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혼자 들기에는 버겁다고 생각할 정도의 80리터짜리 백팩과 양손에 쥔 등산스틱 2개.
든든하던 가로등이 끝나고 '차량 통제구역' 글귀가 적혀있는 임도(林道)로 접어 들었다.
헤드랜턴이 내 발앞만을 비추고 있음에 왠지모를 중압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배낭에 매달린 달그락 거리는 스텐컵소리를 친구삼아, 그렇게 지독하게도 고요한 임도를 1시간이 넘도록
오르고 또 올랐다. 애초에 두렵다고 생각했다면 시작하지 못했을 '오지캠핑' 차츰 고도가 높아지자,
멀리 있던 보름달이 생각보다 가까운곳에서 나타난다.
'제법 싸늘하네...'
문득 가방안에 넣고온 3계절 침낭이 혹시 춥진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바람도 없고, 월광에 어렴풋보이는 산길.
그 고요한 산길을 나홀로 걷고 있자니 왠지 이 산의 주인공이 된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
'힘든 일주일이었다...'
생각이 실제로 말로 나오는걸 보니, 지금 이 고요함이 조금은 두려운 것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에 어느덧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나기 시작했고, 목적지로 생각했던 자작나무 숲에
들어섰다. 자작나무의 하얀몸통을 검은 숲속에서 월광이 비추며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파도소리와 같은 자작나무 잎들이 바람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두려움보다는 상쾌함이
더 먼저 느껴지는터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0시 33분'
예상보다 30분이 더 넘게 걸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래도 아직 헤드렌턴에게만 의지하고 걸어가는것이 생각보다 쉬운일은 아니었기 때문일것이다.
마침 자작나무가 없이 바로 하늘을 볼수 있는 좋은 장소가 있길래 부랴부랴 작은 텐트를 치고는 짐을
풀어 놓는다. 작은 베터리 렌턴을 켜놓고는 커피와 가방속에 넣어두었던 빵을 꺼내서 씹기 시작했다.
별다른 맛은 없었지만, 땀이 식으면서 몸이 으슬으슬 추웠는데, 커피는 그런 내몸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커피를 마시며 후레쉬를 들고는 주변을 쭉 둘러봤다.
오지를 찾아왔지만, 정말 주위에는 민가도, 인적도, 동물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말그대로 고요와 정적, 그리고 나의 핸드폰에서 나오는 빌에반스의 "someday my prince will come" 만이
그 어두운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
너무 어두워서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못한채 주섬 주섬 주변을 정리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정상등반을 해야하기 떄문이었다.
텐트가 1인용의 알파인텐트라 침낭과 귀중품이 들어가면 왠만한 것들은 밖에 잘 두고 자야한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코펠이랑, 침낭속에 넣을 이너(얇은 담요와 같은..)들을 나무와 나무사이에 탄성끈을
치고는 비너로 걸어두었다. 혹시 바닥에 두었다가 짐승들이 건드리거나 가져갈 수 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엄지 손가락만한 베터리렌턴이 없었다면, 텐트안은 마치 관속과 같았을 것이다.
(*실제로 드라큘라 영화에서 나오는 관모양과 텐트는 흡사하다.)
별로 한기는 느끼지 못했지만 가끔 렌턴이 침낭에 가려질때는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찾아오곤
했다. 몸을 뒤척거려 시간을 보니 11시 30분을 향해가는 시간. 잠을 자야했다.
렌턴을 끄자 주변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내가 텐트 안에 있는지 혹은 그냥 어두운 산속에 누워있는지는 육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의
어둠이었다. 침낭속으로 잘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주변에 나뭇잎이 움직이는 소리.
가지들이 부대끼는 소리가, 밤이라 그런지 마치 내 귀옆에서 들리는듯한 착각이 든다.
위치와 장소가 그래서인지..
즐거운 생각보단 조금은 무섭고 음침한 생각이 든다.
문득, 어린시절 밤에 자리에 누으면 항상 하던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 생각...아니 상상은 이렇다.
눈을 감고(지금처럼 어둡다면 굳이 감지 않아도 좋겠다.)
