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과 소멸 (윤회와 윤회의 길목에서)
1.
어찌된 일인가,
내가 차가운 돌계단위에 누워서 꼼짝도 안하니 어찌 된 일인가, 눈구멍은 밖으로 나 있어 평생 밖만 바라봤지 나를 이렇듯 생생히 내려다본 적은 없어, 혹시 거울인가 하여 손을 내미니 물컹하여 살점이 잡히더라,
내 눈으로 똑똑히 나를 바라봄은 곧 죽음이라,
섬뜩하여 자세히 살피고 또 살피니, 분명히 오감이 사라진 내 육신이라,
눈가에 검은 그늘내리고 입술에는 푸릇푸릇 생기 사라져,
춥고 배고픈 줄 모르는 뼈와 고깃덩이니, 개가 뜯어 먹어도 아프다는 소리 한 마디 못하더라, 물방울 하나도 그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더라,
진정 죽음인가,
진정 죽음인가,
소리치고 울부짖어 육신을 맴돌며, 일어나라, 일어나라, 흔들었건만,
생전의 내 마음 같지 않더라, 이미 내 팔다리가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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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득 돌아보니 싸늘한 표정으로 누가 서 있어, 누구냐고 물으니,
시바의 신전을 지키는 여사제라, 나를 마중 나왔다더라,
“어이 당신 마음대로 나를 맞이하려 하오, 어찌 내 삶을 방해 하시오, 다 살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 나를 세상에 내려 보내지 말아야 할 것을,”
“무엇이라고? 당신 삶?”
“그렇소, 내 삶이요.”
“호호호, 미련한 녀석, 네 삶이 어디 있었다고 감히 네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
아득한 정신이다. 삶의 소유권을 주장할 아무런 증표가 없도다. 육신이 널브러지니 무엇으로 삶을 주장한단 말인가,
어느덧 순서를 기다리던 내 육신이 검은 재 묻은 화장장의 손에 들려져 장작더미 위에 올려지니 다급할 뿐이었다.
태우지 마라, 장작더미에 불을 지피지 마라,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함부로 내 육신에 불을 지르느냐, 발을 동동 굴려 막았으나 아래로부터 치솟는 불길이 거세게 휘감아 그 연기가 자욱하여,
빨리 피하라, 빨리 피하라, 뜨거운 불길이다,
소리쳤지만 어찌 살아생전의 내 육신과 같단 말인가, 황망할 따름이다.
3.
“호호호, 어리석은 녀석, 불길이 뜨겁냐? 네 뼈와 살이 타는 고통을 느끼느냐?”
“아니요, 못 느끼겠소, 아무렇지도 않소.”
그러나 슬픈 일이 아닌가,
시각(視覺)은 또렷하여 미(美)와 추(醜)를 구분했고, 청각(聽覺)은 밝아 아름다운 소리만 쫓았고, 후각(嗅覺)은 예민하여 똥냄새를 피했으며, 미각(味覺)은 맛있는 음식만 거둬들여 즐거웠었다. 또한 촉각(觸覺)은 미녀의 살결을 더듬어 밤마다 환락이었으니, 그 모든 오감(五感)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 모든 즐거움을 만끽했던 내 살점이 불에 오그라들어 재로 흩날리니 육신의 기둥인 뼈만 앙상히 드러나 제멋대로 뒤틀린다. 눈구멍이 횡 한 해골이 목뼈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져 구른다.
아, 저것이 내 모습이었는가, 원래 나였는가,
그렇다면 이 참상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지금의 나는 또 무엇인가,
“지금의 네가 무엇이냐고?”
“그렇다.”
“업장이다. 알라야식이다. 너 중의 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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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사제는 측은한 눈초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의 감각이 있다. 몸에 찰싹 달라붙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오감이 있고, 그것을 넘으면 육감(六感)이 존재하여 정신세계를 지배하지만 역시 육신에 속해 있으며, 칠식(七識)은 스스로의 생명을 지켜 존재하려는 무의식이다. 혼절하여 의식이 없는 사람도 끊임없이 살려는 몸부림을 무의식이 이끌어내니 바로 마나야식을 이름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육신의 지배를 받는 의식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자신은 무엇이냐고 묻는 너, 바로 너는 팔식(八識)인 알라야식이라, 살아오며 얽힌 인연이요, 쌓인 업보라, 불타는 저 육신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본연의 너다.”
