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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초 중등 교과서에 명성황후의 어진(御眞·실제 얼굴)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황후의 어의(御醫·의사)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토미 톰킨스’(1905· 292쪽)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었던 헐버트 박사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1906·138쪽)에 수록된 것이다. 이 사진은 일본의 소설가인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민비 암살’이라는 책의 표지 그림으로 쓴 이후 사실상 명성황후의 사진인 것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결코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언더우드 여사나 헐버트 박사가 한결 같이 이를 왕비의 사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더우드 여사는 이 사진을 가리켜 ‘정장한 귀부인’이라 했고, 헐버트 박사는 ‘정장한 궁녀’라고 설명했다. 고종을 가까이 모신 고문과 황후의 어의(御醫)가 아니라는데 이보다 더 명백한 증언은 없다. 이 사진은 이탈리아의 외교관인 로제띠가 촬영한 것으로서 그의 한국 여행기인 ‘꼬레아 꼬레아니’(1904)에 실려 있다. 사진 설명에는 ‘정장한 궁중 여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꼬레아 꼬레아니’의 다른 쪽에는 ...사진관의 세트로 기생의 옷이 걸려 있다. 만약 이 사진의 배경이 진짜 왕비의 어좌(御座·의자)였다면 거기에 기생의 옷을 올려놓고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사실 이외에 이 사진은 심정적으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국의 국모가 버선발로 다리를 쩍 벌린 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개화기의 어느 궁녀가 서양 사진관에 출타하여 찍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노력한 역사학자는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일 것이다. 그가 이 사진(맨 아래 사진)을 보고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명성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확인했더니 한결 같이 부인했다고 한다.(‘호암전집’ 3권 95쪽) 문일평의 지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사진은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국의 왕비가 적삼 바람에 사진을 찍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증이 나오자 이 사진이 황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사진이 여염 처녀 시절의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쪽을 찐 것이 분명하니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서 사진 (4)가 명성황후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이 사진이 충주(장호원이 아님) 피난 시절의 것이라고 주장하나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왜냐 하면 명성황후가 충주에서 지낸 51일 동안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때여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경황에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을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에 명성황후가 충주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고종과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 친정 조카인 민영기(閔泳驥) 그리고 궁녀 몇 사람뿐이었다. 이 사진의 진위가 물의를 일으키자 이승만은 해방되어 귀국한 후 이 책을 복간(1954)할 때 전혀 모습이 다른 사진으로 바꿔 낀 것으로만 봐도 진짜 모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라게리의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펜화임을 곧 알 수 있다. 라게리가 이 책을 출판한 당시에는 이미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여서 사진을 얻을 수 없던 터라 ...그려 넣은 것이니 이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다. 왜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명성황후의 노출기피증 때문이었다. 둘째, 그 당시 서양 문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마저 빠져나간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 아내를 잃은 고종이 생전에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토록 찾았어도 나오지 않았던 초상화가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없는 사진을 가지고 이것이 맞네 저것이 맞네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동아일보 2001. 07.06일 기사에서 발췌-
명성황후 숭모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정입니다.,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에 걸려 있는 명성황후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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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서 1903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테의 '꼬레아 꼬레아니'에 실려 있다.오랫동안 명성황후 얼굴로 공인되어 왔던 사진이나 얼마 전 부터 명성황후 사진이다, 아니다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사진이다.그 중 서울 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와 조선일보 이규태씨와의 논란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 주간지 ‘일루스타라시옹’(L’ILLUSTRATION) 1895년 11월2일자 빌타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 기자의 기사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이다.
‘한국의 비극’이란 제목의 기사와 함께 게재된 이 초상에는 ‘한국의 왕비’란 설명이 붙어있으며, 고종과 대원군의 삽화가 함께 실렸있다.
김준희 전 건국대 교수(정치학)는 “고종과 대원군의 초상이 실제 인물과 일치하는 만큼, 이 잡지에 실린 삽화가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이 틀림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태진 교수는 “빌타르 드 라게리의 삽화 속 인물은 명성황후로 알려진 로제티 책의 사진과 동일하다”며 “이 초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공개된 삽화란 점에서 기록적 가치가 매우 높은 중요한 자료”라고 말했다.
