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크리스마스 휴전,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예지출판사를 찾아서)

이대희 |2006.12.22 21:34
조회 63 |추천 0

 Merry Christmas 맛있는 토스트 BOOK 입니다 *^^*

 

"전쟁과 민족적 증오에 대한 모든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때, 전장의 한복판에서 아이들처럼 행복했습니다...."

 

 

에 실렸던 사진.

1915년 1월 8일자 1면에 "역사적인 집단 : 영국과 독일 병사들이 함께 사진 찍다" 라는 제목으로 게제된 이 사진은 당시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EMBED style="FILTER: xray" src=http://pds.kiri.co.kr/community/PDS/20~/2086~/20860/Frank%20Sinatra%20-%2002.%20Silent%20Night,%20Holy%20Night.wma width=300 height=45 type=video/x-ms-asf volume="0" loop="-1" EnableContextMenu="0" AllowScriptAccess="never" autostart="false" invokeURLs="false">

 

처음에는 누군가가'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을 뿐이다. 노래는 나지막이 울리더니 죽음처럼 고요한 플랑드르 풍경 속을 떠돌다 사라졌다. 그러나 노래는 곧 파도처럼 전장 곳곳으로 퍼져나가 "어둡고 긴 전선의 모든 참호에 길게 울려 퍼졌다." 100m 떨어져 있는 영국군 쪽은 아직 조용했다. 반면 독일군 병사들은 "수천 명의 사나이들이 좌우에서" 합창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다음에는 '이사야 말씀하신'이 공기를 갈랐다. 마지막 소절이 끝나자 1분쯤 후에 영국군 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잘했다, 제군." "앙코르,앙코르!" "좀 더 부탁해."

갈채를 받은 독일군 병사들은 이렇게 답했다. "Merry Christmas, Englishmen!" "We not shoot,you not shoot."(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이 말은 진심이었다. 그륻은 참호를 따라 1m 높이로 솟아 있던 흉벽 꼭대기에 양초를 세워 불을 붙여놓았다. 어둠 속에서 실에 꿰어진 진주처럼 펄럭거렸다. 한 영국군 병사가 부모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촛불은 무대조명처럼 보였다고 한다. (11P~22P)

 

1914년 12월, 서부전선. 차가운 겨울 장맛비로 무릎까지 찬 오물투성이의 진창, 널려 있는 시체와 이와 쥐 속에서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은 병사들에게 상상하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독일군 병사가 부르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영국군 병사들은 아무도 총을 쏠 수 없었다. 노래가 끝난 후 독일군이 외친 소리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We not shoot, you shoot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이렇게 서부전선 수백km에 걸쳐, 수천 명의 평범한 병사들이 1914년 크리스마스에 총을 내려놓고 휴전을 결정했다. 장군들의 협박과 국내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축구를 하며 한 달 가까이 이 휴전을 유지했다. 이 전쟁이 자신들의 전쟁이 아니라는 것, 무기 앞에서는 모두가 불쌍한 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휴전은 당시 정부와 군지도부에서 그토록 축소하려 애썼던 바처럼 그 시기 특유의 분위기에 편승한 일회적인 사건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과 국가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혀 전선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미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류애를 실현한 기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에게 남은 희망의 산 증거로, 전쟁에 지친 자들을 위로하는 감동으로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2005년에는 특히 영화로 만들어져 칸 영화제에서 호평을 얻었으며, 11월 프랑스를 선두로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개봉되어 1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바 있다.

1차대전은 일종의 가족 간 불화 같은 것이었다. 십자군 전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던 왕가들이 제국주의적 팽창의 길에서 맞부딪혀 서로를 끝장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끌고 들어갔던 평범한 사람들의 피해가 너무 컸다. 벨기에 남부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북부를 거쳐 스위스에 이르는 서부전선의 상황은 특히나 끔찍했다.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참호 모습.

사람 키보다 깊이 판 도랑위로 50cm 정도의 흉벽을 돋워 만들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흉벽 앞에 세워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고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허울에 불과한 동기와 전쟁에 대한 낭만적 시각이 만들어낸 환상은 끊이지 않는 포격과 무인지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이 주는 공포로 이미 그 효력을 잃어버렸다. 전쟁에 참여한 각국의 정부와 군지도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면 날조와 과장도 서슴지 않으며 적군에 대한 국민들의 증오를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 때문에 전장의 병사들과 후방의 국민들 간에는 감정적으로 커다란 괴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와 벨기에는 그 간극이 더 컸다. 페어플레이 정신에 어긋나는 독일의 행동을 보고만 있을 순 없어 원정경기 구경하듯 참전한 영국에 비해 국토가 바로 전장이 되어버린 프랑스와 벨기에는 절박할 수밖에 없었다. 또 독일인들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에는 죽음으로써 이행해야 하는 신이 내린 과제라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학교교육과 군사교육이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독일인들은 거의 모두가 정신적으로는 준비된 군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크리스마스 휴전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소개되었고 또 가장 실제에 가까운 모습으로 소개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병사들이 상부에 보고하거나 허가를 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적군 병사와 만나 휴전을 결정한 것은 군지도부에 엄청난 충격과 위기감을 주었다. 이러다가는 전쟁을 진행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날까지 화려한 연회를 즐기느라 제때 대처하지 못해 선수를 놓쳤던 장군들은 그 다음날부터 전장 시찰과 함께 적과의 친교가 발각될 경우 최고 사형에 처하겠다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미 서로를 만나 많은 것을 나눈 후였다. 그들은 무인지대에 널려 있는 시신들을 묻어주는 일부터 시작했다. 대개 그것이 휴전의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부터가 작은 기적이었다. 죽은 동료의 시신은 적에 대한 증오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적과 함께 죽은 동료를 묻으면서 그들은 오히려 서로의 처지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갔다. 개인적으로 경험해 보니 맞은편 적군은 좋은 젊은이들이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집을 그리워하고, 공포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처럼 전쟁이라면 지긋지긋해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서로를 쏘아야 하는가?