아,
갠지스강에 뼛가루 날린다.
내 것이 아니지만, 꼭 내 것과 같은 백색가루가 강물위에 떨어져 흐른다.
6.
시간 이전의 시간이 끝없어, 시간 이후의 시간도 끝없어,
무량은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어 영겁에 영겁을 거듭하고, 우주는 생성 소멸하다가 또 다시 태어나고, 끊임없이 거듭난다.
그러나 유일하게 소멸치 않는 업장이라, 그 업장이 무량에 무량을 수없이 더한 무량을 넘어 오늘에 이른 즉, 곤고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도다,
여사제에게 이끌려 시바의 신전에 올라 엎드렸다. 49일간 모든 죄업을 통회하고 용서를 빌라고 여사제는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돌아가는 법륜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다.
높고 높은 신전의 차가운 돌바닥에 오체투지 했다.
7.
업(業)을 소멸시켜 영겁(永劫)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생성과 소멸에서 해방시켜 주십시오.
첫 날의 기도는 얼떨떨했다. 내 것으로 알고 지낸 육신이 한갓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인연이 얽히고설킨 덩어리였으니, 살과 뼈는 흙으로, 피는 물로, 체온은 열기로, 숨결은 바람으로 제각각 돌아갔다. 그리하여 세상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기도하는 정신이 혼미할 뿐이었다.
둘째 날도 그 얼떨떨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셋째 날도, 네 째 날도,
일주일이 지나자 드디어 격함이 몰아치며, 스친 업장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내가 착하게만 살아온 것도 아니다.
내가 과거의 죄업을 속죄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다.
어이 할꼬, 어이 할꼬,
한 생에 쌓인 업은 중대하여 그 업을 풀려면 수십 수백의 생이 필요하다던데,
돌바닥에 머리를 쿵쿵 부딪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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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어느 생에서 나는 왕이었다.
병사를 몰아 영토를 넓히며 살생을 일삼고 노략질에 급급했다. 금은보화와 미녀가 많다는 아구타 왕국을 정벌했다. 성을 둘러싼 굶주린 병사들에게 나는 명령했다.
“저 성을 무너뜨리면 그 안에 배불릴 양식과 껴안아도 좋을 여자들이 많다. 나의 용감한 병사들이여, 어서 성을 함락하여 네 몸을 즐거움에 흠뻑 젖게 하라.”
피를 뿜는 적장의 머리가 땅에 뒹굴고, 승리의 쾌감에 젖은 내 몸은 온통 피로 물들었다. 드디어 성의 한 귀퉁이부터 무너지더니 이내 성문마저 부셔져 나갔다. 부하장수를 이끌고 나는 궁성으로 돌진하여 피가 뚝뚝 떨어지는 발걸음을 내딛어 아구타 왕의 면전에 우뚝 섰다.
번쩍,
찬 칼날이 허공을 그어 내리자 왕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용감한 나의 병사들이여, 우리에게 대적하면 오직 죽음이리라.
나는 승전을 축하하는 만찬에서 아구타 왕의 왕비를 끌어내어 무릎을 꿇게 했다.
“지엄한 왕인 나를 침실에서 기쁘게 맞이하라.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
왕비는 죽음을 택했다. 화가 난 나는 아구타 왕의 공주 두 명을 끌어냈다.
“죽음이냐? 삶이냐?”
겁에 질린 공주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그 몸을 겁탈하여 밤새 즐거웠으니 수하의 장수들도 역시 적국에서 잡아온 여자들을 밤새 희롱했다.
영토는 넓고 감히 반항하는 자도 없었다. 무자비한 내 칼과 병사들 앞에서 모두 떨었다. 아구타 왕국의 남자들은 저항한 그들의 죄가 괘씸하여 모두 목을 쳐 해골로 산을 쌓았다. 천년만년의 영화를 누려야 할 나의 제국, 태양이 뜨는 곳까지 나의 땅이 아닌 곳이 없도다.
