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봉래포대첩(峰崍浦大捷)
연수영이 이끄는 고구려 수군이 당 수군을 묘도로 밀어내고 비사성을 탈환할 무렵, 병력은 5만여명에 이르렀는데 절반을 장산군도와 석성에 배치했고, 나머지 절반은 비사성 본영에 배치했다. 그렇게 수군의 정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그녀는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연개소문이 요서로 진격하면서 협공을 지시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전함과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당 수군이 만에 하나라도 후방에 상륙하여 배후를 끊을까 염려해서였다.
연개소문이 고정의와 더불어 12만 대군을 이끌고 이세민을 뒤쫓아 요서로 진격, 금주·대릉하·갈석산 일대에서 당군을 격파할 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우진달(牛進達)과 구행엄(丘行淹)이 1만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 방면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당군은 청석관전투(靑石關戰鬪)에서 건안성주(建安城主) 고원부(高元部)와 남소성주(南蘇城主) 대곤우(大昆羽) 등에게 대패하여 무너져버렸다.
청석관전투의 승전보(勝戰譜)를 전해들은 연수영은 아예 당 수군의 본거지인 봉래포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5만의 군사와 5백여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고구려 수군 함대가 비사성 기지에서 출전한 것은 서력 646년 1월 28일. 여당전쟁(麗唐戰爭)이 발발한 이래 최대 규모의 수군이 항진을 개시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전함은 주로 단단한 백두산 소나무로 건조되어 중국인들의 전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그러나 중국의 군선은 목재부터 고구려의 선박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선술(造船術)도 훨씬 뒤떨어져 고구려나 백제처럼 견고한 배를 만들지도 못했다. 중국의 대선은 주로 누선(樓船)이라고 부르는데 갑판 위에 지휘소 겸 장수의 선실인 2, 3층짜리 커다란 누각을 이고 있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의 대선에는 갑판 중앙부 장수의 선실 위에 장대(將臺)가 있었다. 장대는 성의 점장대나 망루와 마찬가지로 배에서 장수가 전투를 지휘하는 곳으로서 지붕과 기둥은 있지만 벽이 없는 정자 모양이었다.
대장선의 장대에 앉아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함대를 둘러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이제 나이가 갓 서른을 넘긴 듯한 여인은 푸른 술이 달린 검은 투구를 쓰고, 윤기 나는 검은 미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투구의 앞면에는 고구려군의 표상인 삼족오(三足烏)가 적금 색으로 상감(象嵌)되어 있고 갑옷의 견갑부에도 삼족오상이 붙어 있었다. 또 허리에는 패검(佩劍)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는 동부(東部) 연씨가(淵氏家) 전래의 비도(飛刀)를 두 자루씩 차고, 갑옷 겉에는 푸른색 전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해란봉(解蘭峰)·연미경(淵美景)·고정림(高貞林)·부경화(夫景華)·원신영(元信永)·장혜경(張惠景)·전혜원(全惠苑) 등 일곱 명의 낭자군이 호위하고 있었다. 연수영의 친위대인 12낭자군 가운데 이미 다섯이 죽고 일곱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대장선의 장대 양쪽에는 ‘대고려 수군원수(大高麗水軍元帥) 태대사자(太大使者) 연수영(淵秀英)’이라고 쓴 커다란 노란색의 대장기와 ‘검도수검(劍道收劍) 적침분멸(敵侵焚滅) 지란지과(止亂止戈)’라고 쓴 붉은색 군기가 높이 걸려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그리고 갑판의 고물과 이물에도 ‘고(高)’자와 ‘연(淵)’자, ‘수(水)’자 등을 쓴 사각형과 삼각형의 대소 군기(軍旗)가 천하무적 고구려군의 상징인 삼족오 깃발들과 나란히 펄럭이고 있었다.