 

 

그들은 서로 담배와 초콜릿과 쇠고기 통조림을 나누고, 참호의 가장 위협적 존재인 이와 쥐의 퇴치법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고, 자전거 경주, 권투 시합을 벌이고 축구 경기를 했다. 한 전장에서 독일의 작센군이 영국의 스코틀랜드군을 3:2로 이겼다는 소문이 주변 전선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장군들의 위협에 굴복해 고분고분 다시 총을 쏠 수가 없었다. 어제까지 이렇게 지내놓고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오늘 다시 총을 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 전략을 짰다. 기습 공격 전 장비를 확인할 때 일부러 큰소리를 내서 알려주기로 했다. 서로 기껏해야 1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한 신호가 될 것이다. 사격명령이 있을시엔 상대편 '신사'들이 맞지 않게 허공에 발사하기로 했다. 고위 장교들이 시찰을 올 때는 미리 알려주고 서로 그들의 마음에 들 만한 소음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이렇게 그들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그 다음해인 1915년에도 몇몇 전장에서는 자기네들의 휴전을 유지했다.

 

 

쿠르트 체미쉬 소위.왕립 작센군 제134보병연대의 쿠르트 체미쉬 소위가 사벨에 기댄 채 사진사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14년 거룩한 밤에 그는 영국군과 휴전을 체결한 최초의 군인들 중 하나였다.

 

크리스마스 휴전, 그 후

 

그러나 크리스마스 휴전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모두 군사적인 훈육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또한 누구도 우세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렇게 정전이 되어버린 각국의 정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팽배했다. 영국에서는 버트런드 러셀을 위시한 사람들이 병역거부 운동을 벌였고, 독일에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유럽인에게 보내는 선언'을 통해 전쟁 반대를 표명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병사들은 조금이라도 더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했을 뿐 전쟁을 끝내기 위한 조직적 행동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독일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작가 미하엘 유르크스는 서부전선의 현지 조사, 참전자들의 자손, 각국의 전쟁박물관과 문서보관실의 자료 등 가능한 모든 증거를 찾아내 그것을 주춧돌로 삼고 당시 사회.문화적 정황을 기둥으로 해서 크리스마스 휴전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당시 정부와 군부는 축소하거나 숨기려고 갖은 애를 써서 공식적인 자료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진실은, 그가 자료를 통해서 들었던 보잘것없는 병사들의 목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좋은 전쟁이란 없다, 그리고 나쁜 평화란 없다."

 

 

 황경주 편집장의 편집후기


미국이 이라크를 칠 거라는 풍문이 실현의 과정을 밟아나가기 시작하던 2003년 벽두에 이 책을 만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영국.벨기에 연합군과 독일군이 대치하던, 그 유명한 서부전선의 끔찍하고 살벌한 전장에서 크리스마스를 계기로 말단 병사들이 스스로 적군들과 휴전에 들어갔다. 수뇌부에서 사형으로 위협해대도 그 휴전은 1년을 넘게 산발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책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믿기엔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누가 알겠습니까…크리스마스 휴전이 종전의 시작을 의미할 수도 있었음을. 원래 그들 중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우리들 중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전선에 있는 바로 우리가 끝내야 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서부전선 최전선에 영국 병사로 참전했던 한 사람에게서 저자가 직접들은 이 말은 어떤 실마리 같은 것을 주었다. 반전이라는 것은 어쩌면 전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과격하고 너무나 낭만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견고한 시스템(정부, 군수뇌부, 애국을 외치는 언론매체, 민족주의 등)의 집요하고 공포스러운 방해를 각오해야 하는 방법이다.

이런 생각이 많은 사람들과 공요되기를 바라며 이 책의 출간을 결정했다. 2004년 크리스마스 즌을 목표로. 그러나 결국 이 책은 2004년에 나오지 못했다. 번역이며, 이미지 저작권 등의 문제들이 중첩되어 1년을 더 끌었던 것이다.

