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경들의 촛불시위 무력진압 뉴스들을 접하게 되면서.
문상길 중위 라는 분이 자꾸 떠오릅니다.
우선,
문상길 중위 라는분을 알기위해서 60여년전 제주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제주도에서 제주도 인구의 십분의 일인 3만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소위말하는 제주도 4.3 사건이지요.
당시 제주도가 '빨갱이의 섬' 으로 낙인찍힌채,
6.25 당시 희생당한 남북 한국인의 비율과 거의 비슷한 삼만명이 대 학살을 당했던 이유는
'자주적인 통일 국가의 염원'
때문이 아니었나 합니다.
광복 직후에 일본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되며
타국에서의 삶속에서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진 분들과 대학등 고등교육을 받은 분들이
제주도로 많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 당시 제주도는 25퍼센트라는 국내 최대의 인구 변동률을 기록하게 될 정도였죠
교육수준도 남달라 1945년 8월부터 1947년 12월 사이에
중등 학교 10개소, 초등학교 44개소가 설립되었습니다.
미국학자 브루스커밍스(B.Cumings)는 1947년 2월 시점에서
전국 각도 15개 군의 15세 이상의 남자를 대상으로 초등학교 이상의 졸업생 비율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북제주군이 35.7퍼센트로 교육수준 1위로 나타났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깨인 분' 들이 많았던 제주도에 불씨를 터트리게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1947년 3월 1일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규탄하고 민족 독립 국가 수립을
촉구하던 3.1절 기념행사중
시위 후 구경을 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발포,
6명이 숨지고 8명이 중상을 입게 돼는 일이 일어나는데요
당시 군정 당국은 좌익계의 선동에 의해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6명의 사망자가 초등 학생,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장년의 농부 등
대부분 시위를 보던 군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주도민들은 격분하게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의 과잉 반응으로 인한 발포였다고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군경은 계속적인 정당방위론만을 주장하고 민심수습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열흘뒤인 3월 10일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발포 경찰들의 처벌,경찰 수뇌부 사임,희생자 유족보상등을 요구하면서
도내모든학교가 휴교를하고 상점들도 문을닫는등
세계사적에서도 보기드문 민간 총 파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 대령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하는데요
미군 조사단은 제주 총파업의 원인을 3·1절 경찰 발포로 인한 도민 감정의 격화와
이런 도민 감정을 선동하여 증폭시킨 남로당에 있다고 파악합니다.
그러면서도 경찰의 발포행위는 애써 무시한채
남로당의 선동 부분에만 치중하여 사태해결을 모색하며 강공정책을 추진하게됩니다.
경무부장 조병옥씨와 응원 경찰대가 제주에 들어오고,
타지역 수사요원들을 중심으로 한 특별 수사대가 설치되어 무력 진압을 시작하는데
검속 한달만에 500여명이 체포되고 4.3 직전까지 1년간 2500여명이 구금됩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1시 경 김달삼을 중심으로 한 500여명의 무장대가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그 세력은 점점 커지는 가운데,
좌파 세력과 김구, 김규식씨 등 양심적인 우파 세력들및 중도 세력들의
분단을 막아보려는 단독선거 반대 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1948년 5월 6일, 김익렬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이 부임하고,
1948년 5월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제주도의 경우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투표자 과반수 미달로 무효가 됨으로써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선거 거부 지역이 됩니다.
이에 단독선거를 추진해온 미군정은 제주도를 눈의 가시로 여겨 5.10 선거가 저지된 이후
군병력을 더욱 강화, 오로지 진압 일변도로 몰고 나가게 됩니다.
해군 7척을 동원하여 다른 지방과의 뱃길을 차단,
제주도를 고립시키고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는데
현직검사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들이 끌려가 즉결처분 당하는가 하면,
제주중학교 초대교장 현경호 씨와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씨가 총살되고,
서북청년회는 유일한 지역 언론사인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하게 됩니다.
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학살이 행해지는데요
여자들은 성폭행 한뒤 죽이고,
가족중 한명이라도 없는 경우에는 '도피자 가족'이라하여 부모 형제를 대신 학살하였으며,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3만여명이 무참히 학살 당합니다.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앤다는
이른바 '삼진정책(三盡政策)'은 제주도를 온통 피로 물들게 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던 '미라이 학살' 보다 더 참혹한
양민 집단 학살이 제주도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죠
문상길 중위님은 이때 박진경 연대장의 강경 토벌책에 반발하여 손하사관님과 함께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는데요
전시에 군대에서의 상사를 암살한 죄로
손하사관님과 함께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문상길 중위님과 손하사관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의 장면은
정말 가슴이 아려올정도 인데요..
"스물 두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절규한 것도 아니며 호소하지도 않고
단지 마지막 유언으로만 남긴 말입니다..
뒤이어 손 하사관이 형장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목례를 하였습니다
집행장이 낭독되자 유언으로
"여러분 훌륭한 한국국민의 군대가 되어주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는 순간
"겨누어 총!" 하는 구령이 떨어지고
이때 손하사관의 입에서는
"오오, 삼천만 민족이여!"
라는 말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때 "쏘아" 하는 구령이 떨어집니다..
일천구백사십팔년 구월 이십오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요새 미국 쇠고기 파동때문에 여러날 촛불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주도 4.3 사태나 광주 민주화 항쟁들과는 많이 다를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시위하는 분들이 많으니,
어쩔수 없이 힘으로 진압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대포를 뿌려대고
아이를 태운 유모차에 소화기를 뿌려대며
도망가는 힘없는 여대생의 뒷머리를 경찰봉으로 가격하고
방패날로 시위대를 가격 하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안쓰럽기 그지 없네요..
문상길 중위님이 마지막 유언이
자꾸만 가슴에 와 닿네요..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기록들은 www.bille.pe.kr/jeju4.3.htm 와 조정래씨의 태백산맥에서 퍼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