“고구려의 용맹스러운 수군 장졸들은 잘 들어라! 이제부터 우리는 적 수군의 근거지인 봉래포를 칠 것이다. 나는 그대들 그 누구에게도 승리의 사치를 허락할 의사가 없다. 우리는 작년에 요동이 쑥대밭이 되어 수만의 백성들이 당적의 칼날 아래 피를 뿌렸을 때 그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므로 어찌 나와 그대들이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침략자에 대한 가혹한 응징만이 남은 지금 우리는 모두 죄인의 모습으로 전장에 나갈 것이며, 또한 내 조국의 백성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 울분에 찬 한을 담아 전장에 나설 것이다! 우리가 봉래포의 적군을 무찌르고 다시 이곳 비사성으로 돌아올 때는 이 나라 만백성의 자랑이 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또한 이 나라의 진정한 전사들로 다시 태어나 당당하게 개선할 것이다!”
5만여명의 병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일제히 병장기(兵仗器)를 하늘 높이 치켜올리며 함성을 질러댔다.
그때 당 수군의 본진이 있는 봉래포에서는 장량이 다시 수군총관으로 기용되어 8만의 병력과 1천여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태종은 장문간을 처형한 뒤 마땅한 인재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할 수 없이 구관이 명관은 아니었지만 장량(張亮)에게 다시 수군의 지휘권을 맡겼던 것이다. 장량 휘하에는 정명진(程名瑨)·설만철(薛萬徹)·장금수(張金樹)·구행엄·강행본(姜行本)·유탁설(劉託卨)·한광치(韓洸治) 등이 부관으로 있었다. 유탁설과 한광치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연수영에게 요동 방면의 해상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있는 유경험자였다.
연수영의 함대는 비사성을 출발하여 일단 묘도에 주둔했다. 묘도군도는 오호도·대흑산도·소흑산도·대흠도·소흠도·남황성도·북황성·대사도·구음도·유도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요동반도 비사성에서 산동반도 동래로 건너갈 수 있는 중간 거점이었다. 특히 오호도에는 당나라의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진장(鎭將)의 직책으로 수비하는 군창(軍倉)이 있었다.
그 무렵 연수영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묘도에 주둔하면서 연수영은 몸을 추스르는 한편, 다음 작전을 위해 부지런히 탐망선을 보내 봉래포의 적정을 파악하도록 했다. 연수영의 건강이 악화된 것은 계속된 전투의 피로가 누적된 탓도 있었지만 보다 직접적 원인은 지난번 장산군도해전과 비사성 서구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이 아직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번 몸이 아프게 되자 자주 피로해지고 전에 없이 하혈도 자주 했다.
1월 29일 묘도에 도착한 연수영은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다가 그만 쓰러져버렸다. 그렇게 하여 열흘 동안이나 심하게 앓았다. 그녀가 가까스로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나 출전한 때는 2월 11일이었다. 연수영의 본군이 출전한 묘도군도에는 비사성에서 군사 1만여명과 군선 1백여척을 거느리고 건너온 후위장 안고(安固)가 맡아서 배후를 지키기로 하였다.
이렇게 출전한 고구려 수군의 규모는 여당전쟁만이 아니라 건국 이래 최대 규모였다. 연수영의 동래 원정 이전에는 264년 전인 서력 392년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 친히 5백척의 함선에 5만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황해를 남하하여 미추홀(彌鄒忽)에 상륙, 백제의 40여개 성을 정벌한 것이 최대 규모였다.
당 수군의 총사령관인 장량은 고구려 수군이 항진해온다는 보고를 받고 즉각 함대를 등주와 내주 방면에 배치시킨 후 총 8만의 수륙군을 동원하여 봉래포 사수에 나섰다.
2월 12일. 고구려 수군은 마침내 봉래포 앞바다에 진입해서 당군 선단과 대치했다. 9백여척의 당군 함대는 이자방진을 펼치고 있었으며, 5백여척의 고구려군 함대는 추행진을 형성하여 쇠뇌와 포거를 발사할 준비를 마쳤다.