 

 

출간을 위해 작업하는 내내 1차대전 전장의 언저리를 맴돌았던 것 같다. 여러 매체를 통해 소개되는 1차대전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고, 1917이나 1918이란 숫자가 수많은 의미와 이미지로 해석되기 시작했고, 키르히너, 오토 딕스, 케테 콜베츠의 운명이 1차대전과 맥을 같이 했음을 가슴 절절히 느꼈다.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할까? 시대는 이미 차가운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고, 인간성이란 말은 고색창연한 퇴물이 되었으며, 낭만은 이미 끝났다고 여겨지는 지금,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동유럽에서 '우리도 쏘지 않을 테니, 너희도 쏘지 말라'며 용감하게 적군 앞에 나서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예지출판사를 찾아서

 

(일산호수공원)

 

'크리스마스 휴전,큰 전잳을 멈춘 작은 평화'를 만났던 것은 2005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바로 지난 다음날이었던 것 같다. '서로의 적대감이 가장 큰 전쟁터에서 어디에서부터인가 시작되어지는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흘러나오는 캐롤이 긴장감을 풀었고, 무인지대에서 죽어간 시신을 묻어주며 신뢰를 쌓아 동질감을 얻은 그들이 전쟁을 잠시 멈추고 평화를 즐겼다.'라는 내용이 꽤 흥미로웠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아쉽게도 크리스마스 이전에 나온 것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후에 나와 언론의 관심을 조금은 비껴가 많은 독자들이 잘 모르고 지나갔던 책이었다.(그래도 책의 내용이 좋아서인지 어느정도 언론리뷰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아쉬운 탓이었던가? 지난 페이퍼와 작년 이맘때의 책들을 보다 이 책을 다시 집어들었고, 출판사를 찾게 되었다.

 

자유로를 어느 정도 지나 장항 IC로 들어서면 보이는 일산호수공원이 시작하는 곳에 크고 작은 오피스텔이 모여 있다. 서울에서 조금 벗어나는 출판사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하는 곳이다. 예지출판사도 위에 보이는 오피스텔중에 하나이다.

 

 

예지출판사에 들어서면 보이는 모습들이 이다. 출판사라기에는 작고 아담한 크기와 예쁜 소품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예지의 김종욱 대표와 황경주 편집장이 환한 표정으로 불청객을 반겨주며 예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듣다 질문을 하게 된 첫마디가 "혹시. 자매나 친척관계가 아니십니까?" 였다.

두사람의 웃는 모습이 많이 닮은 것 같아 뜬금 없는 질문이었는데 대답은 "서로 오랫동안(약 7년) 호흡을 맞추며 일해서 그런 것 같아요. *^^* 이제는 일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없어도 척척 뜻이 통하는, 어떻게 보면 친구같고 자매같고 동업자 같은 사이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표정까지도 많이 닮아 가는 것 같고요." 하며 웃는다.

 

출판가의 특성상 한 곳에서 몇 년을 이렇게 오래 같이 하는 곳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장단점에 대해 특히, 오히려 오래 같이 근무하다보면 서로에 대해 싫은 말도 하기 어려워 정작 편집일에 충분한 대화가 없지 않은가에 대한 궁금증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서로에 익숙해져있고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다보니 신뢰도가 밑바탕이 되어 설사 상대방에게 약간의 쓴소리가 있더라도 애정이 담긴 어드바이스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분한 외적조건과 근무조건이 있고, 각자의 맡은 분야가 있어 서로 보완작용을 해서 잘짜여진 톱니바퀴 같아 지금까지 한번의 트러블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하며 웃는 편집장의 표정에서 예지의 책들을 한꺼번에 읽는 듯 한 기분좋은 출판사 방문이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예지의 책들을 사랑해주시는 독자들의 관심에 더 큰 보답으로 좋은 책들을 앞으로 열심히 만들겠다.'는 새해 다짐을 들으며 무법자의 기습방문을 마칩니다.

 

작은 스텐드의 불빛이 12월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이곳에는 유난히 책의 모습을 형상화한 소품들이 많았다.

 

출판사의 인테리어를 보면 대표의 성향을 엿볼 수가 있다. 이곳은 작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내 성격과 비슷하다. 대표가 해외 업무때 하나 둘 직접 사 모은 것이라고 한다.(시詩를 좋아하는 문학소녀와 같은 모습과 어울리는 소품들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예지의 책들이 그런 책들로 독자들에게 남아있기를 ....

 


 

 예지의 책
 


 


 


2001년부터 경제, 경영, 자기계발 분야의 등의 책과 역사와 과학서, 그리고 인문서를 위주로 다양한 분야를 만들어내며 독자들의 관심과 언론의 주목을 받은 책들입니다.

 

 

 

전쟁도 멈추며 평화를 즐기는 그런 기적같은 평온과 희망을 만끽하시며  

소중한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맛있는 토스트 BOOK 입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