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이 주축이 되서 세운나라 vs 일제친일파 앞잡이들이 세운나라
대한민국 vs 듣보잡....
밑에 내가 군미필이라는 글과함꼐 ^ ^ 고맙다 시민권자 ㅋㅋ
암튼 그러한 애들의 리플과 글을 읽으면서 충격적인 리플 한개를 보게 되었어..
음 많은 알지롱거들이 좌익과 보수우익의 차이점을 말해보라고 내게 질문을 했어
그리고 나는 내가 이제 까지 올린 자료를 보고도 정체성의 궁금증 을 가지냐고 반문했지.
그러던도중에 충격적인 리플과 함께 이것이 좌익과 보수우익의 시작점 즉 생각이 틀려지는 지점이라고 설명하고싶어
먼저 보수우익은 대한민국을 독립군이 세운나라라고 생각하고있지
하지만 우리의 빨갱이 열사분들은 온갖 유언비어 혹은 있지도 안은 말을 지어내서
오늘도 독립선언문의 민족지도자 동상을 철거하라고 난리지..
빨갱이 혹은 좌익들은 왜 친일파를 갖고 물고늘어질까?
그애들말을 들어보면 대한민국은 친일파가 세운나라이고 정통성이 없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북한은 친일청산을 완벽 하게 했다고 말을 하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겠어?
자그럼 한번 보자 대한민국 건국의 인물들을 그리고
사진들을 보면서 한번쯤 우리 묵념해보자. 대한민국 초대 내각 구성원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황해도 평산 출신
이승만(李承晩, 리승만, 영어: Syng-man Rhee 승만 리[*],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은 조선·대한제국의 근대화 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교육가·언론인·정치인이며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 주석이었다. 처음 이름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황해남도 평산군(平山郡) 출신.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1]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경주 이씨
(삼성 그룹 창업주 이병철 및 현 회장인 이건희 회장과 같은 본관. 출생은 서울)
이시영(李始榮, 문화어:리시영, 1868년 12월 3일 한성부 ~ 1953년 4월 19일 부산)은 조선,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 정치인이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 부제조, 상의원 부제조 등을 지냈다. 한일합방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이후 귀국,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임정 요인이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는 단정론에 참여하였다. 1948년 7월 24일부터 1951년 5월 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후손으로, 영조 때의 정승 이종성의 5대손이었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과 동래 정씨(東萊鄭氏)의 아들이며, 이건영(李健榮), 이석영(李石榮), 이철영(李哲榮), 이회영(李會榮)의 동생이자 이소영(李韶榮), 이호영(李護榮)의 형이었다. 본관은 경주로, 자(字)는 성흡(城翕), 성옹(聖翁)[1],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사위이다.[1]
*국무총리*국방장관-이범석(李範奭,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李範奭,리범석, 1900년 10월 20일 - 1972년 5월 1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등지에서 항일독립활동을 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 김좌진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뒤 소련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 광복군의 중장으로 광복군 참모장과 제2지대장 등을 지냈다. 1945년 귀국을 시도했다가 강제로 상해로 되돌려보내졌고 1946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호상과 함께 조선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반공주의 정치 활동을 하였다. 김구의 남북협상에 반대하여 이승만에 협력, 단정 수립에 동참하여 1948년 7월 31일 부터 1950년 4월 20일까지 제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하였고 8월 15일부터는 국방부 장관도 겸임하였다. 이후 주중국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1952년 제2대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고, 1956년 제3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이승만의 견제로 낙선하였다. 1960년 이후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탈당,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초기 나치스 연구자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의 17대손이며 이문하의 아들이다. 아호는 철기(鐵驥)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왕운산(王雲山), 인남(麟男), 철기(哲琦), 이국근(李國根)[1], 이국진(李國鎭)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경성부 출생.
국회의장 신익희(申翼熙) -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경기도 광주 출생
신익희(申翼熙, 1892년 6월 9일 - 1956년 5월 5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정치인이다. 중국의 군인으로도 있었다. 중화민국 육군 중장, 대학 교수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임정 초대 법무부 차장, 외무부 차장, 내무부장 등을 지냈고 1945년 귀국 후 반탁운동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론에 반대하여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참여했다.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 총선거에 당선되어 제1대,2대,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8년 7월에는 초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직을 계승했다. 국민대학(현 국민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며, 초대학장을 지냈다. 자(字)는 여구(如耉), 호는 해공(海公). 별칭으로는 중국에 체류 중 사용한 가명인 왕방평(王邦平)[2] 또는 왕해공(王海公)[3], 왕방우(王邦牛) 등이 있다. 경기도 광주시 출신.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
항일변호사-전라북도 순창 출생.-울산김씨 본관으로서, 하서 김인후의 후손. 김성수, 김연수와도 동본임.) 김병로(金炳魯, 1887년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이며,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호는 가인(街人)이다. 본관은 울산이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민족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여 이인,허헌과 더불어 대표적인 3대 인권변호사였다. 신간회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한민당의 정책노선에 반발하여 1946년 10월에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협상 참여하였다. 후에 분단의 현실을 느껴 노선을 선회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반민특위 재판 등을 주관하였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시절에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등을 주장하였으며 이승만 정권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고, 이승만·박정희 정부 때에는 야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조선 말에 정언을 지낸 김상희(金相熹)의 아들로,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5대손이다.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
외무장관 장택상(張澤相)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경상북도 칠곡 출생.
