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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주의] 사람에게 사람고기를 먹인 일본군. 비위 좋은 분 아니면 보지마세요.

21녀 |2013.04.05 21:23
조회 19,841 |추천 301

 

 

스크롤이 길다고 쭉 내리지마시고 꼭 읽어주셨음 합니다.

밑에 모바일 배려 써놨습니다^^

 

 

 

 

 

 

 

 

 

 

 

--------------------------------------------모바일 배려----------------------------------------

 

 

 

+ 모바일 배려

 

 

 

(사진)
▲위안소에서 도망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정옥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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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자게에서 검색하다가 읽게 되었는데...


정말 뭐라고 형용할수 없는 기분이 드네요....


ㅠㅠ


지금도 저분들은 외로운 싸움을 하고 계시겠지요..ㅠㅠ

 

 

 

 

출저 : 비공개 카페입니다.

 

 

 

 

 

정말 같은 여자로서 정말 심한 분노가 느껴지면서도 한 시대에 살고 있는데 아무 도움을 못 드려서 너무나도 송구하고 죄송하네요...

 


20~30대 젊은 여성 커뮤니티의 한 사람으로서 다같이 할머니 마음만이라도 알아드렸으면 해서 퍼왔습니다.

 

 

우리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으면 똑같은 일을 겪었을 수도 있는거 아닌가요?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것도 여자로서.......
할머니...... 너무 죄송해요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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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행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커다란 피해를 받은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 그 실태조차 거의 알려진 바 없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 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전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19일간 평양에 머물면서 내가 바라던 바를 거의 다 취재할 수 있었다. 전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연행돼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중략)

 

 


 임신하자 낙태시킨다고 자궁 들어내 북한에서 전 일본군 위안부들을 취재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 더욱이 남성으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민족차별과 여성차별 위에 일본군이 만들어낸 종군위안부 제도의 본질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기도 하다. 등의 칼자국을 보여준 분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 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그의 등에는 지금도 선명한 상처가 두곳 남아 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의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란다. 유씨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에서 태어났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의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 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상처가 낫자마자 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였습니다.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속삭이듯 낮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 하고 말하고 그때부터는 내 질문에 거의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인과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는 기분을 뚜렷이 읽을 수 있었다. 이경생(李京生, 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천황폐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루 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 '아직 쓸 만한데' 하는 생각에 자궁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행위는 여성의 존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 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 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 27일, 칼을 찬 군인이 '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판에 너덜거렸다. 그때의 기분을 "하늘과 땅이 온통 뒤집어진 것 같았다." 고 정씨는 표현했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를 먹고 싶어 운다."고 했다. 군인들은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 그리고 나무칼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억지로 마시도록 했다. 정씨는 그때 피살된 여성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꼽으며 한사람씩 짚어나갔다. 중도에서 헛갈리면 다시 처음부터 세어나갔는데 아무리 해도 한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자 몹시 서운해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중대장은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감염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 1일에는 한 여성이 장교가 철봉을 자궁에 꽂아 죽어버렸다. 다음해 2월 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너무나 지독한 일본군의 잔학 행위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질문도 못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놀라운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에 도착. 이듬해 6월 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에 모두 살려주마" 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와 먹물을 바른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의 입 속에 몽둥이를 쑤셔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몸에 걸쳐 새겨졌다.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명을 옮겨 약 두달간 간호해줬다.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하며 의자에 앉아 있는 내 팔을 꽉 쥐며 울부짖듯 소리질렀다.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자신을 극한까지 학대한 일본 병사와 겹쳐보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 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깊숙이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지배의 실태와 천황의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글·사진/이토 타카시 1952년생.

포토저널리스트로 과거에 일본이 행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그리고 현재 일본이 저지르는 지구환경파괴 현황을 아시아 각지에서 널리 취재하고 있다. 아시아의 피해자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8권, 한국에서는 3권(눈빛출판사에서 <종군위안부><사할린 아리랑> 등), 환경에 관한 저서를 일본에서 2권 출판했다. 일본,미국,유럽에서 수십차례의 사진전을 열었으며 96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도 사진전 '깨어진 침묵-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을 열었다. 일본 우익들의 테러 위험에 대한 본인의 우려에 따라 얼굴사진을 싣지않았다.

 

 

 

 

 

 

-------------------------------------------------일본어 버전---------------------------------------

 

 

 

 

 

 

 

偶然に自由掲示板で検索してから読むようになったが...

 

本当に何と形容することができない気がしますね....

