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방으로 망명길에 오르다.
김좌진이 기생 김계월의 집에 숨어 산 지 10여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저자 거리에 나간 김계월이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오는데, 서울 곳곳을 순시하고 검색하던 일본 헌병들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다. 이 때에 대한광복회원들이 경상북도 칠곡군 부호 장승원(張承遠), 충청남도 아산군 도고면 면장 박용하(朴容夏), 전라남도 보성군의 양재학(梁在學), 낙안군의 서도현(徐道賢) 등 친일파를 제거하고 그들의 돈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계속 이어지자 일본 경찰의 수사력이 그 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김좌진이 결행한 계동에서의 금궤 탈취 사건 같은 것은 안목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명월관에서 일본 군인들이 소곤거리는 정보들을 훔쳐들은 김계월은 집으로 돌아와 벽장방에 숨어 있는 김좌진에게 전달했다. 김좌진은 김계월의 말을 듣고 흥분하거나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대한광복회원들의 활약으로 일본인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어째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으시는지요?”
김계월이 이상하게 여겨 묻자 김좌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대한광복회가 조직된 목적은 독립군을 양성할 군자금을 확보하는데 있지 살인에 있지 않소. 그런데 광복회의 동지들이 자꾸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면 도리어 민심이 이반되고 그들을 체포하려는 일본 경찰의 발악도 더욱 거세질 것이오.”
“그렇지만 민족을 배신하고 일본인들에게 빌붙어 재산을 축적한 친일 부호들은 백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매국노들이잖아요.”
“물론 그렇소. 하지만 살인은 항상 최후의 수단으로 써야지 최선의 방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소. 친일 부호들이 광복회원들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이렇게 자주 일어난다면 일본 헌병들과 경찰은 대한광복회를 수색하여 일망타진(一網打盡)하려는 의지를 더욱 북돋게 될 것이고 그만큼 수사망은 촘촘이 두터워져 우리 동지들은 결국 그들의 손에 잡히게 될 것이오. 그러면 십중팔구(十中八九) 사형을 언도받게 되겠지. 버러지만도 못한 그깟 매국노들 몇 명 죽였다고 해서 우리 동지들이 일본의 법정에서 사형당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소? 차라리 조선총독, 아니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나 일왕(日王)의 목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희생이 전혀 아깝지 않으나 벌레같은 매국노들 몇 명 죽여 일본 경찰에 붙잡히고 사형당한다면 도리어 조국의 독립은 더욱 멀어질 뿐이오.”
동지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김좌진의 모습에 김계월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계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언젠가 세월이 좋아지면 그대에게 입은 은혜는 반드시 갚겠소.”
김좌진은 김계월의 교구를 와락 끌어안았다. 김계월은 저항하지 않은 채 김좌진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조금 빨라지고 있었다. 김좌진은 그녀의 입술을 틀어막으며 두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의 뜨거운 육체는 마치 식초에 녹은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사내의 몸에 달라붙었다. 마치 몸 구석구석에 흡반(吸盤)이 있어 사내의 진기를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김좌진이 사정없이 자신의 몸 안을 파고들자 김계월은 가위 눌린 소리로 계속 비명을 질렀다. 김좌진의 힘이 어찌나 세던지 김계월은 소나기 같은 땀을 쏟아내며 몇 범이고 실신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1908년 1월, 마침내 김좌진이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의 비밀결사조직(秘密結社組織)이었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회원인 이종국(李鍾國)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김한종(金漢鍾)·김진만(金鎭萬) 등 주요 간부들의 피체로 와해되었던 것이다. 김계월의 집에서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김좌진은 이 소식을 듣고 가슴을 치며 통탄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며칠 밤잠을 이루지 못한 채 망설이던 김좌진은 드디어 마음의 결심을 하였다. 대한광복회가 와해된 지금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므로 우선 국외(國外)로 떠나 그 곳에서 다시 실력을 기른 뒤 기회를 보아 국내로 침투하는 것이 최선이란 결론이었다. 김계월은 이와 같은 상황이 올 것이란 예측을 한 듯 윗목에서 붓을 희롱하며 난초를 그리고 있었다.
김좌진은 다정한 눈짓을 하며 김계월을 불렀다. 김계월은 붓을 놓고 공손히 대답하며 다가와 앉았다.
“지금 몇 달 되었지?”
김좌진의 손이 김계월의 배를 어루만졌다.
“두 달 되었어요.”
“그렇다면 내년 5월경에 출산(出産)달이겠구먼.. 고생이 심하겠구먼.”
