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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홍 Story +16

수레국화 |2007.04.02 13:08
조회 821 |추천 0

다홍은 오랜만에 민경을 만난다고 외출했다. 인사동  2층 찻집에서 민경은 제법 아가씨 티가 나게 앉아서 국화차를 마시고 있었다.

“은수선배는?”

“야, 넌 내가 은수선배 비서라도 되냐? 나만 보면 선배부터 묻고 난리야.”

“지지배, 그런 걸로 삐지냐? 살 다시 다 빠졌네. 공부하기 힘들지?”

“당연하지. 너 돈 잘 버니까 오늘 영양보충 좀 시켜다오, 친구.”

“그래그래. 먹고 싶은거 말만 해라.”

“삼겹살.”

민경은 배를 잡고 웃었다. 하지만 둘은 삼겹살 집에 가서 입이 터지도록 상추쌈을 싸서 실컷 먹었다.

“난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여자둘이 와서 이렇게 배 터지게 삼겹살 구워 먹을거라고는. 우리 아줌마 다 된 것 같다. 그지?”

“뭐 어때? 난 영양이 필요한 때라구. 아이스크림 먹을거지?”

“그러지 말고 나가서 커피 마시자. 차는 좀 우아하게 마셔보는게 어떻겠나, 친구?”

민경은 다홍에게서 은수선배네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다홍은 배가 불러 만족스러운 듯 소파에 신발을 벗고 다리를 올렸다.

“은수선배네 어머닌 아직도 여행 자주 가셔?”

“어. 이번주에도 안계셔. 그래서 난 좀 편하지뭐. 눈치 덜 보이고.”

“좋은 분이라며?”

“그렇긴 한데. 그래도 내가 얹혀 사니까. 자꾸 은수선배가 선 안본다고 어머니한테 반항해서 덩달아 내가 눈치보여.”

“선? 선배가 너 기다려 주지 않는대?”

“그런 감정 이제 없는 것 같던데. 이제 음..... 오빠 동생 같이 편안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은수선배는 나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막내 동생 볼때처럼 그냥 귀엽고 그런거. 아무래도 나이차가 있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그럼 넌?”
“난 뭐 바빠서 그런 생각할 틈도 없구.”

“선배가 선 안보고 있는건 너 때문이잖아.”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선 자체가 싫은 것 같아. 그리고 따라다니는 여자도 있어. 강민영이라구. 지리산 그 여자.”

“그 여자 또 나타났어? 그냥 친구라며? ”

“남자들 앞에서 그렇게 얘기하는가 본데. 여자들은 여자를 알잖아. 선배를 분명 좋아하는게 맞아. 내가 선배한테 꼬리치면 죽이겠다던걸.”

“웃겨. 자기가 뭐 선배 와이프라도 되나?”

“그런데 그 하이톤의 콧소리만 빼면 봐줄만해. 키크고 그만하면 예쁘고, 한의사니까 돈도 잘 벌고. 집안 좋고.”

“자포자기야? 넌 그렇게 안되니 그 여자한테 선배 양보할려구?”

“야야, 남이 들으면 뭐 선배가 내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그냥 둘이도 은근히 어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직업이 같으니 관심사도 같을 거 아냐.”

민경은 자기도 겪었던 과정을 다홍이 똑같이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시험에 찌들어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 나 자신이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해 보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플 때. 지금이 다홍에게 있어서 그 때인 것 같다.

“넌 아직도 선배 좋아하지?”

다홍은 대답을 애써 피하려 나가자고 했다. 인사동의 거리는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다홍은 갑자기 뭘 발견했는지 민경을 끌고 달려갔다. 허름하게 비닐로 만들어진 천막 밖에는 낯익은 글자들이 아무렇게나 쓰여져 있었다. 신수, 사주, 궁합...

60은 넘었을 법한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다홍을 훑어봤다.

“왜? 남자 문제가 꼬여?”

“그런거 아닌데요. 시험 때문에 온거예요.”

“시험은 둘째 치고 남자 문제부터 해결을 봐야 시험이 붙고 말고 하지.”

“아저씨, 그럼 얘 남자 문제가 어떻게 꼬이는데요?”

민경이 더 흥미를 가지며 다가앉아 물었다.

“이런 상은 남자복이 있거든. 남자의 정기를 받아야 인생이 풀리는 사주야. 그 전에는 뭐 되는게 하나도 없지. 지금까지 그랬지?”

다홍은 좀 억지스럽지만 아저씨가 워낙 확신에 차서 말을 하니 피식 웃었다.

“주변에 따르는 남자가 있구만. 고민하지 말고 콱 물어. 팔자 펴지는 소리 들린다.”