참좌현달(參佐顯達) 유도려(柳道餘)는 연수영의 대장선 좌우에 각 5척의 대선을 근접 배치하여 적선의 돌격에 대비하도록 했고, 대장선 지휘대 주변에도 해란봉 등 다섯명의 친위 낭자군 외에 40여명의 특수 정예병을 배치했다. 연수영은 포구 앞에 밀집한 당군 함대를 보자 장운형의 전위함대에게 선제공격을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선봉을 맡은 장운형은 40여척의 대선, 1백여척의 전위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고구려의 선봉함대가 돌진하자 유효사거리에 접근하지도 않았는데 겁을 먹은 당군 장수들은 다급하게 발포명령을 내렸다. 선봉함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하며 장운형이 사격명령을 내렸다.
“화토병(火土甁)과 창뢰(槍雷)를 쟁여 방포(放砲)하라!”
노포수들이 즉각 노포를 발사했다. 돌덩이와 화토병에 이어 가공할 무기인 창뢰가 무서운 파공음을 남기며 적선으로 날아갔다. 길이 6장이 넘는 창뢰에 직격당한 당군 함선은 쫙쫙 갈라지고 우지끈 뚝딱!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면에 맞은 군졸들이 여기저기에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런 모습을 누선 위에서 바라본 장량이 마구 악을 썼다.
“쇠뇌를 쏴라! 빨이 응전하라!”
당 수군 병사들은 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쇠뇌를 당겨 수많은 화살을 퍼부었지만 고구려군의 전함은 훨씬 더 튼튼한데다 방패수들이 키보다 더 큰 방패로 위와 앞을 가리고 있으니 좀처럼 타격을 가할 수 없었다. 장운형의 선봉함대는 당군 함선과 마주치자 즉각 도선(渡船)을 시도했다. 연수영은 아직도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독전했다.
“좌군과 우군은 돌격하라!”
시간이 흐를수록 당군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미 1백여척의 전함이 깨지고 부서지고 불에 타서 가라앉았다. 게다가 풍향과 조류가 고구려군에게 유리한 만금(滿今)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군 입장에서는 조금(潮今)의 상태가 되어야 수비하기에 안정적이지만 바닷물이 꽉 들어차 있는 만금이 일어나니 조류(潮流)가 고구려군이 공격하는 방향으로 흘러 매우 불리했다. 연수영이 2월 12일을 최종적인 출전 날짜로 택한 것은 충분한 탐망을 토대로 조류와 풍화를 깊이 연구했기 때문이었다. 연수영은 해양학적인 지식까지 겸비하고 있는 그야말로 ‘바다의 여왕’이었던 셈이다.
전세가 당군에게 완전히 불리하게 돌아가자 장량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연수영이 해란봉의 부축을 받으며 바라보니 선봉장 장운형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적군의 누선에 널판을 대고 도선하는 모습이 보였다.
“장운형 장군을 지원하라!”
선봉함대의 나머지 전선들이 적선들을 잡는 대로 도선했다. 바다 위 곳곳에서, 전함마다 치열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쇠가 쇠를 먹고 피가 피를 부르는 처절한 백병전이었다.
“안되겠다. 화공(火攻)을 쓰자!”
장량은 최후의 돌파구를 열어보려고 화공을 시도했다. 징발한 민간의 어선 2백여척과 협선 1백여척에 불을 붙여 고구려군 함대 쪽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의 여왕’ 연수영에게 이런 단순한 전법이 통할 리 있겠는가?
“화선(火船)들을 끌어내라!”
중군 함대를 호위하고 있던 쾌속선들이 날쌔게 쫓아나가 불붙은 적선들을 때려 부수어 격침시키거나 쇠갈고리를 걸어 전역(戰域) 밖으로 끌어냈다. 그 바람에 숱한 당나라의 어선과 어민들만 억울하게 수장당하고 말았다. 남은 당군 함대는 뭍에 올라 달아나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물때가 썰물로 바뀌었으므로 강력한 역류와 싸워야 했다. 연수영은 더욱 거세게 적군을 밀어붙였다.