김계월의 얼굴은 홍시감처럼 붉어졌다. 김좌진은 손가락으로 김계월의 턱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계월이, 그대에게는 안될 말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서울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네. 참으로 이를 어쩐담?”
“아니, 어디로 가시려고요?”
“우리 조상들의 나라였던 고구려(高句麗)와 발해(渤海)의 옛 땅, 만주로 가야겠어. 자네는 독립이 오는 날까지 참고 나를 기다릴 수 있겠지?”
김좌진의 짧막한 말과 단호한 결심에 김계월의 눈은 젖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사랑의 감정보다는 조국의 독립이란 대의를 위해 떠나는 정인(情人)의 앞길을 막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무슨 말이고 어떠한 표정도 보일 수 없었다.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실정이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결단이야. 앞으로 일본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 땅에서 의병을 모아 군사력을 기른 뒤 이 땅을 다시 밟을 생각일세. 그리고 언제 올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아이의 이름만은 아비인 내가 지어놓겠네. 만일 아들을 낳으면 두한(斗漢)이라 하고, 딸이면 옥한(玉漢)이라 하게. 앞으로 8개월 남았네. 그리고 저 도랑 속에 금궤가 있네. 내가 가지고 갈 수 없으나 언젠가 찾을 것이니 그리 알게. 다만 돈만 꺼내고 그 금궤를 도로 그 자리에 묻을 생각이네. 그 금궤는 최씨 부자 물건이니 목적이 달성되면 그 돈도 갚아야 할 것이야. 그리 알게.”
김계월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린다. 김좌진은 뒷처리를 위하여 그날 밤 김계월의 집에 머무르면서 도랑에 묻었던 금궤를 꺼냈다. 금궤는 두 배로 무거웠다. 그러나 금궤의 비밀번호를 알 수가 없으니 열 방법이 없다. 도끼날을 대고 뜯어 낸 뒤 도끼날을 깊숙히 넣은 다음 벌어진 틈에 손가락을 넣고 힘을 주니 금궤문이 왈칵 열렸다. 그 속에는 예상과 달리 돈은 많지 않고 금지환 5개와 일본의 국채권 10만원어치 그리고 현금 신권으로 5만원이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전부 꺼내고 다시 그 자리에 금궤만을 묻고 젖은 지폐는 김좌진이 자고 은신하던 골방 벽장바닥에 펴놓았다. 김좌진은 이와 같이 떠날 준비를 마치고 김계월의 옆에서 지필묵(紙筆墨)을 준비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남아실수난용지(男兒失手難容地) 지사투생갱댕시(志士偸生更待時)’
이 글귀는 ‘남자로 태어나 실수하면 용납해 주는 곳이 없으니, 뜻있는 선비가 굳이 살려고 하는 것은 때를 기다리려는 것이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말미에 ‘아들이면 두한이라 하고, 딸이면 옥한이라 하라. 아버지인 안동 김좌진이 써놓는다’고 적었다.
이렇게 글을 쓴 화선지를 김계월에게 남기고 그는 노자만 챙겨 홀연히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어떤 교통수단도 없이 호신용으로 권총 한 자루만 품 속에 숨긴 채 김좌진은 홀홀단신으로 북방의 추위와 싸우며 북행길에 올랐다. 개성(開城) 근방에서 곡마단 놀이패들과 어울리게 된 김좌진은 그들 무리 속에 섞여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며 압록강철교(鴨綠江鐵橋) 앞에 다다랐다.
김좌진은 강가에 서서 남쪽을 향하여 다시 돌아섰다. 자신이 걸어온 길, 아니 우리 민족의 조국 삼천리 금수강산의 끝에 서 있는 것이다. 저 멀리 만주 땅 안동현(安東縣)도 희미하게 보였다. 날씨가 살을 에일 듯한 북풍이 휘몰아치고 가는 눈발이 휘날린다. 이제 발길을 옮겨 이 철교를 건너가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예약없는 조국 땅이여...! 이 철교를 건너 다시 조국에 돌아올 때는 일본인들이 우리의 땅에서 전부 사라진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는 타오르는 망국(亡國)의 울분을 가슴에 되새기며 드디어 철교를 지나 만주 땅에 첫 발을 디뎠다.
그러나 만주의 국경 도시인 안동도 이미 일본인들이 들어와 거들먹거리며 활보하고 있고, 조선 교포들은 많았지만 이들은 돈만 번다면 어느 누구에게나 굽신거리는 것은 물론 아예 일본인에게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장사꾼들이니 김좌진의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김좌진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안동에 머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일 뿐 아니라 구역질이 나는 일이라 생각하고 봉천성(奉天省)으로 발길을 돌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