구체적인 먼 장소를 생각한다. 본인 가봤던 장소일수도 있고, 어딘가에서 본 장소일수도 있다.
그때 난 구 서울역의 남루한 구석을 상상했던거 같다.
구체적으로 그 장소를 생각했다면, 이제 본인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본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를
떠올려 내야한다. 그것은 형태를 가진 귀신일 수도 있고, 형태가 모호한 무엇 일수도 있다.
난 검은 한복을 차려입은 장신의 여자를 상상했던거 같다.
비록 단정하게 쪽진머리가 헝클어져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순 없지만,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검푸른 빛이며, 이유없이 히죽거리는 그 입술은 날카로운
빨간색을 칠한 키가 큰 여인. 미동도 없이 있지만, 헝크러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눈은 나를 보고
있는데 확실하다. 이제 그런 존재를 구체화 했다면, 실제 자기의 위치를 그려보라.
침낭속에 있다면 그 모습을 3인칭 시점으로 상상해보고, 거실에서 어두운 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런
모습들을 상상하라. 그리곤 그 존재를 서서히 처음 생각했던 장소에서 나와 가까운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좋다. 중간에 몇단계를 거쳐도 좋고, 그 속도를 빠르거나 느려도 좋다.
그 대신 선명하게 구체화 해야한다. 사진을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서울역에서의 검은 한복의 여자를 생각했다면,
다음은 춘천댐 근처에서 그녀를 그려보고,
다음은 내가 내린 어두컴컴한 버스정류장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내가 걸어온 어두운 산길을 걸어오는 그 존재의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머리는 치렁치렁 해지고, 한복은 젖어서 흉하더라도 나를 지켜보는 그 눈빛은
변함이 없으며, 계속적으로 히죽거리고 있는 그 붉은 입술도 선명하게 구체화 시켜야한다.
그리곤 자작나무숲 입구에서 내 텐트쪽을 한참동안 바라보는 그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곤 조금씩.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오는 그 존재.
상상조차 힘든 그 두렵고 흉한 모습이 거의 내 텐트까지 왔다고 생각할때.
"톡"
.
.
"톡"
텐트위로 물이 떨어진다.
내 왼쪽 귀에서 불과 20c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퉁퉁부은 그 검은한복의 발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비를 맞고 날 찾아온 그 다리에선 한복을 타고 흐르는 물들이 계속적으로 흐르고
텐트옆에서 그 장신의 검은 한복은 한참동안이나 무서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비록 텐트안이지만, 눈을 뜨지 못할 정도의 극한의 두려움과 무서움이 엄습한다.
손가락이라도 잘못 움직이는 날엔 내 작은 텐트속으로 그 흉한 얼굴이 들어올거 같은 두려움에
식은땀이 난다.
'똑"
"똑"
나무에서 떨어지는지.
검은 한복을 입은 그녀의 머리끝에서 떨어지는지 알수 없는 물방울이 내 얼굴위쪽 텐트 지붕으로
하염없이 떨어진다.
"똑...똑... 똑똑....똑똑....솨..."
소나기가 내린다. 고목처럼 누워있는 나도 빗소리를 신경쓰다 그만 잠들고 말았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에 잠을 깬다.
텐트위로 어른거리는 나무의 그림자들이 상쾌한 아침.
텐트를 열고선 순도 100%의 신선한 산내음을 온몸으로 받는다.
시간을 보니 새벽6시가 훌쩍 넘은 시간.... 마음이 급해온다.
급히 텐트와 주변을 정리하고는 정상을 향해 출발한다. 이미 산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해맞이를 하고
있었고 나도 숙제를 마친기분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어제 올라온 길은 등산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핸드폰으로 사진도 찍어가며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제 내가 밤에 올라온길과는 너무 다른느낌.
어제밤의 고요와 적막함을 생각한다.
자작나무 숲의 몽환스러움..
그리고 퍼뜩 생각나는 한가지.
나무사이에 걸어놓았던 침낭 이너와 코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낭속에 쑤셔넣었다는 것을........
어제밤엔.
분명히 검은 한복의 그녀와 함께
"비" 가 왔는데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