당군의 대선 위에 뛰어오르며 칼날을 번뜩이던 장운형은 장수급으로 보이는 적군 하나를 발견하고 그 자에게 환도(環刀)를 겨누었다. 장운형과 마주친 당장(唐將)은 우수군부총관 유탁설이었다. 장운형은 기합을 지르며 매서운 기세로 환도를 휘둘러 유탁설을 공격했다. 유탁설은 장검(長劍)을 세워 들고 장운형을 맞아 20여합 정도를 주고 받았다. 함상(艦上)에서 벌어지는 두 장수의 치열한 검투(劒鬪)는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물고 뜯으며 다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파고든 장운형이 허공에 슬쩍 칼날을 띄우더니 유탁설의 명치 부분으로 찔러 넣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유탁설은 피할 새도 없이 장운형이 시도한 회심의 일격에 급소를 찔려 절명(絶命)하고 말았다. 유탁설이 장운형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당군 병사들은 지리멸렬해지고 일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장량은 재빨리 대기시켜 둔 협선에 갈아타고 육지로 도주했다. 총사령관이 달아나자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총관의 뒤를 따라 부총관들이, 그 아래 부장과 참좌, 그리고 과의 등 하위급 장수들이 줄줄이 목숨을 건지려고 달아났다.
연수영의 함대는 달아나는 당 수군을 끝까지 쫓아가 맹렬하게 타격했다. 그 바람에 좌수군부총관 강행본마저 고구려군의 쇠뇌에 여러 대의 화살을 맞아 마치 고슴도치처럼 처참하게 죽었다. 그 북새통에도 우진달과 이해안은 70여척의 군선과 7천여명의 수군을 건져서 남쪽으로 패주했다.
연수영은 이미 하달한 작전계획에 따라 장운형·고성운·담열 등 장수들에게 장병 2만명을 거느리고 봉래포에 상륙하도록 지시했다. 상륙부대는 수전과 육전 모두 수행할 수 있도록 훈련이 잘 된, 오늘날의 해병대와 같은 정예군이었다. 그들은 당군의 발악적인 저항을 분쇄하며 2월 17일에는 등주성을, 19일에는 내주성을 각각 함락시켰다. 내주성에서 포로로 잡힌 적장 한광치는 지키는 군사의 눈을 피해 자결을 택했다.
이번 봉래포해전을 통해 연수영의 고구려 수군은 적선 7백여척을 격침시키고 적군 9만여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총관급 대장 3명 외에 부장급 이상 장수만 해도 9명을 죽였다. 그리고 사로잡혀간 고구려 백성 3천여명을 구출했다. 여당전쟁 개전 이래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2월 20일, 등주성에 입성한 연수영은 부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적군의 군수물자를 챙기는 한편, 전사자들은 당군의 유해까지 거두어 위령제(慰靈祭)를 지내도록 했다. 밤이 깊어지자 연수영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성루 위로 올라가 잠시 상념(想念)에 잠겨 있었다. 몸이 불편한 연수영이 걱정되어 해란봉과 고정림이 성청(城廳)으로 들어가 그만 쉬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장운형이 연수영 곁으로 와서 쓰러질 듯한 그녀의 어깨를 잡아 부축한다.
“아픈 몸은 침상에 누워 편히 쉬게 해야 한시라도 더 빨리 낫는 법입니다. 날도 추운데 여기서 힘들게 서서 뭘 바라보시는 겁니까?”
연수영은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밤하늘 아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나는 저 바다에 익숙해진 듯 하오. 불과 몇 년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 저 바다에서는 수많은 일이 일어났었지요. 하지만 너무 고요하지 않습니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이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일어났었는데……. 언젠가 내 시신을 집어 넣기에 참으로 좋은 곳이라고 여겨지네요. 언제나 지고지순한 그 모습 그대로 있을테니까.”
장운형은 고개를 저으며 연수영을 마주보았다.
“연 장군, 저희들보다 먼저 저 세상에 가시지는 마십시오. 저희들이 장군을 못 보냅니다.”
장운형은 연수영의 몸을 등에 업고 처소로 걸어갔다. 해란봉과 고정림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