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남대궐이란... 必子는 남대리 [南大里] , 마구령

박승열 |2007.09.05 15:21
조회 116 |추천 0

남대궐이란...

 

必子는 남대리 [南大里] , 마구령을 ,10여년을 넘 나들다가 정착한지 3년이 되었다 , 먼저 본론으로 들어가기전에 남대리 주변과 마을 전체를  세분된 지명, 유래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곳은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중추이며, 마을 앞 뒤산은 태백[太白]산맥으로 이어져, 남 서쪽으론 멀리 태백의 종말봉을 만들어간다, 자개봉이 小白산맥 분수령으로  형제봉을 주봉으로 한 마대산를 만들어, 영춘을 향하는 배틀령에 걸린 낙양은 운무에  색 풀고, 님은 소쩍새 소리 기다리며, 둥지 틀고싶어 마음 다스리네.

 정감록에 살기좋은 명승지가 이곳이라 하지 않던가, (늣은목, 장구목, 노루목, 풋밭목, 떡갈목, 새목, 마당목, 칠목, 명지목, 사제목) 太嶺 安에 삼도사람이 어우러 행복하게 살만한 비교적 넓은 옥토이다, 분지로 형성된 지형으로 영남의 유일한 남한강 水堺의 發源. 남대천의 발원지인 상류부터 시작 하기로 한다.

 

 먼저 선달산(1,236),선달산[先達山]은 동남쪽으론 낙동강 수계, 북서쪽으론 한강의 水堺가 펼쳐진, 韓- 民族의 지존, 백두산의 힘찬 정기가 살아있는 골격, 백두대간 허리 부분으로 태백산맥 이며, 남쪽으로는 신라의 고찰 부석사가 자리하고 있는 봉황산을 자식처럼 품에 안은 채, 태백산 종말봉을 끝으로 하고 ,자개봉은 소백를 향해 ,웅장한 등고선이 국망봉을 연봉으로 이어간다 , 선달산 서쪽으로는 팔를 벌린듯 삼도봉인 어래산이 있다.

 선달산을 내려오다 보면 늦은목이 ,이 고개는 물야면 오전리 생달과 연결되는 고갯길, 옛 시절에는 동해에서 소금과 건어물를 등짐으로 나르던 길이였으나, 현재는 다니는 이가 없어 숲속에서 길의 형체만 희미하게 군데군데 확인된다, 어설픈 숲을 헤치고  내려오면,산자락 비탈진 숲 속엔 40여년 전만해도 30여 호구의 민가와 교회까지 있던 곳은  세월따라 자취를 감추고 ,아랫마을 상신기, 샛터, 턱골(기곡)마을과 마주하는  原 南大(南大闕) , 주막거리인, 이곳은 마구령(메기제), 영남으로 통하는  고갯길, 소형차가 어렵사리 통행이 가능한 길 초입이며 옛 길손인  선비와 장꾼들의 여정으로 문화와 애환이 서렸던 곳으로 한때는 술 도가가 둘씩이나 있었다고 한다, 번성 하였던 옛 시절, 필마와 인걸은 간데없고 지금은 고즈넉한 적막감 마저 든다 .

 

마구령[馬口嶺]에 대하여 약간 언급 한다면, 마구령(메기제) 정상은 태백산맥 주령으로 서쪽으론 태백산 종말봉을 끝으로 하고, 이어 소백의 자미봉으로 연결 되어 국망봉으로 이어 간다, 이곳 마구령에는  구 길 동쪽 단풍나무 숲속에는 (현 서남쪽) "국지선왕 신위" (숭배인물이 아닌 저주 하는당) 을 모신 신당이 있어, 지나는 행인들은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저주하는 당, 아주 특이한 당이 있었다고 한다.(임달문 옹) 음력 사월 초 팔일를 택하여 마을 주민들이 제사를 올렸으나 ,1960년대 양백구간 남대궐 전체가 울창했던 임목들를  벌목하여 운송로를 만들기 위해, 도로확장 공사로 유실되어 근래에는 제사마저도 올리지 않아 지망조차 구분할수 없어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아래로 내려와. 어래산(1,064).어래산[御來山]은 남북으로 두개의 봉우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정상은 둔봉이다 .정상에서 신선만이 즐길수 있는 운해는 극치로 장관를 이룬다, 이 산은 태백산 자락으로 경상, 강원, 충청 삼도 경계가 있는 북쪽 봉우리가  삼도봉이며 ,남쪽으로는 기암,낙맥으로 형성되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품에 안겨있는 솔안(송내松內)마을엔, 부석 초등학교 남대분교가 있는데, 한때(1960년대)  전성기때엔 전교생이 180명이나 되었던 남대분교가 현재는 교사 2명과 기능직 아저씨 한분 학생 4명이 존재의 의미마저 상실한채 명맥만 유지하며 국고를 축내고 있는 남대분교와  남대교회, 노인정, 등 자연 부락이 형성 되어 있다.