아저씨는 또 무슨 점괘를 보려는지 눈을 감고 손가락 마디를 세며 중얼중얼했다. 민경이 다홍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거봐. 은수선배가 니 운명이라니깐. 콱 물어.”

아저씨가 눈을 떴다.

“남자는 몇 살이야?”

“서른요.”

민경은 신이 나서 다홍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대답했다.

“이 남자 만나면 인생 바뀐다. 이 남자는 아가씨를 위해 간이라도 꺼내 바칠 위인이야. 이 남자하고 결혼하면 시험이 뭐 대수랴, 가만 있어도 돈이 굴러들어오고, 자식들은 대대손손 이름을 떨치니라.”

다홍은 사이비같은 아저씨 말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넌 안봐?”

다홍이 복채를 내고 민경과 자리를 바꾸려 하자 민경은 얼른 다홍을 잡아 끌고 나왔다.

“우리는 안봐도 찰떡궁합이야.”

“어련하시겠어.. 닭살들.”

“사실 준용선배가 다른데 가서 궁합을 봤는데 별로라서 이제 그런거 보지 말자고 하더라구. 넌 좋겠다. 간이라도 꺼내 바칠 위인이랑 한 집에 살아서.”

“돌팔이가 한 얘기 듣고 또 시작한다. 그냥 잊어버리시오. 서민경씨”



다홍은 민경과 헤어져 집에 오자 반바지만 입고 소파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 은수와 눈이 마주쳤다. 괜히 점장이의 말이 생각나서 웃음이 나왔다. 저 사람이 정말 간이라도 빼 바칠 사람일까.

“선배, 선배는 장기기증같은거 할 수 있어요? 설령 간이라든가, 신장이라든가..”

“아니, 난 몸에 칼 대는게 싫어서 한의사가 된건데. 뭐 본과에서는 해부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런건 절대 아니올시다. 왜? 어디 아퍼? 내 장기는 별로 건강하지 못한데...”

그럼 그렇지. 곱게 자란 도련님이 뭐가 아쉬워서 간을 빼주겠냐고.

다홍은 역시 점장이가 돌팔이라는 생각이 들어 5천원이나 낸 것을 후회했다. 씻고 나오니 은수가 2층으로 옮겨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자꾸만 틀려서 다시 치고 다시 치고 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꽤 쓸만했는데 요즘은 건반도 헷갈리네. 뭐 신청곡 없어?”

“그냥 CD들으면 돼요.”

“어, 그래....”

다홍은 기껏 폼잡고 있던 은수가 당황하자 우스웠는지 낄낄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어?”

“그거 쳐 달라구요. 그때 보니까 악보 있던데.”

은수는 서둘러 악보를 찾아서는 치기 시작했다. 다홍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흥얼거렸다. 영국의 기숙사 룸메이트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서 매일 아침 들었는데 한동안 못 들었더니 그립기도 했다. 은수는 실수할 때마다 다홍을 보며 머쓱한 듯 미소지었다.

“민경이랑 맛난 거 먹었어?”

은수가 피아노 뚜껑을 내려놓으며 소파로 왔다.

“삼겹살.”

“삼겹살?  여자 둘이서?”

“6인분”

“그것도 6인분이나? 우리 이모가 고기 반찬 안해주시디?”

“그냥 지글거리면서 구워 먹고 싶을 때 있잖아요. 점도 봤어요.”

“시험 때문에?”

“시험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던데요. 남자 복이 많은 팔자라서 괜찮은 놈 한 놈 물면 시험은 가만 있어도 된다나.. 간도 빼줄 위인 만날 거라는데요.”

“난 아니네. 난  간 같은거 못 빼주는거 알지?”

은수는 다홍의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돈 걸 알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렸다. 기껏 참으며 기다려왔는데 굳이 다홍이 떠보는 말에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다홍에게는 연애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루 기껏 마음이 여유롭다고 해서 다시 연애 기분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당장 내일부터 학원을 가서 하루종일 앉아 있을 다홍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할지 알기 때문이다.

“누가 선배래요? 기왕 만나는 거 좀 젊고 쌩쌩한 놈으로 만나야죠. 저 자러 갈래요. 모레 수업 없는 날 원서 쓰러 대구 가려구요.”

“대구엔 왜? 서울 쓸 거 아니야?”

“서울도 쓰고 대구도 쓰려구요. 서울은 너무 높아서 고민중이예요.”

“그럼 민경이처럼 경기도 쓰면 되잖아. 어차피 서울서 출퇴근하면 되는데.”

“굳이 서울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부모님도 대구 계시고.”

