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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단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1홍성의 꿈나무 ⒧

조의선인 |2010.07.16 23:56
조회 295 |추천 0

 

★ 너무 이른 부친의 죽음

 

홍성에서 서북쪽 서산방면으로 약 11킬로미터를 지나 갈산면 소재지이고 소재지에서 남쪽 방향으로 약 1·6킬로미터 지나면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이다. 이곳의 옛 지명이 홍주군(洪州郡) 고남하도면(高南下道面) 행촌리(杏村里)였다.

 

이 지역은 북쪽으로 서산 성왕산의 가야산으로 맥을 이은 덕숭산의 일록으로 삼준산(三峻山)을 거쳐 서남쪽으로 봉화산(逢火山)과 삼불산(三佛山)이 웅장하게 보호하고 있는 부락이다. 동쪽으로 용봉산(龍鳳山)과 백월산(白月山)이 있고 동남쪽으로 오서산(烏捿山)이 멀리 보이며 가까이는 형산이 있다.

 

행산리(杏山里)를 우회하는 와룡천(臥龍川)은 여러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장항리(獐項里)를 거쳐 서해 천수만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행산리의 중앙에 위치한 대궐같은 김형규(金衡圭) 참봉(參奉) 자택 높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꾸역꾸역 오르고 행낭채의 종들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마치 개미떼들이 돌아다니듯 했다. 김참봉이 빨리 금줄을 준비하라는 호령을 내리니 노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아기의 울음소리가 집안을 울리며 밖으로 터져나와 삼준산에 울리자 행산리 마을을 진동시킨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김 참봉댁 근처로 모여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산모역(産母役)을 담당했던 노비 춘봉(春鳳)이 나오자 마자 혀를 내두른다.

 

“아유! 어쩌면 그렇게 클까유?”

 

주인 마님인 한산(韓山) 이씨(李氏) 부인은 초산(初産)도 아닌데 여러 번 혼절할 지경을 넘기면서 아들이 나오지 않아 집안사람들이 온통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다시 ‘으앙, 으앙!’ 하는 소리가 집안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저 보시오. 도련님이 얼마나 큰지 주인 마님이 고생을 많이 했다오.”

 

춘봉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김 참봉은 종들이 꼬아 놓은 새끼줄에 10개의 붉은 고추 12개를 단 금줄을 대문에 달고 종들이 파온 황토 흙을 좌우로 세 군데씩 놓았다. 이날이 1889년 음력으로 11월 24일(양력으로는 1889년 12월 16일)이다. 그 당시는 김 참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장차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에 투신하여 한국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주(四柱)도 함께 타고 태어난 군사 지도자였다.

 

그 아기의 이름은 좌진(佐鎭)이고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인 김형규 참봉은 당시 26세의 약관으로 안동(安東) 김씨(金氏)의 명문거족으로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인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이 먼 친척이었다. 그의 조상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며 반청운동(反淸運動)을 벌였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있었다.

 

당시 조선왕조는 18세기경부터 세도정치(勢道政治) 때문에 삼정(三政)이 문란해지며 봉건주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1805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세상을 떠나자 경주(慶州) 김씨(金氏)의 권세를 누르고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김조순(金祖淳)은 자기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전례없는 친족일색의 인사조치를 취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익도(金翼度)·김달순(金達淳)·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 등이 삼공(三公) 육경(六卿)의 직책을 번갈아 맡았는가 하면 각도의 감찰사(監察史)를 비롯한 수령(守令)의 직책도 그 일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 권세가 컸던 만큼 그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다. 김씨 일족에게 사실상 소외되고 있던 순조(純祖)는 김씨 일족의 발호를 제어해 보기 위하여 다른 일족의 등용을 서서히 기도하였다. 즉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빈(嬪)을 풍양(豊壤) 조씨(趙氏)에서 택하고 세자의 장인인 조만영(趙萬永)을 부사직(副司直)에서 일약 금위대장(禁衛大將)을 거쳐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재위 27년인 1827년 2월에 자신의 건강을 이유로 19세의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하였다.

 

효명세자는 명군(名君)으로 촉망될 정도로 유능하여 왕권이 다시 소생한 듯하였으나 대리청정도 4년만인 1830년에 세자가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순조의 기세는 일단 좌절되었으나 풍양 조씨의 세도는 다음 대까지 한동안 누리었다. 그러나 순조는 세자가 죽은 뒤 다시 친정(親政)을 베풀었으나 곧 죽으므로써 세손(世孫)인 원헌(元軒) 이환(李奐)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헌종(憲宗)이다. 헌종이 어려서 관례에 따라 김조순의 딸이며 순조의 비(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었고 또한 헌종의 비도 김조근(金祖根)의 딸로 택하였다. 그러므로 외형상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 된 듯하나 헌종의 외조부인 조만영이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고 그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이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오르고 조씨의 외척인 홍석주(洪奭周)가 좌의정에 앉는 등 조씨의 세도가 계속되었다가, 중심적 인물인 조만영이 1846년에 사망하자 그를 대신하여 김좌근(金左根)·김홍근(金弘根) 등의 주축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1851년에는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철종(哲宗)의 왕비가 되는 한편 풍양 조씨 세력이 축출되고 안동 김씨가 요직을 다시 독점하기에 이른다. 김홍근·김좌근·김영근(金泳根) 등이 삼공을 도맡았고 김병익(金炳翼)·김병학(金炳學)·김병필(金炳弼) 등이 육경과 대장(大將)의 요직을 차지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가 조정을 장악했다.