1895년 3월 프랑스 일간지 ‘르 탕’(Le Temps)의 청일전쟁 종군특파원으로 파견된 빌타르 드 라게리는 1년간 국내에 체류하면서 한국관련 기사를 송고했다.
-2001.11.16. 조선일보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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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명성황후 사진 논쟁은 끝났다고 보도하면서 비교, 제시하였던 사진이다. 오른쪽 사진이 새로 공개된 사진이다.1895년 호주에서 발간된 영국외교관 가드너의 저서 '조선'에 실린 '궁정복을 입은조선 궁녀'라는 제목의 삽화이다. 삽화는 종래 명성황후 사진이라고 알려져 왔던 사진과 머리,복장, 앉은 자세 등이 흡사 하다는 것이며 .저자는 황후시해 1년전인 1894년 주한 영국 총영사 대리를 지낸 외교 관으로 그의 저서에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례가 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을 정도로 국내 사정에 밝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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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1일자 경향신문 ‘다시 쓰는 한반도 100년’ 시리즈의 어린 기생 초상사진에서 발견됐다. 본지가 국사편찬위원회를 통해 일본 가쿠슈인(學習院)대에서 입수한 이 사진은 명성황후로 알려졌던 사진과 똑같은 장소에서 촬영됐다. 두 사진은 배경으로 쓰인 책걸이 그림병풍과 굵은 매듭이 달린 서양식 커튼, 바닥에 깔린 화문석 등이 일치한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외교학)는 “황후와 기생이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일이 가능하겠느냐”며 “이번 기생 사진을 통해 기존 명성황후 사진은 외출나온 궁녀가 한 서양식 사진관에서 찍은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태진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그동안 명성황후 사진의 촬영장소가 고종의 서재였던 집옥재(集玉齋)인 줄 알았으나 병풍그림으로 미뤄볼 때 경복궁내 유일한 양식건물이었던 관문각(觀文閣)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교수가 관문각을 지목한 이유는 기생사진의 거울에 비친 새그림 때문이다. 새그림은 ‘궁중악사들’이라는 또다른 사진의 배경에도 등장한다. 이에 따라 명성황후와 기생(궁중무희), 궁중악사들이 동일한 곳에서 사진을 찍었으며 이 장소는 당시 외빈 접견이나 연희 장소로 쓰인 관문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인진 한국사진사연구소장은 “사진촬영 장소가 궁궐 내부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사진기술로 미뤄볼 때 천장을 뚫어 자연조명 시설을 갖춘 사진관이 아니면 실내에서의 사진촬영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또 미천한 신분이었던 악사나 무희가 사진사를 궁궐로 불러들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경향신문 2001. 12.06일 기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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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수록되었던 사진이다.평복 차림인 것으로 보아 임오군란 때 장호원으로 피신간 상태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보인다.그러나 역사가 문일평씨가 이사진을 들고 명성황후를 잘 아는 사람에게 보이니 전혀 아니라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있어 속단할 수는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 생김새나 눈매에서 영민함이 서려 있어 많은 학자들이 이 사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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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심취하여 [춘추][춘추 좌씨전]을 즐겨 읽었다는 명성황후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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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읍 능현리 250-2 지방유형문화재 제46호(1973년 7월 10일 지정) 로 지정 되어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이다. 이 생가 는 1687년(숙종 13년)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 으로 건립되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었던 당시 건물은 안채 뿐이었다.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초당 등이 복원되었고 현재는 여주 군청에 의하여 명성황후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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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난입하였던 일단의 일인 시종잡배 낭인들은 명성황후의 처소인 건천궁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명성 황후로 생각되는 여성 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눈가 주위에 희미한 수두자국이 있다는 것으로 명성 황후의 신분으로 확인 된 시체는 일본 낭인들 에 의하여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 행위를 당한 뒤 아소정 주변에 던져저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졌다. 얼마전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아예 명성황후시해장소였던 건천궁을 없애고 화단 을 꾸미려 하였다가 3.1운동으로 항일 운동이 거세지자 실행 에 옮기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옥호루는 궁중 나인들이 주로 사용 하던 곳이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인 옥호루 아소정