솔안골 안으로  들어가면 강원도 영월땅, 내리, 고 부석,회암  으로 통하는 회암령이 있으나 곡물짐을 지고 다니는 지게꾼과 행인이 없어 자취 마져 희미해 지는구나.

 

중마[衆村] ,옛날 어느 선사가 중이 살 곳이라 하여, 중 마을 이라고 불리워 졌다.  근래까지 여러 가구가 마을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가는 폐가 몇집이 흉물스럽게 있을뿐 , 현정사가 아름다운 어래산, 몇몇 봉우리를 뒷 배경으로 하고 , 시원스레  뻗은 태백산맥  주 능선을 안-(앞 배경) 으로 삼아, 선원의 도량으로 자리 매김 하고있다. 현정사 경내 우측에는 탕관바위가 있고 법당 뒤쪽에는 빨지밭굴이 있다. 빨지밭굴은 한국전쟁 당시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될만큼 자연동굴 로서 굴의 길이가 무려 25m 되는 넓은 굴이다, 이러한 배경을 싸고 현정사 앞을 소리내어 굽이쳐 흘러가는 남대천은, 물이맑고 주변 풍광이 수려하여 무릉도원 이다.

 

짐대마을 (마을촌) 짐대란, 일제 강점기 시절에 독립군 의병부대가 진을 치고 은밀한 작전과 치열한 격 전투 활동을 활발히 하던곳, 아쉽게도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장군이 여기 유진했고 ,의병 중군장에서 대장으로 오른 김상태[金尙台] 의장이  여기서 적에게 잡혔다.(도 경계비문)

 도 경계 공원 안에 이의근 현 도지사가 세운, 도 경계비와 도로를 가운데로 하고 마주한 커다란 바위가,  난 아무것도 모르오  하며 無言으로 존재의 의미도 모른채 현존 하고 있다. 

이 바위를 당간 지주로 이용하여 독립군 의병 깃발을 꽂아쓰던 바위라고하여 짐대 바위다 ,이러한 유래로 인하여  이 마을를 짐대마을 이라고 불리며 , 경상도의 마지막 끝 마을 이기도 하고 ,초입 이기도 한, 문전에서  지나는 손님 맞이에 늘 애쓰시는 , 老巨樹, 독립송이 일품이다, 노거수를 중심으로 하여 동민들은 정월보름 단종대왕 신위를 모시고 (태백산신)제를 올리고 음복을 나누며 화합 잔치를 한다. 옛날에는 마을 단위별로 모두 일곱군데의 당이 있었으나 요즘에는 이곳에서만 제를 올리고 있다.

충북의 첫 마을인 용담마을과 행정구역은 다르지만 서로 아래 윗마을 이웃 사촌 처럼 정 나누며 지내고 있다.

 

짐대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마을 뒤편엔 시대의 아픈 유물 석성이 있다. 해방 직후 사상과 이념을 달리했던  빨치산들이 경찰과 접전을 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을 강제 동원하여 축성한 석성(70m x 1m x 1.5m)이 일부는 유실 되었으나 남아 있는것은 원형이 보전되어 당시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접경마을, 충북과 도 경계지점에 있다하여 불리는 명칭이며. 현재에는 민가가 없고. 접해있는 실개천를 따라 도 경계가 이루어지는 좁은 물방앗골 골짜기를 충청도, 경상도로, 번갈아 넘나들며 깔딱고개를 숨가뿌게 올라 곱돌재, 어래산 중 허리를  감아돌아 넘어가면 강원도 영월땅 젓동개, 맹생이, 미사리 마을백성인 옛날 선조님들이 이틀 여정으로 부석장길로 활용하던 고갯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이상과 같이 나뉘어져 불리우는 명칭이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각기  따로 불리우나. 현재에는 행정구역상 이상의 명칭을 열거한 전체 30리구간를 남대리라 칭하고 있다.

 

동네 어르신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대화를 나누던중 .옛 지명이. 남대궐[南大闕] .남쪽에 있는 대궐. 대궐터가 있다고 하시면서 이야기가 시작 된다,

전설같은 이야기, 말씀인즉 한 시대가 지나가면 사라질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되어 있지않은. 참 .역사적인 내용들을 사실처럼 말씀 하시길래. 흘러 듣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기록 해 보기로했다.