장택상(張澤相,1893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칠곡군 ~ 1969년 8월 1일 서울특별시[1])은 일제 강점기의 금융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인·경찰관·외교관·서예가이다. 일제 강점기 해외 유학,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소련 등을 거쳐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에 유학하다 귀국, 국내에서는 청구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경기도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공산당원과 남로당 탄압을 주도하였으며, 해방정국에서 10차례나 테러를 당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제5차·제6차 UN총회의 대표단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2년 5월부터 7월 무렵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부산정치파동에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을 역임하였다.
내무 장관 윤치영(尹致暎, 일본식 이름: 이토 치에이(伊東致映)[5], 영문명:Yun Tchi-Young,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교육자, 외교관이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이승만(李承晩)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친일 의혹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임정 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9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이승만의 비서이자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에게 무솔리니, 케말 파샤 등에 비견하며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뒤에는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6]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56년과 1960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재무장관 김도연(金度演) -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경기도 김포 김도연(金度演, 1894년 6월 16일 ~ 1967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이다. 1919년 2·8 독립선언 당시 11명의 대표 중 한 사람이다. 유학 후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광복 직후 한민당 창설에 참여하였고,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정부수립 이후 제1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 입법선거 때에는 서대문구에 한민당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재경분과 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이후 제헌(서대문, 한국민주당), 제3대(서대문갑, 민주국민당), 제4대(서대문갑, 민주당), 제5대(서대문갑, 민주당), 제6대(전국, 자유민주당), 제7대(전국, 신민당)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민주당 창설에 참여하여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제2공화국 당시 국무총리에 두 번 지명되었으나 인준부결되었고, 군사 정권에서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약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 한민당 출신 유일한 초대 내각 입각자이기도 하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호는 상산(常山). 경기도 김포 출신.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 1896년 10월 26일(음력 9월 20일) ~ 1979년 4월 5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법률가, 정치인이다. 일본 유학 후,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 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등과 함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절하였고, 해방 후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에 가담하였다.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반민특위 위원장,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원과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제1공화국 붕괴 이후에는 군사정권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야당 원로로서 범 야당통합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임명되었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국토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했다. 자(字)는 자옥(子玉), 아호는 애산(愛山)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대구광역시 출신.
문교장관 안호상(安浩相)-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안호상(安浩相, 1902년 1월 23일 ~ 1999년 2월 21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호는 한뫼이고,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종교에 입문하였다. 1924년 중국 상하이 퉁지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하고, 1929년 독일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있을 때 시인 모윤숙(毛允淑)과 결혼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병중이라 체포는 면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전조선문필가협회(全朝鮮文筆家協會)의 학술분과위원장과 조선민족청년단의 부단장을 맡았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문교부장관이 되어 홍익인간의 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이념을 내세워 초기 한국교육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1960년에는 참의원을 지내고, 1976년에는 유봉영(劉鳳榮)·박창암(朴蒼岩) 등과 함께 국사찾기협의회를 조직하였다. 1992년 대종교의 최고지도자인 총전교에 올랐다. 1994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저서로 《철학강론》(1933 )《민주적 민족론》(1961)《배달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1964)《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1979 ) 등이 있다.
농림장관 조봉암(曺奉岩)-
인천 강화 출생 본관 창녕(昌寧). 호 죽산(竹山). 인천 강화(江華)출생. 강화에서 보통학교와 농업학교를 졸업, 군청에서 일하다가 상경하여 YMCA 중학부에서 1년간 수학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1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 주오[中央]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참여하여 사회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2년간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勞農總聯盟朝鮮總同盟)을 조직하여 문화부책(文化部責)으로 활약하다가 상하이에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ML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8 ·15광복으로 출감, 인천에서 치안유지회·건국준비위원회·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하였다. 1946년 박헌영(朴憲永)에게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진영으로 급선회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초대 농림부장관이 되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52년 제2대 대통령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 1956년 다시 제3대 대통령에 출마하였으나 낙선되었다. 그 해 진보당(進步黨)을 창당, 위원장이 되어 정당활동을 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59년에 처형되었다.