명성황후의 시해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조정은 청나라에 출병을 요청했으나, 천진조약의 규정에 따라 일본군대도 조선에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1894년 6월 21일 일본군은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을 동원 경복궁을 포위하고 장안의 4대문을 접수했다. 대궐로 돌아온 일본공사 오오또리(大鳥圭介)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협해서 대원군을 불러들이게 했다. 25일 일본이 말하는 소위 『조선왕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면서 강요에 의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군국기무처는 28일 『의정부가 백관을 거느리고 서정을 다스리며 국가를 경영한다』는 관제의 개혁을 결의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이 개혁의 결의에 참여했던 김홍집(金弘集)은 『오백년 조종(祖宗)의 구제도를 신(臣)의 손으로 변혁했으니 뒷일이 매우 두렵습니다』라고 고종에게 아뢰었었고, 영돈녕부사 김병시는 『군주가 욕된 일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써 보은해야 한다는 대의를 저버리고 있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다』면서 눈물을 흘리자 『임금의 얼굴에 슬픈 빛이 떠오르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머금었다』고 갑오실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이또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주재하는 일본 각의(閣議)는 외무대신 무쓰가 상정한 4개 항목의 대조선 정략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국가의 운명은 이미 일본의 손에 있엇던 것이다. 그 내용은 조선을 1. 독립국으로 공인하자는 안(案), 2. 일본의 보호국으로 하자는 안, 3. 일 청 공동보호국으로 하자는 안, 4. 벨기에, 스위스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안이었다. 일본은 결국 두 번째 안을 채택하였다. - 7월 20일 잠정이라는 미명아래 조선에서의 중요한 권익을 점유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을 채결했다. - 7월 26일 청일전쟁에 조선은 일본군대의 진퇴와 식량 등의 편의를 재공해야 한다는 공수동맹(攻守同盟)을 강요, 조선이 청나라에 적대적인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이에 형조참의 이남규(李南珪)는 청절왜소(淸絶倭疏)를 올려 일본의 교활한 사술을 지적하면서 조약을 폐기하고, 열국과 힘을 합쳐 일본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여 이 시기의 민심을 대변하기도 했다. - 9월 28일 신임 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가 부임했다. 그는 갑오개혁이후 왕권이 무시 당해온 점을 인정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접근했고, 청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대원군을 문책, 10월 21일 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케 했다. 이후 『왕실이나 세자에 대한 걱정만 없다면 여자의 몸으로 왜 정치에 가담하며 척족을 기용하려 하겠는가』라고 말하는 명성황후와 조선을 마음대로 전단하려는 이노우에는 자주 마찰을 일으키며 1895년을 맞게 된다. 갑오정변의 실패로 조선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일제는 세력만회를 위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이미 기울어져가는 조선에 대하여 막강한 열강을 상대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살아 남고자 하였다. 1894년 조선지배에 관한 청.일의 간축전은 드디어 청.일 전쟁을 이야기시켰으며, 그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일제는 전리품으로 1895년 3월 23일 청 나라와의 강화조약에 의해 시모노세키 조약(하관조약; 下關條約)을 체결하여 랴오둥(요동) 반도를 얻게 되었다. 그러자 극동에서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염려하여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1895년 5월 초순의 일로서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하여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는 고종과 자신을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로 만들려는 일본의 계획에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청일 전쟁 후 막강 해진 일본의 세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왕실과 세자가 없다면 부녀자의 몸으로 정치에 관여하며 척신을 기용할 이유가 있겠는가? 귀하의 진언을 믿고 금후로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약속한 뒤였다. 이런 명성황후에게 삼국간섭의 소식은 가뭄 끝의 단비처럼 달고 시원했다. 그는 청나라가 조선에서 손 뗀 지금, 자신이 의지할 곳은 간섭을 주도한 러시아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정치활동을 재개하여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했다. 