아, 두터운 갑옷이 창칼을 막을 수는 있어도, 안에서부터 오는 노쇠를 막을 수 없음이랴,
명의(名醫)와 명약(名藥)을 다 동원하여, 급히 오는 세월을 막아 그 발걸음을 더디게 하려했으나, 이른 아침결에 사계절이 한꺼번에 지나는 섬뜩함이라,
누가 나의 명(命)을 붙잡을 것인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제왕의 위엄이 세월의 적장에게 자꾸 꺾이니, 무릎의 힘이 빠지고 말소리는 더듬거려, 쇠한 몸에 수많은 미녀가 무슨 소용이며, 이 빠진 우물거림에 기름진 음식도 맛을 잃었어라, 내가 돌아서자마자 왕비와 왕자,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맞대고 쑤군거린다. 언제 저 노왕(老王)이 죽을 것인가,
꿈자리 사납다.
내 앞에서 죽어간 적장들이 머리 떨어진 몸체를 흔들며 피를 흘린다. 자꾸 손짓하며 저승에 오라고 부른다. 원귀(寃鬼)들이 바글바글 모여들어 어서 오라고 한다.
저승은 혼자 가는구나. 무적의 백만 병사를 놔두고 혼자서 칼을 차고 가는구나.
누가 나를 따라 저승에 동행할까,
신료들이 두런대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죽음을 대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서로 의논하는 소리다. 가장 귀여워했던 막내공주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제국을 휘어잡았던 손아귀의 힘이 스르르 풀린다. 안간힘을 쓰며 다시 잡으려도 자꾸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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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느 생에서 나는 노예였다.
새우잠에서 깬 새벽이면 등가죽 벗기는 채찍부터 받았다. 매일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돌을 어깨에 걸머져 날았다. 그러다가 지쳐서 사막에 쓰러졌다. 주인은 내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그대로 방치했다.
목을 넘어오는 시원한 촉감에 겨우 눈을 떴다.
노인과 젊은 여자가 눈에 띄었다. 노인은 사막을 건너는 장사꾼이었고, 그 옆의 여자는 손녀딸이었다. 그들은 낙타 위에 나를 싣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 돌봐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원기를 회복했다.
생명의 은인이시여, 감사합니다.
은혜를 갚는 의미에서 노인을 쫓아다니며 장사를 거들었다. 의외로 나는 장사 수환을 발휘했다. 노인은 점점 부자가 되어갔다. 나는 은근히 노인의 손녀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노인은 나의 이런 기색을 눈치 채고, 손녀딸은 이미 혼처가 정해져 있다고 잘라 말했다. 매우 섭섭했다. 지금 노인이 누리는 엄청난 재물은 과연 누구 덕에 모은 것인가,
깊은 밤에 비수를 들고 노인의 침상으로 다가가 심장에 꽂았다.
비명소리에 깜짝 놀란 노인의 손녀딸이 달려왔다. 나는 그녀에게 같이 살자고 애원했다. 이 모든 재물을 가지고 멀리 도망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애초에 먹혀들어갈 말이 아니었다.
완강히 저항하는 그녀의 목에 비수를 꽂았다.
그날 밤에 나는 노인의 재물을 모두 낙타에 싣고 도망쳐 사막을 건넜다. 여러 개의 부족마을을 스쳐 초원지대를 지나고 산을 넘어 아주 멀리 도망갔다. 낮선 지방에서도 역시 나는 수환을 발휘하여 더욱 큰 부자가 되었다.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러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죄의식에서는 도망치지 못했다. 줄곧 노인과 그 손녀딸의 모습이 뒤통수에 따라붙었다.
어느 날 곁을 지나던 성자는 흠칫 돌아보며 내 몸에서 피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성자는 나의 과거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성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나 대신에 신의 용서를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집 뒤뜰에 조그마하지만 정성을 들여 대리석으로 사원을 짓고 성자를 모셨다. 성자는 아침저녁으로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아내도 극진히 성자를 모셨고, 집안의 대소사를 그와 상의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나의 어여쁜 아내와 성자가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는 쑤군거림이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일찍 집에 돌아와 아내를 불러 은근히 물었다. 아내는 펄쩍 뛰면서 신에게 맹세하여 그런 일은 없다고 단언했다.