다홍은 정작 대구에 쓸 마음도 없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은수가 말릴 줄 알았는데 은수는 별 말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다홍 스스로 느낀 것처럼 은수는 이제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서 동생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맞나 보다.


대구에 간다고 아침부터 갔는데도 줄이 길어서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원서를 접수할 수 있었다. 서둘러 부모님을 뵙고 엄마가 한사코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해서 뜨는 둥 마는 둥하고 나왔는데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7시다. 표가 없어서 8시까지 기다려 버스를 탔다. 은수네가 걱정할까봐 전화를 하고는 한잠 잤다. 갑자기 뻥하는 소리가 들리고 버스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운전사는 얼른 버스를 갓길에 세우고 나가서 확인하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타이어가 펑크났는데요. 지금은 밤이라 수리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다음 버스는 40분있어야 오니 그 전에 수리가 못 끝나면 다음 버스를 타고 가십시오.”

버스안은 술렁이는 듯 하더니 곧 잠잠해졌다. 다홍도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니 10시 30분이다.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불이 깜빡였다. 서둘러 은수에게 전화를 했다.

“선배, 버스가 타이어가 펑크나서...”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원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를 수리한다고 시동을 꺼버려서 추위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벗어놓았던 코트를 입고 다시 앉았다. 남자들이 나가서 같이 도왔지만 빨리 끝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꽤 흘렀다.  차는 타이어를 다시 갈았는지 운전사가 타서 시동을 걸었다. 수리를 돕던 남자들이 버스에 다 오르자 차는 출발했다. 11시 30분이다. 한 시간이나 지체했다. 동서울에 도착하니 12시 40분이다. 지하철이 끊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맞춰 택시를 탔다. 청담동 방향은 없는지 다홍이 청담동이라고 해도 다들 시선도 주지 않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혼자서 택시를 타고 은수네 집 앞에 도착했다. 아직 불이 있는 걸 보니 은수가 자지 않고 있나보다. 다행히 그의 부모님이 여행 중이셔서 늦었도 덜 조심스러웠다.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불켜진 거실을 서성이는 은수가 보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이모가 달려왔다.

“다홍이 왔네. 괜찮아?”

“그럼요. 이모 많이 걱정하셨어요? ”

“버스 타이어가 펑크났다며? 그런데 연락이 돼야 말이지. 우리는 또 사고가 크게 나서 전화가 안되는 줄 알았잖아.”

“배터리가 없어서 그냥 끊어졌어요.”

그때 은수의 전화벨이 울렸다.

“네. 형...네..돌아왔어요.... 탔던 버스가 펑크가 나서 중간에 섰었나봐요.. 네..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은수는 차가운 눈초리로 다홍을 보고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은수가 걱정 많이 했어. 오죽하면 터미널까지 갔을라구. 터미널에서는 오늘 들어올 버스 다 들어왔다고 하더라네. 그래서 서울 시내 병원 응급실에는 다 가보고 왔을거야. 너 들어오면 연락달라고 전화번호 남기고 왔다고 하더라구... 말도 마..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피가 마르더라구... 은수가 어찌나 걱정을 하고 뛰어다니는지 말이야. 피곤하겠다. 얼른 씻고 자.”

“이모, 죄송해요.”

“내게 죄송할 게 뭐 있나? 그래도 은수한테는 가봐. 화 많이 났을 거야. 걱정을 그렇게 하다가도 원래 멀쩡하게 들어오면 혼자 생쑈한 것 같아서 화 나거든. 사람 마음이 다 그래.”

은수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노크해도 아무 말이 없다. 다시 두드리려다가 그냥 문을 열었다. 여전히 답을 해줄 것 같지는 않아서 였다.

은수는 침대 옆 스탠드 불만 켜놓고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돌아서 나가려다가 창문이 활짝 열려있어서 새벽에 추울 것 같아 닫아 주고는 조용히 발뒤꿈치를 들어 문으로 가는데 은수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다홍은 걸음을 멈췄다. 은수가 머리끝까지 화가 났을텐데도 다홍에게 화를 내지 못해 혼자 속으로 삭이느라 한숨을 쉬는 것을 안다.

“미안해요. 그렇게 걱정할 줄 몰랐어요.”

“...........”

“잘자요..”

다홍은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전원을 켜니 연이어 뻐꾹뻐꾹 문자가 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사고가 많이 난거야?]

[제발 전화 좀 받아. 제발 좀.]

얼마나 많이 그가 전화했었을지 짐작이 간다. 씻으려고 욕실로 가려다 그의 방문 앞에서 멈췄다. 방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그와의 거리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어진 것 같았다. 방에서 내쉬는 그의 한숨이 다홍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발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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