박정양, 이범진, 이완용을 중심으로 하는 친러내각을 출범시키고, 은신중이던 민영환을 비롯해 민씨 척족 16인을 불러들였다. 1895년 7월의 일이다. 곧이어 명성황후는 1894년 6월 이후 일본이 적극 지원해 온 조선의 내정개혁(갑오개혁)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고종은 『작년 6월(갑오경장)이래 칙령이나 재가사항은 어느 것이고 짐의 의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를 취소한다』고 선언하였다. 이어 5월 20일 앞으로는 임금 자신이 매일같이 정부의 대산들과 접촉하여 대소의 정사를 심의 결정하고 친재한 다음에야 실행토록 할 것이라는 조칙을 발표했다. 이 조처는 왕권회복과 일본지배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칙령 제1호를 공표하여 관복을 옛날식으로 환원시켰으며, 친일인사를 모두 내쫓고 친미,친러파로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일본군 휘하에 들어 있는 훈련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이같은 일련의 조치는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일제는 30년간 정한론을 펴왔고, 요동반도의 할양권의 포기로 인해 정부에 대한 성토가 비등하였고, 조선에서 러시아에게 주도권을 빼 앗길 것을 우려하였다. 청나라는 싸워 이겼지만 러시아와 일전을 치르기엔 아직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일본은 '친러'의 중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제거 하기로 했다. 이러한 일제의 천인공노할 만행의 계획하에 7월 13일 이노우에 후임으로 미우라(三浦梧樓)를 부임시켰다. 미우라는 이노우에와 같은 고향사람으로서 예비역 육군 중장출신이며 군공을 인정받아 자작(子爵)이 된 일본궁정의 고문으로 있었다. 미우라는 『한 몸을 희생할 결심으로 부임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한다. 신임장 봉정을 위해 고종은 배알할 때는 단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이 땅의 풍월이나 즐기면서 명성황후께 관음경의 일부를 청사(淸寫)하여 드릴까 한다』는 말뿐이었다. 교묘하게 고종과 명성황후를 안심시킨 미우라는 8월 2일경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구체화했다. - 첫째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아래 대원군을 입궐시키고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 둘째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이 일으킨 쿠데타를 가장한다. - 셋째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본 낭인부대를 앞세우고, 이들을 위한 엄호와 전투의 주력은 일본군수비대가 담당한다. - 넷째 대원군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경관을 동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거사에 참가할 병력은 일본낭인 30여명, 경찰 10여명, 조선군훈련대, 일본군수비대로 구성했다. 당초 거사일은 1895년 음력 8월 22일(양력 10월 10일) 새벽 4시 30분이었으나, 조정에서 8월 19일 일본군이 교육해 온 조선인 훈련대의 해산을 결정하고, 20일 무장해제를 단행하겠다고 미우라에게 통보해오자, 시해계획은 8월 20일로 앞당겨지게 되었다. 1895년(乙未 고종 32)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운명의 날은 시작되었다.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각본에 따라 대원군을 궁궐로 데려오기 위해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무장한 일본인 30여명이 대원군이 사는 공덕리에 도착한 것은 19일 자정께, 대원군이 집을 나선 것은 이로부터 세 시간이 넘은 20일 새벽 3시 30분경이다. 새벽 5시 30분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광화문을 들어오는 흉도들과 첫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10분만에 홍계훈이 전사하고, 안경수와 시위대 병력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했다. 두 번째 접전은 미국인 교관 다이(Dye) 장군이 지휘하는 시위대와 일본수비대 사이에 있었으나 시위대는 총 한번 변변히 못 쏘고 패주했다. 흉도들은 두 패로 나뉘어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왔다. 동쪽 곤녕전에는 고종과 왕세자가 있었고, 서쪽 옥호루(玉壺樓)에는 명성황후가 있었다. 옥호루에 난입한 흉도들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살해하고, 비명을 지르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칼을 들이대고 명성황후의 소재를 물었으나 찾을 수 없자 용모와 복장이 우아하여 황후라고 생각되는 여인을 3명이나 살해했다. 이 참혹한 장면을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때 이미 명성황후는 누군가의 칼에 시해되고만 뒤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장면을 왕세자의 목격담이 담긴 미국 공사관의 보고와 사바틴의 증언을 토대로 한 영국 영사의 보고를 근거로 하여 구성했다. 『흉도들이 명성황후의 침실로 향하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서둘러 황후에게 변란을 알렸다. 황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는 순간 흉도들이 달려들었고, 이경직이 황후를 보호하고자 두 팔을 벌려 가로막다가 양 팔목을 잘려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 틈에 황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가다 흉도들에게 붙잡혔으며, 흉도들은 수 차례 황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칼로 거듭 황후를 찔렀다. 