상공장관 임영신(任永信) -
독립운동가이고 교육가-충남 금산 출생 임영신(任永信, 1899년 11월 20일 금산 - 1977년 2월 17일 서울)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및 정치인이다. 그녀는 소극적이나마 친일 활동을 했다고 비판받지만, 교육활동 외에 독립운동에도 종사하였으며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됐고 1949년에는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가하였다가 이승만정권 붕괴후 야당으로 활동했다. 기타 중앙전문학교 학장과 중앙대학장, 시민사회단체 활동 등을 하다가1963년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정치인 유진산과는 동향이다. 호는 승당(承堂), 충청남도 금산군 출신.
사회장관 전진한(錢鎭漢) -
일제시대에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강원도 고성 경상북도 문경(聞慶)출생. 1928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경제과를 졸업하고, 1945년 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 위원장이 되고, 1946년 민족통일총본부 노동부장이 되었다. 대한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그 해 새로 발족한 정부의 초대 사회부장관에 발탁되었다.
사진을 구할수가없어서 자제분의 사진을 올립니다.
교통장관 민희식(閔熙植) -교통전문가-출생지 파악 안됨. 후임인 허정씨는 부산 출생이자, 독립운동가였음.
체신장관 윤석구(尹錫龜) -교육 사회운동가-충남 서천군 출생
윤석구(尹錫龜, 1892년 3월 15일 서천 ~ 1950년 9월)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한국전쟁 때 피살당하였다.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 334번지 태생이다. 영국 선교사가 세운 한영학교를 수석졸업, 한영학교 교사로 재직해오다 1913년 중국 만주지방에서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일본군에 대항하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던 윤석구는 황포 군관학교 2기로 졸업하면서 김구의 명령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조직인 임시정부 삼수지국에 임명된다. 삼수지국은 이미 독립협회의 밀파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윤석구가 삼수군(三水郡,옛 만주부근)으로 내려와 활동하는 동안 강일기,박기춘 두 명은 물론 주민에게 음과 양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자주정신을 배양케 해 민족항쟁의 정신적 토대를 이룬 곳이다. 이후 윤석구는 1922년 상하이 임시정부 국내 자금책에 임명돼 국내로 복귀, 군산 멜볼딘여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계속해서 군자금을 보냈다.
국회부의장 김동원(金東元)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출신-서울 출생 김동원(金東元, 일본명:金岡東元, 1884년 ~ 1951년 3월 20일[1])은 구한말기 애국계몽운동가, 일제강점기 교육인, 사업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구한말기 교사로 지내면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평양YMCA 지회등 활동하여 민족주의자로 교육활동 및 사회활동등 전개하여 실력양성 및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전시체제)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로 친일파로 변절했다. 광복 이후 고당 조만식과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 활동했으나, 곧바로 월남하여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
이 분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경남 기장(현 부산 기장)군 출생. 김약수(金若水, 1890년 10월 21일 ~ 1964년 1월 10일)는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이며,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주의단체조직과 항일활동을 하다가 해방뒤에는 한민당 조직에 가담했으나, 한민당 정치노선에 싫증을 느껴 1946년 10월 탈당. 김규식계열 정치노선에 활동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제헌국회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나 뒤에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한국전쟁 중 조선인민군에 납치되었다. 경남 동래군 출신. 본명은 김두전.

김병연 초대 총무처장
항일 독립운동가. 간도 군관학교에서 활약하였으며, 철혈청년단(鐵血靑年團)· 흥사단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8· 15광복 후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총무처장, 이북 도청의 평안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초대 공보처장김동성(金東成) 1890∼1969.
언론인·정치인. 호는 천리구(千里駒). 경기도 개성출신. 1908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에 유학하여 수학하였으며, 귀국한 뒤 1920년 4월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21년에 동아일보 제2대조사부장이 되었으며, 1924년 5월에 이 회사를 퇴사하였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일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활약하였고,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에 민원식(閔援植)·남상일(南相一)·남정린(南廷麟) 등과 합동통신사를 설립하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합동통신사 제3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그뒤 1964년까지 고문직에 있었다. 또한, 언론계뿐만 아니라 관계로 진출하여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공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에 제2대민의원에 당선됨으로써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에는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60년에 민의원 사무처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뒤 민주공화당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으로보다는 언론인으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20년 8월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각국을 순방중이던 미국국회의원시찰단을 우리나라에 유치하여 일제 식민치하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1921년 10월에 미국 하와이에서 열린 제2차만국기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부의장에 피선되었으며, 같은해 11월에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군축회의에 한국기자로는 최초로 참석하여 취재활동을 폈다.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해외특파원, 국제기자대회 최초의 참석자, 최초의 군정청 여권소지자, 맥아더(MacArthur, D.)를 회견한 최초의 한국기자 등 언론인으로서 최초의 기록을 많이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 언론인이며 문필가로서 《신문학》·《중남미기행 中南美紀行》·《한영사전》·《열국지 列國誌》·《삼국지》·《그레이트 칸》·《중국문화사》 등의 저서를 남겼다. 특히, 1924년에 펴낸 《신문학》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학 이론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래도 대한민국이 친일파가 세운나라야?
과연 누가 정통성 있는 나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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