 

TT

 

今もあの方たちはさびしい喧嘩をしていらっしゃいます..

 

 

本当に同じな女として本当にひどい怒りが感じられながらも一時代に暮しているのにどんな助けが差し上げる事ができなくてあまりにもおそれおおくてすまない心ですね...

 

 

20‾30代若い女性コミュニティの活動する人として皆お婆さん心だけでも分かって上げたらと思って持って来ました..

 

 

私たちがその時代に生まれたらまったく同じな事を経験することができたかも知れないことではないんでしょうか?

同じ大韓民国国民として..... それも女として.......

お婆さん...... 本当に申し訳ありません TTTTTTT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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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が行った植民地支配から大きな被害を受けた韓国人たちは日本政府と企業を相手でお詫びと賠償を要求している. しかし北朝鮮に住んでいる被害者たちに対しては国際社会にその実態さえよく知られていない.

 

 

 

私は今年 5月から 6月にわたって平壌に 19日間滞留しながら多くの被害者たちを取材した. その中でも日本軍によって性奴隷になった昔の日本軍慰安婦女性たちの証言と彼らの身に深く刻まれた商魂に大きな衝撃を受けた. 19日間平壌に泊まりながら私が望んだことをほとんど取材することができた.私は日本軍慰安婦, 広島と長崎で被爆された人, 強制連行されて重労動に携わった人, 徴兵で軍人や軍属になった人, 仏教徒として弾圧受けた人まで皆 21人に会った.(中略)

 

 

 

姙娠をすれば堕胎させると子宮切り捨てて北朝鮮で昔の日本軍慰安婦たちを取材することは日本人として, なおかつ男性としては非常に当惑な事だった. 彼らは心の傷だけではなくきちんと眺めることができない位の無惨な肉体的傷を持っていた. それは民族差別と女性差別上に日本軍が作り出した従軍慰安婦制度の本質を見せてくれる明確な証拠でもある. などの刻み目を見せてくれた彼女はミャンマーに連行された停訟人(1924年生まれ)さん. "朝鮮人女性 400人の中で半分がシンガポールで下船して残りはラングーンに行きました. 戦争が終わるとひと月もかかってタイまで歩いて来ました. 慰安婦 45人と男性 15人の朝鮮人が 2尺の船に乗って帰国しました. 彼女のなどには今も阿洲鮮明した傷が2ヶ所残っている."とても疲れてこれ以上相手がすると言う事ができないでMaeda中尉が日本刀を抜いて打ち下ろしました. ひどい傷なのに薬一度塗ってくれなくて 2年間や傷が癒えなかったです."

 

 

 

油扇玉さんのお腹には臍上側から下側まで大きくて古い傷があった. 軍医が子宮全部で胎児を持ち出した手術の跡だそうだ.ユさんは 1923年咸境道ギョングフンググンで生まれた.記章ご飯を食事にするほどの貧農だったが, ある日急に現われたMiyamotoが工場の働き口話をしてくれたし, 彼女はついて行った. 他の女性 2人と一緒に引かれて行った所は中国東北地方のモックダンガング. 付いて来たのを後悔した時はもう遅れた. ダケコという名前になった彼女は初めに一日 5‾6名程度, 多い時は 15人の軍人たちととんぼを一緒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気を失ったやっと我に返ればまた軍人たちが襲って来た. 不幸にも姙娠するようになると堕胎かたがた再姙娠防止のために胎児がいる子宮を切り捨てた. 傷が治るやいなやまた軍人たちととんぼを一緒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反抗すれば殺してしまいます. ミスコと呼ばれた少女は首を刀で切ってしまいました. ここにあった 15人位の女性の中で生き残った人は 5‾6人位でした. 祖国が解放された後にも乞食みたいなまたたびをしている途中 1948年 10月に故郷に帰って来ました. 1981年に死亡した夫にも私の体験を最後まで告白しなかったです."してささやくように低い音で話した. "今もぞっとする憎悪心を感じています. 子供を生む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した日本に対して仇を討つ事にだけ沒頭しながら暮して来ました. あの時の軍人を捜し出したら乱切りしてしまいたいです."と言いながらあの時からは私の質問にほとんど答えなかった.