실수 없이 해치우기 위해 황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되었다. 그때 여시의가 앞으로 나서 손수건으로 황후의 얼굴을 가렸다』 곤녕전에 있었던 고종도 흉도들이 난폭하게 잡아끌어 옷이 찢겼고 왕세자는 부상을 입었다. 민태호의 딸이며 민영익의 동생이었던 왕세자비도 이 현장에 있었는데, 명성황후를 보호하다가 넘어져 반나절이나 기절해 있었으며, 이때 다친 허리가 평생 고질이 되었다 한다. 술에 취한 몇몇 흉도들이 죽은 궁녀들을 시간(屍姦)했다는 보고도 있다. 명성황후의 시신이 능욕(凌辱)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일본측의 조사기록을 보면『죽은 명성황후의 얼굴이 너무 젊어(20대 중반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젖가슴을 살펴보고 확인했다』고 되어 있다. 명성황후는 죽어가면서 왕세자의 이름을 세 번씩이나 불렀는데, 왕세자도 이를 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흉도들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운반한 뒤 장작더미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계속 석유를 뿌려가며 뼈만 남을 때까지 반복했다. 1895년 8월 20일 오전 8시경이었다. 어찌 세계역사에 다른 국가의 왕비를 이토록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겠는가? 오직 야만스러운 일본뿐일 것이다. 조선을 착취에 이용했으면서도 조선에 도로와 철도 건설 한 것을 자랑하고 있으며(소설 아리랑 기행문 참고), 조금도 진실된 반성을 하지 않는 나라는 일본뿐이 없다. 대원군을 끌어내는데 너무 시간을 지체하고 또 일본인 수비대와 합류하기 위해 1시간 반 이상을 더 기다린 탓에 어둠 속에서 완전범죄로 해치우려던 왕비 시해 계획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이루어졌고 목격자들이 많이 생겼다. 때문에 미우라는 '대원군과 훈련대 주모'라는 처음의 주장을 '일본인이 가담했다 해도 이는 자신과 일본 정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로 바꾸고, 그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외교채널과 언론을 총동원했다. 강경한 태도로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미국, 러시아, 영국 등 각국 공사들도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우려하는 본국정부의 방침에 따라 차츰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중대사고 연구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 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히라야마 이와히코(평산암언) 등 13명이 민비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 공소장에 실려있어 일본 수사당국이 황후시해의 진상을 알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특히 살해범들은 "궁녀들이 서로 자신이 민비라고 하는 바람에 이들의 옷을 벗기고 유방을 살펴 당시 민비 나이인 44세가량의 여자를 칼로 살해하고 이를 제지하던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총과 칼로 살해했다"고 진술하였다. (이상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시해도'에서 발췌) 후지카쓰는 1895년 미우라가 공사로 부임하면 서 데려온 개인비서로, 시해사건 후 다른 살해범들과 함께 히로시마재판 소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 으로 풀려났으며, 8.15이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소유의 길이 1m20㎝의 칼이 발견되었다. 그의 칼집에는 '단숨에 전광 과 같이 늙은 여우를 찔렀다'는 내용의 한자 문구와 후지카쓰의 호인 몽암 이 새겨져 있다. 당시 명성황후시해의 작전명은 '여우사냥'이었다. (이상 조선일보 1994년 8월 23일 사회면 기사에서 발췌) 우치다 영사의 보고서에는 "계속해서 궁녀를 붙잡아 왕비가 있는 곳과 용모의 특징을 묻던 중 '왕비의 관자놀이에는 아주 희미한 마마 자국이 있다'는 증언을 얻어 먼저 옥호루에서 살해 했던 용모 복장이 아름다왔던 3구의 시체를 조사한바 그 중 하나에 마마 자국이 있어 궁녀를 확인하여 민비임을 확인했다"라고 써 있다. 다음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고바야가와라는 자의 진술이다 "상체에는 짧은 하얀 속옷을 입었을 뿐이며 허리 아래는 하얀 속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무릎 아래로는 맨살이다....위를 행한 채 이미 숨이 끊어졌고 주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잘보니 자그마하고 마른편으로 피부색이 하얀, 아무리 보아도 25,6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였으며 죽었다기 보다는 인형이 쓰러진 듯한 모습으로 영원히 잠에 빠져 있었다...방안에는 유해를 지키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었다." 전 법제국 참사관이며 당시 조선 정부의 내무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조는 법제국장관 앞으로 보낸 보고서 속에서 "정말로 이것을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 명성황후의 유해에 대한 일본인 낭인들의 차마 글로 쓰기 어려운 행위가 있었음을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미우라 공사의 명을 받은 오기하라 경부는 문짝 위에 비단 이불로 덮은 민비의 유해를 건천궁 동쪽의 녹원이라고 불리는 정원으로 옮겨 높이 쌓아 올린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고 석유를 끼얹어 불을 질렀다. (이상 角田方子 지음 '민비암살'-조선일보사 刊- 중에서 발췌) 고종은 성명서에서 “조선군부의 고문으로 일했던 오카모토, 스즈키, 와타나베가 황후의 처소로 침입해 황후를 붙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종이 성명 내용을 구술하던 중 의식을 잃어 성명서는 더 이상 서술되지 못했다고 당시 통역관은 적었다. 