 

 남대궐[南大闕] 이란. 551년전 .1456년.사육신과 생육신들의 주도로 단종복위 운동이 거세지자 위기 의식을 느낀 숙부인 세조는 노산군으로 폄하한. 단종대왕을 일천리 유배를 명령 하였다. 그로 인하여 한양에서 영월로 1천리 유배를 명 받아. 유배길을 나서보니 한양에서 영월 까지는 .일천리가 되지 않자.신하들이 일천리를 채우기 위해 .이곳 주막거리 원남대까지 .역적이 되어 오랜 귀양길에 지친 어린 단종이 초라한 모습으로 노숙을 하시길래. 現地主民(백성)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주위에 돌담을 쌓고. 내 기둥을 세워 .초막을 지어 밤이슬을 피하게 했던곳. 그 터가 대궐터로 아직 남아 있다고 하여 현지를 답사하여 보니 현재 주막거리 .구 도로에서 약 10 m 떨어진곳 밭 한가운데를 가르킨다. 옛날 그때의 지상물은 나무로된 초막이였으며. 서슬퍼런 엄습한 시대라. 목숨이 두려워 관리 하는이가 없어. 오랜 세월이 흘러 지상물은 온데간데 흔적이 없고. 돌담으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이는 돌 무더기만 남아 있으며 .이곳으로 부터 전방 약50m 정도 떨어진. 현재 남대천 다리를 건너 .지금은 분묘가 한기 있는데 .그곳에는 수행하던 호위병사가 숙영 했던 곳이라고 전하였다. 

 

현존하는 기록이 없어 증명할순 없지만, 한 시절의 한[恨] 많은 슬픈 역사가 만든 주위의 여러 지명들과 잔존의 모습을 견주어 보아, 너무나 염원하고 초라하여 보고 듣는 이의 슬픔만 자아내게 한다.

덧 붙인다면 현지 화전민 이였던 원 주민(백성)들은 함뼘의 농지가 아쉬웠음 에도 불구하고, 평지인 이곳을 임금님이신 단종대왕이 머물던 곳이라 여겨, 대궐터[大闕攄]로 부르며 백성들은 충정어린 성지로 여겨, 수백년이 지난 현재까지 회손 하지않고 주변 부분만 농지로 경작하고 있다 .

 

이상과 같은 내용을 뒷 받침이 라도 할만큼 ,이 지역 주변 지명들을 살펴 풀이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 어래산,어래[御來]라는 명칭이 예사롭지 않다, 한자어로 풀이 한다면 임금님이 오셨다는 내용으로 풀이할수 있다 .

 어느시대 어느 임금님이 오셨단 말인가? 

 의심의 여지는 없지 않은가? 

 한 시대의 검은 슬픈 역사가 흘린 사연,기록은 없지만 아름다운 백성들의 갸륵한 민심은 세월따라 전설처럼 희미하게 흐려 지는것이 아쉬울 뿐이다.

 

선달산, 선달[先達]이란 명칭 또한 과거 시험에 급제는 하였으나. 내릴만한 보직이 없어 발령 대기중인 선비를 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이 모두를 견주어 보아 필시 기록 되지 않은, 비록 구전 일지라도 의구심이 되지않는 내용들이 충분히 뒷 받침이 되는 믿음직한 근거라 여겨지며 ,남대궐이란, 南쪽에 있는 大闕 , 南大闕 , 大闕攄 ,백성들이 아무렇게나 함부로 지명을 지어서 부르지는 않았을터, 이를  한번쯤 되새겨 암울했던 과거사를, 現 時代가 아니더라도 , 後 世代에 누군가가 연구하여 볼만한 내용들이라 생각이 들어,必子는 기록으로 남겨, 연구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신라의 소지왕11년에 고구려가 외부에 노출 되지않는  협곡 전술를 이용하여, 조령과 죽령은 전방으로 하고 마구령과 고치령으로 우회 침공을 하여, 고구려의 전술이 성공한 곳이 바로 이 지역(남대리)이였다, (신라본기의 기록)그후 61년동안 신라의 북부지역인 풍기는(급별산군), 영주(내이현), 봉화(고사마현), 예안(매곡현), 청송(청이현) 안동 일부지역 까지 고구려가 통치하다가, 진흥왕6년 신라의 반격으로 물러갈때, 고구려군을 지원 하기위해 달려온 온달장군이 이곳 아단성(阿旦城)남대리에서 전사 한다(온달전),  전쟁과 함께 고구려의 漢文子와 佛交文化가 신라로 전파된, 行路 역활를 한 불교의  路上 性地다. 

 

지혜로운  이곳 후세들은 급변하는 바깥세상,  I T, 디지털 시대, 첨단을 멀리하고 심산 유곡에서 청공낙수 마시고 신선초로 기근 하며, 신선되어 살고 있지 않은가. 

 일생동안 전국 방방 곡곡를 누비던, 조선시대 해학과 풍자詩仙. 난고, (김삿갓), 김병연은 유년 시절은 물론, 죽어서도 이 계곡에서 고이 잠들고, 無時로 구름처럼 찾아오는 참배객과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가련(김삿갓 時 중 등장인물)하게도  잡으며, 즐비하게 늘어진 주막에서 참배객 들에게 곡차 한잔하고 쉬어 가라  권 하지 않는가.

 이러한 유구한 역사 유적으로서 예사롭지 않은 남대리다.

 소중한 攄展임을 節感하여 잘 保全하고 가꾸어 가야 할것이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