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II / 1966년 11월 30일 / 종이에 마커 / 25 x 16.5 cm / 파리 뒤뷔페 재단 소장
1962년 뒤뷔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길고 가장 독창적인 연작 ‘우를루프(L'Hourloupe)'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 연작은 뒤뷔페가 전화 통화를 하던 중 볼펜으로 무심히 낙서하듯 그린 스케치에서 착안한 것이다. ‘우를루프’라는 단어는 불어의 ‘소리지르다(hurler)’, ‘새가 지저귀다(hululer)’, ‘늑대(loup)’, ‘곱슬머리 리케(Riquet a la Houppe, 동화작가 샤를르 페로의 동화)’, 혹은 정신적 방황을 그린 모파상의 소설 ‘오를라(Le Horla)’ 등을 연상시키지만, 그 어떠한 단어로도 귀착되지 않는 뒤뷔페 자신의 신조어이다. 는 흔히 파는 저렴한 필기도구 마커의 기본색상(검정, 빨강, 파랑)으로, 마찬가지로 흔하디흔한 종이 위에 빠르게 쓱싹쓱싹 그린 자신의 초상이다. 매우 단순하고 제한된 선과 색채로 명암도 없고 원근법도 없이 시각화된 모든 이미지들은, 뒤뷔페가 만든 ‘우를루프’ 세계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또 다른’ 어법이다. 뒤뷔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에 말 걸고, 세계에 개입하며, 아예 또 다른 세계를 창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는 자신의 형상까지도 완전히 동화되어, 마치 이 '자화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