또한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은 보고서에서 “새벽 4시반 경 궁내에 소란이 일어 고종께 보고하고 ‘왕후는 어디 계시느냐’고 묻자 고종은 ‘벌써 대책을 세웠다. 왕후는 안전한 곳에 있다’며 나를 안심시켰다”고 적어 고종이 사태의 징조를 미리 감지하고 명성황후를 대피시켰음을 짐작케 했다. 사바틴은 “새벽 5시경 궁정 서쪽에서 총소리가 들려 황후의 처소로 급히 가니 25명 가량의 일본 낭인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그 중 절반 가량이 황후의 방으로 들어갔다”면서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서술했다. 그는 “일본 낭인들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궁내 신하들이 막자 칼로 팔을 베어버렸다. 황후가 상궁 옷을 입고 상궁 무리 안에 섞여있어 누가 황후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자 일본 낭인들은 한 명씩 끌어내 250cm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뜨렸다. 두 명이 떨어진 뒤 황후가 복도를 따라 도망갔고 일본 낭인들이 쫓아가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가슴을 세번 짓밟고 칼로 가슴을 난자했다. 몇 분 후 시신을 소나무 숲으로 끌고 갔으며 얼마 후 그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상 동아일보 2001.09.26기사,러시아 보고서 발견 기사에서 발췌)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번째 경내의 이중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나는 큰길에서 일본 인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거적으로 덮인 뭉치 하나를 대로 된 사립짝에 실어 말로 끌고 갔다. 그 앞에는 꽂아칼을 한 네 명의 일본군이 걷고 있었고, 일본 보병분대가 호위했다. ‘이것이 왕비의 시체였을까? (이상, 신동아 2001년 10월 호 빌따알 드 라게리,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 번역본에서 발췌 )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왕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 밖의 뜰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궁녀들은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소리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혔을 때도 창 밖으로 던져졌을 때도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서운 고통을 참고 있었다.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내(러시아 인 사바틴)가 조선여성의 고매한 순절(殉節)정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다른 이유는 일본인 폭도들은 두 명의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와 내가 서있던 곳에서 겨우 5~6보 떨어진 곳에 던지고 갔으나, 궁녀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버려진 궁녀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혀 노대(露臺) 위에서 뜰로 내던져질 때도 앞서 말한 궁녀들과 똑같이 반항하거나 울부짖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궁녀는 넘어져 눈을 뜨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칼을 든 일본인 폭도 5명(3명은 사복을, 2명은 양복을 착용하고 있었다)이 붉게 달아오른 흥분한 얼굴로 눈에 살기를 띤 채 야수처럼 왕후 처소 이곳 저곳을 뒤지며 왕후를 찾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은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쪽으로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 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쳐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이경직은 이날 밤 사망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내의 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한 환관(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火葬)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의 무명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침전에 난입했을 때, 왕후도 처음에 궁녀들과 같이 왕후는 이곳에 계시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왕후는 갑자기 복도를 따라 결사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폭도들은 왕후로 짐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서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폭도들은 이곳에서 궁녀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던지며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폭도들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신을 운구하여 화장했다는 말은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현흥택 정령은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때렸으나, 끝내 모른다고 했다. 폭도들은 고종이 계시는 곤령합으로 나를 끌고가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했다. 