당연하지, 정숙하고 어여쁜 아내가 어떤 여자인데 그렇겠는가,
며칠 후에 아내와 둘이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동방의 향신료가 섞인 포도주를 아내는 나에게 내밀었다. 편한 마음으로 그 술을 받아 마시자마자 가슴이 조여 왔다. 울컥 피를 토하며 벌떡 일어났지만 손과 발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나는 부들부들 탁자 귀퉁이를 부여잡고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성자의 음성이 들렸다. 조금만 있으면 독약이 온몸에 퍼져서 쓰러질 테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아내에게 말하는 소리였다. 나는 휘딱 뒤집어지는 눈에 힘을 주고는 돌아가지 않는 목을 겨우 돌려 뒤를 보았다. 성자와 아내가 나란히 손잡고 서 있었다. 아내는 성자에게 찰싹 달라붙어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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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느 생에 나는 음유시인이었다.
오현금을 뜯을 때에 사람들은 나를 소리의 신이라고 일컬었다. 청아한 목소리로 애틋한 가사를 붙여 노래 부르면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신전이 돌문 뒤에서 무희에게 속삭였다.
해가 있으면 달이 있어야 하오. 북극성과 남극성이 손잡아 세상이 굳건하오.
소리가 있으면 춤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당신의 춤은 신을 불러 모아 흥을 돋운다오. 당신의 어깨와 발이 내 소리를 딛고 움찔움찔 덩실덩실, 별을 잡아끌어 모아 몸에 감고 사방에 뿌리면, 비로소 춤과 소리가 합일되어 세상에 딱 한 송이뿐이 없는 꽃이 핀다오.
무희는 황홀한 표정으로 몸을 비틀했다. 슬쩍 돌벽에 등을 기대어 먼 달을 쳐다보았다.
달그림자가 불쑥 솟아오른 그녀의 유방을 스쳐 비꼈다. 둥둥 뛰는 가슴, 호흡을 가다듬는 무희의 입술이 떨렸다.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허리를 팔로 감았다,
아, 하는 그녀의 탄성, 어지럼증에 쓰러질 듯한 몸이 내게 안겨왔다. 너무 부드럽다. 바닥에 그녀를 눕히며 치마를 걷어 올렸다. 아, 하얀 허벅지에 박힌 달, 차마 눈부셔 똑바로 바라보지 못 할 달,
맹세는 신전에서 이루어졌다. 춤과 소리는 영원히 합일하여 천상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신의 다리가 될 것이라고, 사랑은 무덤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왕은 나에게 말했다. 신묘한 소리에 공주가 병이 들었다고,
부귀화 영화는 보장된다. 공주의 상사병을 네가 치료하라. 안 된다고 당연히 말했어야 했고, 또 그렇게 거부하더라고 목숨까지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계산했다.
부귀와 영화, 그리고 아름다운 공주,
얼마 후에 높은 신전에서 몸을 날린 무희에 관한 소문이 들렸다. 그녀의 몸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으니, 한 몸이지만 두 생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상심에 빠졌던 무희의 어머니가 강물에 뛰어들었다. 무희의 어머니는 장님이었고, 그녀를 봉양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미 왕궁의 최고 악사로 왕족대우를 받고 있었다.
무희의 비극이 사랑을 배신한 내 행위 때문이었지만, 애써 태연했다.
지금의 부귀와 영화에 비하면 그깟 천한 무희의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신에게 부귀와 영화를 받아 태어난 고귀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
나는 신의 가호를 받은 자로서 편하게 살았다. 공주는 헌신적이었다.
드디어 죽음을 맞이했다.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벗어나 천계로 올랐다.
시바의 신전으로 통하는 돌계단을 걸어올라 위에 다다르자, 제단 앞에서 붉은 옷을 입고 서 있는 여인이 보였다.
호호호호...... 깔깔깔깔.......
천만 개의 비수가 날아와 몸에 박히듯 무희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갈가리 찢었다.
나는 무릎을 퍽 꿇으며 진땀을 흘렸다. 잊혀진 것이 잊혀진 게 아니다. 아니라고 말한 것이 반드시 아닌 것도 아니다.
배신의 대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생의 배신이 수 백 생의 고난을 초래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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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어느 생에 나는 미친 자였다.
전체 생애는 알 수 없고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있다. 특히 살인에 대한 기억이다.
아이들은 나를 보면 마구 놀려댔다. 왜 놀리는지도 몰랐고, 아이들의 손가락질과 웃음소리가 무서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냥 울음만 터져 나왔다.