 

 

 

日本人とは会いたくないという気持ちをめっきり読めた. 李京生(1917年生まれ)さんのお腹にもユさんに似ている傷があった. 地主集で働いていた李さんは紐で縛られたまま慶尚南道昌原の軍需工場に引かれて行った. '天皇陛下のために身をささげれば良い待遇を受けることができると言いながら将校が言った. 一日夜に 10‾15人の軍人たちととんぼを一緒に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そして姙娠. 'まだ使うに値するのに' そうだという考えに子宮全部で胎児を持ち出した. "日本のため子供を生むことができなくなりました. 一人でいる時は昔の考えが浮んで涙が出ます. 女性を性慾処理の道具で見て堕胎と不姙手術で子宮まで切り捨てる行為は女性の尊厳を全面的に否定することだから決して許すことができません."

 

 

 

生きた人煮って強制で食べさせたりしたと...鄭玉順さんの記憶は非常にあざやかだった. 彼女は咸鏡南道 豊山郡 把撥里で 1920年 12月 28日生まれた. 1933年 6月 3日井で水をすくっていたが制服を着た男 3人に連行されたし, 引かれて行った擺撥里駐在所でレイプされた. 抵抗している途中目を数えるようになぐられてこの時から左目が徐々に見えなくなった. その後 10日が経って 7‾8人の軍人によってトラックに積まれて 恵山にあった日本軍守備隊に連行された. その所には各地からひかれて来た女性たちがたくさんいた. チョン氏は一日に約 40名もなる軍人たちととんぼをする仕事もあって子宮出血がひどかった.

 

 

 

その年 8月 27日, 刀をさしていた軍人が '軍人 100人でとんぼの可能な女が誰か'と言いながら問った. その時手をあげない 15人の女性は他の女性に対する不服従に対する例示で殺した. 裸にした女性を軍人が頭と足を取って釘を打った板の上に球のように転がした. 分数のように血が湧いたしサルドングイがモッパンに垂れ下がって搖れた. あの時の気持ちを "空と地が引っ繰り返ったようだった." と言いながらチョン氏は表現した. その次に軍人たちはくぎを打った版の上で死んだある女性の首を打って落とした. チョン氏と違う女性たちが泣いていることを見た中隊長は "慰安婦たちが肉を食べたくて泣く."と言った. 軍人たちは死んだ女性の頭を釜に入れて料理した. そして木刀を振り回して彼らに無理やりに飲むようにした. チョン氏はあの時被殺された女性たちの名前を指で数えて行きながら一人ずつ数えて行った. 中間に思い出さなければはじめから数えて行ったがいくら思っても一人の名前が浮び上がらなくて大変名残惜しがった. その守備隊大隊長は 'Nishihara', 中隊長は 'Yamamoto', 所長は 'Ganeyama', 慰安所監督は朝鮮人 '朴'だったと言った.

 

 

 

 

梅毒感染隠したと火に熱した鉄棒を子宮に... 1933年 12月 1日にはある女性が将校が鉄棒を子宮に入れて死んでしまった. 翌年 2月 4日には梅毒にかかった事実を届けなくて将校に病気を移したという理由にある女性が被殺された. 日本軍が火に加熱した鉄棒を子宮に入れたし女は即死した. 抜き出した棒には黒く弾肉が付いていた. あまりにも酷い日本軍の残虐行為に関する話をずっと聞くようになった私は完全に魂が出た. 質問もできなくてため息だけ噴き出した. 驚くべきな話は続いた.

 

 

 

 

恵山の部隊はチョン氏を含んだ女達を導いて中国に移動して台湾で近くにちょっととどまって行って 1935年 9月に広東に到着. 翌年 6月 15日チョン氏を含んで 12人の女性が逃げたが二日後皆つかまってしまった. "逃げようと提案した者を教えてくれれば首謀外に皆いかしてあげる"チョン氏は鉄棒で頭を激しくなぐられた. この時の傷は今も残っている. 次には水拷問であった. ゴムホースを口に入れて水を振り出した. 脹れ上がったお腹の上に板を乗せて軍人たちが立ち上がって板跳びするように走ったし, 口で水がふかれて出た. そんな事が何度か繰り返されながら気を失ってしまった. そしてもっと残忍な行為をした.

