 밤새 글을 띄워 위로를 해줬던 황새 팬클럽 회원들은 일본에까지 와서 응원을 했다. 이들을 볼 때마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른 채 몇번이고 가슴속으로 다짐했다.
 
'꼭 빚을 갚겠습니다. 꼭 빚을 갚겠습니다.'


정리〓양정석 특파원 jsyang@h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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