그러다가 겨우 몸을 움직여 집으로 뛰어오면 돌멩이가 날아왔다.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찢어져 피가 마구 흘렀다.
어머니는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껴안았다. 등을 다독여 진정시켰다.
동생은 순했다. 첫 살인이 일어난 날, 동생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꾸벅꾸벅 처마 밑에서 졸고 있었는데, 별안간 마당에 큰 뱀이 기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뱀이 날름 혀를 내밀어 나를 돌아보는 순간에 얼른 몸을 날려 뱀의 목을 꽉 잡아 조였다. 뱀은 몇 번 퍼득퍼득 몸을 떨다가 몸을 축 늘어뜨렸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큰 뱀이 잠자고 있을 때에 몸을 감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나는 뒤뜰에 땅을 파고 뱀을 묻었다.
저녁에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동생을 찾았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며칠 후에 동생의 시체가 뒤뜰에서 발견되었다.
모여든 친척들은 내가 죽였다고 모두 말했다. 아버지가 몽둥이로 내 어깨를 내리쳤다. 나는 펄쩍 뛰며 뒷산으로 마구 도망쳤다. 쫓아오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깊은 숲을 헤치며 한참 뛰다보니 아무도 쫓아오는 기색이 없었다. 멍한 시선을 석양에 놓고 앉아 있었다.
배도 고프고 추웠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그냥 슬픔이 끓어올라 나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내 울음소리는 더 커졌다.
달려온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한참 그러던 어머니는 내 형색을 보고 한없이 울먹였다. 숲길을 도망치느냐고 옷이 다 찢어지고 살갗은 긁혀 피떡이 덕지덕지 했다. 신은 벗겨져 맨발이었으니 발등과 바닥도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어머니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동생에 관한 일은 묻지 않았다.
그저 불쌍한 내 자식, 불쌍한 내 자식, 할뿐이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마당에서 보였던 뱀이 내 몸을 감는 느낌이 들었다. 그 뱀이다, 그 뱀이다. 나는 소리치며 또 뱀의 목을 꽉 휘어잡아 마구 눌렀다.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들어 나를 빙 둘러쌓았다. 나는 포승줄에 묶인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저 놈을 돌멩이로 쳐 죽여라,
사람들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나에게 손가락질 했다. 별안간 날아온 돌이 내 이마를 때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뒤이어 또 돌멩이가 마구 날아왔다.
무섭다. 무섭다. 너무 아프다.
나는 바들바들 떨며 소리치려 했지만 목구멍으로 피가 꿀떡 넘어가며 막혔다. 컥컥 토하자 핏덩이가 뱉어졌다. 순간 또 돌멩이가 날아와 머리에 맞았다.
가물가물 의식이 멀어져 갔다.
엄마, 엄마, 불렀다. 나를 꼭 껴안아 주던 엄마를 애타게 불렀지만 목소리는 입속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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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느 생에 나는 선지자였다. 인간의 영혼을 팔아먹는 사이비 선지자였다.
달변이다. 내 논리를 이기는 자가 없다. 철학은 진리와 상관없다. 오직 그 일관성이 유지되어 앞뒤의 오류만 없으면 통한다. 그러다가 오류가 발견되면 무지막지하게 종교로 밀어붙인다.
믿음이 부족한 자여, 어찌 의심을 품느냐,
이런 질타에 견디는 자가 없다. 사람들은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절히 원하며 나를 따랐다.
숭배 받는 기쁨,
왕은 힘으로 사람을 굴복시키지만 마음마저 뺏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위대한 힘은 사람의 영혼까지 모두 사로잡아 내 휘하에 놓는다. 자신을 바치지 못해 애걸하게 만든다.
진정한 정복자가 아닌가,
영토보다 중한 것은 곧 사람이라, 나는 사람을 정복해 나간다. 드디어 사람들은 내 손가락만 보기 시작했다.
저 것이 달이다,
하고 손을 들어올려 달을 가리키면 사람들은 내 손가락을 향해 진정한 달입니다, 하고 고개 숙였다. 이제 나는 신을 하늘에서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 내가 곧 신이기 때문이다.
내 언어는 곧 신의 언어가 되어 쏟아진다.