 

 

 

 

 

チョン氏と女達の足首を紐で縛って逆にぶら下げておいて針がたくさんバックヒョジョイッヌン黒い棒を持って来て墨汁を塗った後チョン氏と違う女性たちの口の中に棒を入れこんだ. チョン氏は前歯が折れて激しい痛症で気を失った. 入れ墨は全身にかけて刻まれた. 軍人たちははじめから殺すつもりで女性たちに入れ墨をした. 馬車にのせられた女性たちを野に投げ出す姿を遠くから見ていた中国人男が日本人が消えた後, 息が残っていた女二名を移して薬2ヶ月間看病してくれた. チョン氏は奇跡的に生き残ったのだ. "あの時仕事を思えば今も胸が張り裂けるようです." して椅子に座っている私の腕をぎゅっと握りながら泣き叫ぶように大声を出した. 目の前にいる日本人が自分を極限まで虐待した日本兵士と重なって見たことかも知れない. 彼女は入れ墨した自国を見せてくれた. チョン氏が指で裏返して見せた唇内側には鮮かな濃い紫色まだらがあった. 少し薄暗かったが舌にも青っぽいいくつかの点が何箇所あった. 幾多の針で舌を突いたからその後では言ったり困られたし今も完全に治らなかったと言った. など下側は脊椎に付いて丸い点が数珠のようにも描かれていた. 胸と腹部入れ墨を見て我知らず大声を出してしまった. 何を描いたか判別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が子供達落書きみたいな柄がめっきり残っていた. 日本軍人たちは全くその残忍な行為を楽しみながらしたことが明らかだった.

 

 

 

 

内鮮一体を立てながら支配していた朝鮮で日本は若い女性たちを拉致してボロジのようにつぶした. チョン氏の身に深く刻まれた入れ墨はどんな多くの話を聞くよりも日本がやらかした植民地支配の実態と天皇の軍隊の悪辣な本質を明確に見せてくれ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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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きない日本語実力だがまともに見てくれたらと思います.

すべての日本の方がそうではないがこれを見てからも韓国人たちが怒りで作り出した小説だと思いますか?

まだ苦痛に暮していらっしゃる昔の日本軍慰安婦お婆さんたちがいらっしゃいます.

謝りと反省を完全に望むのではないです.

みなさんが間違って分かっている歴史を正しく分かったらと思います.

何人の右翼たちが慰安婦お婆さんたち見て売春婦と言うのがまだ腹立つが!

今でもあなたたちの先祖に対する行動を深く反省して悪口を言わなかったらと思います.

 

スクロールが長いとネリシンブンはまた上がって読んでくださればありがたいです.

 

気持ち悪く見なくて読んでくださればありがたいです.

 

 

 

 

 

일본어를 그렇게 잘하는 편이 아니라 부분부분 틀리부분이 정말 많습니다.

아직도 열폭으로 인한 자작소설이라고 우기는 일부 일본인들에게 이 글을 꼭 보여주고싶네요.

 

 

이런 글을 볼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네요....

 

 

 

 

 

 

(+추가사진

 

 

 

 

 

저 일본군은 뭐가 좋다고 저렇게 활짝 웃는걸까요

 

 

 

 

추천수301
반대수0
베플죄송합니다|2013.04.06 18:41
일본 무시하는 건 전세계에 우리나라밖에 없다지만 우리는 무시하는 게 아니고 증오하는 거다 무시랑 증오는 다르지.. 무시는 있다는 것 자체를 알아주지 않는 거지만 증오는 있음으로 인해서 미치도록 싫어하는 거지. 솔직히 이런 역사가 있고 뻔히 그런 역사의 참혹을 당하신 분이 살아계시는데 자신들의 치부를 들어내기 싫다고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미치도록 싫은 거다. 본보기로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변상이라고 하고 있다. 일본은 잘못을 인정조차 안하는데 한국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할 수 있을까? 있다면 한국사람이 아닌 거지. 나 솔직히 애니보는 건 뭐라고 안하는데 일본 찬양하는 건 토나온다.
베플우리나라만세|2013.04.06 19:09
일본아 너희랑 독일이랑 다른점이 뭔줄아니? 독일은 셀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지금도 그일을 잊지않고 사죄하고있고 학살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얼굴들고 살아갈수도없이 도망다니며 산다더라 국제적으로 사과하고 보상해줘도 잊을수없는일인데 이렇게 뻔뻔하게 부인하고있는 너희 언젠간 할머님들의 고통의 몇배는되는 벌 꼭받을거다 진짜 젊고 좋은 일본인들까지 욕먹이지말고 인정하고 사죄해라
베플잎싹|2013.04.06 19:51
여러분 지금 일본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나이가 드신것을 노려 그분들이 모두 돌아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살아계신 할머니분들이 몇분 안되시구요.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은 시위를 하십니다. 외국인들도 참여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그냥 이렇게 묻어두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바쁘지 않다면 시간을 내어 시위에 참여해 보는 것은 어떨가요. 일본의 악랄한 행동들을 세계에 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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