모른다고 하자 폭도들은 각감청(閣監廳)으로 다시 나를 끌고가서 왕후가 계신 곳을 자백하라고 또 때렸다. 이때 갑자기 곤령합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를 잡고 있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후부터 일본인 폭도들은 더 이상 왕후의 피신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곤령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그리로 가보았다. 고종은 장안당(長安堂)으로 벌써 옮겨가셨고, 곤령합에는 왕후가 피살된 채로 누워 계셨다. 나는 주위에 일본인 폭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 나왔다. 그후 왕후의 시신을 동쪽 정원에서 화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화장장에 있는 시신의 의복이 여자옷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처럼 현흥택 정령은 왕후의 시신을 왕의 침전인 곤령합에서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왕후의 시해시점은 세레신-사바틴이 약 20~30분간 옥호루 현장에 머물러 있다가 떠난 시간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누가 왕후를 시해했는가는 고종의 증언서에서 밝혀지고 있다. 고종은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도한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고 말았다. -"러시아측 자료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신동아 2002년 1월호에서 발췌- 명성황후 능욕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가 김진명이 찾아낸 비밀문서를 오마이뉴스 정지환 기자가 검증, 연구한 끝에 기사화하여 알려진 것입니다. 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지, 민족21 등의 잡지와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기자이고. 특히 조선일보의 치부를 파헤치는 기자로도 유명한분입니다. 정지환 기자는 작가 김진명씨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답니다. 김진명씨는 자신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결정적 모티브였던 '435호 비밀문서'의 존재를 추적하던 중 마침내 진본을 찾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후 정기자의 한달간에 걸친 추적, 연구 끝에 사실이라는 심증을 갖고 오마이뉴스에 2002년 6월 3일 자로 기사를 올렸지요. 기사 제목은 "명성황후, 시해 전 '능욕'당했다", 한일월드컵과 107년전 '을미사변', [단독발굴] '에조 보고서' 일본서 입수 국내 첫 공개 입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지만 이 문서도 사실 역사학자들이 먼저 발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충격적인 주장은 '에조 보고서'에서 능욕 장면을 묘사한 대목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보고서에서 실제로 그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article_view.asp?menu=c10100&no=71957&rel%5Fno=1&back%5Furl=
1897년 11월 27일에 치루어 진 명성황후 국장의 사진이다.돌아가신 것은 1895년인데 왜 국장은 1897년이었을까?을미사변 이후 일본이 내세운 친일 내각에 의하여 1895년 폐후의 조칙이 내려지고 폐서인이 되었다가 다음 날인 10월 11일 빈호는 내린다.이 때 고종은 "짐에게 그 서명(페후 시킨다는 서명)을 강요하느니 차라리 짐의 두 팔을 자르라"고 소리쳤지만 대신들의 강권으로 서명을 안할 수 없었다.이 때 서명을 강권하고 을미개혁을 추진했던 대신들은 아관파천이후 죽음을 당하게 되니 1896년 김홍집과 농상무대신이었던 정병하가 광화문 앞 노상에서 성난 군중에게 몰매 맞아 살해 되고 다음 날에는 탁지부 대신 어윤중이 살해된다.1897년 아관에서 돌아 온 고종은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연호를 광무라 하고 왕비 민씨를 명성황후로 격상시키고 한달 뒤 국장을 치루게 되는 것이다.
명성 황후 탄강 구리비(明成皇后 誕降 舊里碑)
명성황후 탄강 구리비란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에 세운 비라는 뜻이다.
1896년 새벽 순종과 함께 도망치듯 경복궁을 빠져 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 와 대한제국을 선포한 다음, 명성황후가 돌아간지 2년 만에야 비로서, 국장을 치룰 수 있었다. 이 때 중전 민씨는 명성황후로 추봉된다. 이 비석은 또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인 1904년 명성황후의 생가 터에 세워졌다.
비 앞면에는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光武八年甲辰五月日拜手飮涕淚敬書 (광무팔년갑진오월일배수음체루경서) "광무 8년 갑진 오월 어느날 엎드려 눈물을 머금고 공경히 쓰다"]라고 새겨져 있다.
누가 이 글을 적은 것일까? 학자들은 명성황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가 된 순종이 대한제국 황태자 시절 어머니를 추모하며 쓴 글씨로 추측하고 있다.
비의 높이는 250cm, 폭 64cm이며 비각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도 지정 유형 문화재 제 41호이다.
명성황후가 돌아 가신 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세워진 명성황후 조난지 비석과 대비되는 비석이다.
경복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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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순국숭모비 건립위원 명단 부분 가운데 부회장 모윤숙 부분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