 

이 때 홍주 지방의 안동 김씨 가운데 등과(登科)한 사람이 11명이나 되었고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도 고종으로부터 참봉의 벼슬을 받았다. 한때 국운(國運)과 같이 가운(家運)도 기울었지만 세도를 다시 잡은 안동 김씨는 갈뫼마을에서 호족으로서 세도의 위세를 부림으로써 서민들은 상여(喪輿)를 김씨 자택 문 앞을 지나지 못하고 와룡천 개울로 상여가 보이지 않게 낮추어서 지났다 하니 안동 김씨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이러한 위세도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력위협(武力威脅)으로 나라의 주권을 보존할 수 없게 되니 김씨 가문의 세도도 남아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좌진 장군이 태어난 것은 안동 김씨 가문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서도 항일전(抗日戰)의 대영웅을 하늘이 점지해서 내려준 것이니 시기가 잘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인 김형규 참봉은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던 김옥균의 개화사상(開化思想)에 심취되어 있었고 우국(憂國)의 마음이 남달랐던 청년이었다. 그는 가끔 한양을 다니며 집안 어른들을 찾아 뵙고 정세를 토론하고 돌아온다. 물론 이 자리는 외부세력을 등에 업고 권세를 잡아 백성들의 안위는 무시한 채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간신배를 규탄하는 자리가 되어 버린다. 그때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크게 지른다. 그리고 고향집에 돌아오면 “이렇게 나라꼴이 한심해서야.....”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이 입버릇처럼 되어버렸다.

 

이와 같은 심화(心火)는 병(病)으로 변화되어 가끔 머리를 싸매고 눕는 정도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증세는 날이 갈수록 눕는 회수가 많아졌고 좌진의 동생 동진(東鎭)이 태어났을 무렵에는 기동도 어려울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던 그 어느 여름날 하늘도 잔뜩 찌푸러져 있었고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늙은 노비 춘봉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 좌진에게 급히 달려오며 “마나님께서 도련님을 급히 모셔오라고 하셨어요”하더니 좌진을 등에 업고 방에 들어선다. 방 안에는 아랫목에 누워 있는 좌진의 아버지 곁에 친척들이 침통한 얼굴로 둘러 앉아 있었다.

 

그 때 문소리에 김 참봉은 좌진을 돌아보고 있었으나 그 눈에는 열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고목같이 뼈만 남은 손으로 갓 네살이 된 아들의 포동포동한 손목을 잡고는 말없이 좌진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좌진은 항상 나를 귀여워하고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던 아버지가 오늘 따라 손만 붙들고 바라보고만 있으니 딴사람처럼 보였고 또는 몸에는 오싹하는 느낌마저 돌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그 순간 김 참봉의 숨소리가 헐떡거리며 이마와 목에서 땀방울이 물처럼 흘려내린다. 어린 김좌진은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아빠, 많이 아파? 응?”

 

김 참봉은 말문을 열고 굳어가는 혀로 떠듬 떠듬 묻는다.

 

“넌 커서 무엇이 될 테냐?”

 

네살박이 좌진은 의외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판서가 될 거야.”

 

그러자 김 참봉의 얼굴이 변색이 되고 눈썹이 꿈틀거리며 아들을 바라보았고 옆에 앉은 어른들도 돌연한 대답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좌진의 대답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 참봉은 병으로 몸져 눕기 전에 한양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내인 이씨 부인에게 김좌진이 잠들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개탄하였다.

 

“이번에 한양에 갔더니 기가 막힙디다. 어중이 떠중이들이 여흥(驪興) 민씨(閔氏)입네 하고 정승과 판서 다 해먹고 판서라도 하나 되는 날이면 힘없는 백성들의 재산은 으레히 자기 주머니 돈으로 생각하여 흥청망청거리는 꼬락서니라니 정말 이렇게 가다간 나라가 망하는 것도 얼마 안남은 것 같소. 그렇다고 힘없는 내가 그들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정말 조상들을 대할 면목이 없소. 아! 이럴 때 고균 선생이라도 계셨더라면.....”

 

그때 좌진은 어머니 옆에 누워 아버지가 이야기하는 뜻은 잘 모르지만 ‘판서’라는 것이 굉장한 자리라는 것만은 알아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좌진은 아버지의 마음을 좋게 해주고 싶어서 자랑스럽게도 판서가 되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김 참봉은 아들의 손목을 꽉 잡고 치밀어 오르는 가래를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

 

“너는... 절대로... 판서 따위가 돼서는... 안된다... 판서는 나라를 망치는... 간신배들이나... 해먹는 자리다... 너는 그 흉악한 역적 놈들을 싹 쓸어내는... 백두산의 호랑이 같은 장수가 되어서... 나라를 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꼭 그리... 하여야 한다...”

 

김 참봉은 마지막 말을 마치고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이때가 좌진의 동생인 동진이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던 1892년 음력 3월 11일이었고 그의 부친인 김형규 참봉은 겨우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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