불쌍한 자들이여, 나를 믿으라, 오직 나만이 너희를 구할 수 있나니, 나는 자비 그 자체라, 너희들 한 명이라도 버리지 않으리라,
와 하는 함성이 울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서 두 손을 번쩍 쳐들어 내 위대함을 찬양한다.
오직 자비를 구해 엎드렸나이다. 영원한 생명이시여,
정말 나는 신인가 보다. 지금까지는 신의 흉내를 냈지만, 진짜 신이 아니라면 어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나를 찬양할까, 진정 나는 신이다. 알고 보니 신이다.
때로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의 판단은 선명했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딱 구분 짓고, 저들은 악이요, 우리는 선이라, 선은 그 힘이 강대하여 대적할 자가 없고, 항상 최후의 승리를 거두니, 두려울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서 반대의 목소리를 죽인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는 대적할 사람이 없게끔 모든 교단은 조직되고 통치되어, 일사불란하다. 신은 드디어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손을 흔들고, 미소만 지으면 다 알아서 그들이 해석한다.
당연히 그래야지, 정말 나는 신인데 말이다.
나의 죽음?
걱정하지 말라. 내가 죽는다 해도 죽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영생을 향한 문을 넘어설 뿐이라, 사람들은 나의 재림을 오래오래 기다릴 것이다.
시바의 신전에 올라 다시 세상에 내려가겠노라고 말했다.
“왜?”
시바신이 물었다.
“나는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뭔데?”
“불멸불생이라, 생성과 소멸에서 벗어난 자다.”
“숭배와 추앙을 받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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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나는 세상이 끝나는 날을 보았다.
지축의 뒤틀려 동서남북이 제멋대로 돌아가고, 바다가 솟아오르며 화산이 폭발하였으며, 대지가 가라앉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갈라진 땅 틈에서 불길이 치솟아 세상은 불벼락이 아니면 바닷물이 넘친 물벼락이라,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을 잃었다.
별이 십자(十字)모양으로 정렬하여 저 하늘에 걸렸을 때, 태양이 두 쪽으로 갈라지며 한 번 큰 빛을 내다가 이내 사라져 어둠이 몰려온다. 한기가 쏟아진다.
여기에는 우트나피시팀의 방주도 없다. 피에 굶주린 칼리여신의 열두 개의 팔이 창칼과 도끼를 휘둘러 떨어지느니 사람의 목이요, 튀느니 사람의 피라, 죽음의 제전이 벌어진다.
호호호호......
실로 내가 주관하는 세상이로다. 위대한 칼리여신의 세상이로다.
내 눈에는 불쌍한 자가 없어, 가여운 자가 없어,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의 숨통을 끊어야 하거늘, 헛되이 자비를 구하지 말라.
세상이 소멸한다. 우주가 소멸한다. 또 다른 우주를 브라만은 준비한다.
인간의 통곡과 상관없이 신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뿐이다.
마치 사형장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사형수를 고려하지 않고 째깍째깍 규칙적으로 움직이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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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드디어 49일째, 통곡과 회한으로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용서를 구한 49일,
나는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어둠 속에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낸 다음에 팔다리를 움직여 빛을 찾아 향했다.
아, 광명이다. 태양의 빛이다. 머리를 내밀어 빛을 만끽한다.
기지개를 펴는 순간 머리위로 벼락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얼른 몸을 옆으로 빼자 또 다른 벼락이 떨어진다.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몸을 피하다가 얼른 내가 태어난 어둠을 향해 줄달음쳤다.
영문을 모르겠다. 어찌 멀쩡한 태양 아래에 벼락이 떨어진단 말인가,
공포에 질려 손발을 덜덜 떨었다. 별안간 공기가 탁해지면서 짙은 향기가 풍겨오더니 정신이 어질어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깊은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혼절할 것만 같은 시간이 지나자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떨어지듯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엄마, 바퀴벌레가 또 나왔는데 못 잡았어. 그래서 바퀴벌레 약을 뿌렸거든, 그런데 요즈음에는 약에도 잘 안 죽나 봐. 자꾸 눈에 띄네.”
아하, 나는 바퀴벌레로 환생했구나.
그 이유가 뭘까,
글 / 은하철도 (2006년 부처님 오신 날에), 사진 / 이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