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인생사프리님)
제가읽었던 이야기들중 재미나게 본 이야기입니다.
스크롤 압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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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어쩌면 조금은 초조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져 있어서 주변 시선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정자 양쪽의 가로등이 그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거기엔 하늘하늘한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좌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그녀를 부르며 다가갔다.
“경은 씨!”
내가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어둠속에 묻혀있는 나를 눈을 찡그리며 잠시 바라보더니,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약간 높이가 있는 힐을 신고 갈색의 가죽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머리는 근무 때 꽁꽁 묶어둔 것 때문인지 약간의 웨이브가 되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 말했다.
“저녁 먹었어요?”
“간단히 먹긴 했어요.”
나는 그녀의 대답에 곤란해지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밥을 먹지 않고 퇴근을 하는데, 오늘은 늦게 마감을 해서 그런지 가게에서 챙겨준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밥도 먹지 않고 나왔는데, 계산 착오였다. 내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아직 배고파요.”
우리는 간단하게 술을 마시기로 했다. 이 일대는 전선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은 아는 곳이 있다며 다른 동네로 갔다.
나는 형사시절에 술을 자주 마시러 갔던 먹자골목으로 왔다. 하지만 형사들이 올만한 곳은 가질 않았다.
만약 형사들이 내 얼굴을 본다면 현행범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형사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고 해도 그 중에서 형사들이 꺼려하는 술집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 곳을 골라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점원이 붙어서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처음에 안내해 준 곳은 꽤 트인 곳이라 나는 상대적으로 남들의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술집인데 분위기가 생각보다 화사하네요? 조명이 밝은 것도 아닌데.”
형사나 경찰들이 이 술집을 꺼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 술집은 다른 술집에 비해서 장식이나 흘러나오는 음악이 화사하다.
경찰이나 형사는 범인들을 잡고 상대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풀려면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끄럽게 떠들고 욕설을 뱉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절대 그런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죠? 저도 여기 분위기가 좋아서 자주 왔었어요.”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여기 온 적은 딱 한번 있었다. 그날은 범인을 놓치는 바람에 화가 나있는 상태에서 형식이와 왔었다.
하지만 우리는 술을 한 병만 마시고 나와 버렸다. 그 이후로 이 술집에 오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올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는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드는지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 사이에 메뉴판을 보고 뭘 시킬지 생각했다.
“술은 어떤 거 드세요?”
“소주요.”
그녀가 해맑게 말했지만 나는 걱정이 일었다. 나는 술을 많이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많이 먹을 수도 없었다.
항상 긴장을 해야 하는 처지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소주를 먹는다는데 내가 어떻게 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애써 태연한척하며 소주 안주로 적당히 시켰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술 잘 드세요?”
“못 먹는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요.”
“그렇군요.”
곧 시켰던 음식들이 나왔다. 서로의 잔을 적당하게 채우고 건배를 한 뒤에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씁쓸한 맛을 남기고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갔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비워진 술잔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식사 아직 안하셨죠? 밥이라도 시킬까요?”
“아뇨, 안주로도 충분합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몇 차례 술잔을 나누었다.
그녀는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적이 일었다. 잠시 오가는 말이 없었고 먼저 입을 연건 그녀였다. 그녀는 표정을 정리하고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깐 무슨일 있으셨어요?”
“예? 무슨 일이요?”
“아까 전화하실 때, 목소리가 좋지 않으셔서요.”
나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지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사람을 죽이고 오는 길이라 우울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고 말했다.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요. 시작한지는 한참 됐는데, 이제 시작이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길 들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내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비록 전부 말하진 않았지만, 나름 속이 후련해 지는 것 같았다. 내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잠시 시무룩해 있더니 다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참, 전에 사장님에 대해서 궁금해 하셨죠?”
“네, 근데 그건 사장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이젠 괜찮을 것 같아서요.”
“뭐가요?”
“사실 사장님이 오늘 갑자기 경호원을 고용하겠다고 하셨거든요.”
“경호원을요?”
나는 그녀의 말에 저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러면 전선기를 미행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상당히 껄끄러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거참 이상한 사람이군요.”
“그러게요. 뭔가 결벽증이 심한 것 같아요.”
그녀는 쉽게 받아들였지만 나로썬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올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나는 혹여나 의심을 받기 전에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했다. 그 이후로는 우리는 잡다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취기가 올라오는지 일어나면서 살짝 비틀거렸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괜찮다고 말을 했지만 똑바로 걷지 못했다.
걷는데 무리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하이힐의 높이 때문에 까딱하다간 발목이 나갈 것 같았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어휴, 괜찮아요.”
그녀는 데려다주겠다는 나의 말을 손을 저으며 극구 사양했지만 막상 택시를 같이 타자, 기분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혹시나 전선기에 대한 말을 할까 그녀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경청했다.
택시에서 내려도 비틀거리는 그녀의 두 팔을 잡고 가볍게 부축해주며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녀는 허리를 직각으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앞으로 넘어지려 했지만 위태위태하게 균형을 잡았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으며 원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돌아가는 길에 전선기의 가게가 보여서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집 쪽으로 걸었다.
요즘엔 지하철 타기가 무서워졌다. 최근에 살인죄까지 추가되는 바람에 얼굴이 꽤나 팔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원룸에 도착한 나는 호흡을 수차례 크게 내쉬어서 술 냄새가 좀 빠지게 하고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어두운 방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꽤 늦게 오네요?”
“어, 그럴 일이 있어서 말이야.”
“뭐야, 술 먹었어요?”
술 냄새를 없앤다고 없앴는데, 냄새가 나긴 나나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희원이는 이미 자고 있는 듯 깃털 같은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쪽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술이 좀 들어가서 그런지 순식간에 잠에 들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는 일은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머릿속에 돌멩이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서주희가 나에게 무슨 액체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일단 나는 아침인사를 건냈다.
“잘 잤어? 빨리 일어났네?”
“누구 때문에 일어나지만 않았으면 더 빨리 일어났을 거예요.”
“미안해.”
“됐고, 이거나 먹어요.”
“뭔데?”
“꿀물.”
꿀물이란 말에 컵을 잡으니 은은한 온기가 손가락 지문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꿀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끈적끈적한 꿀물이 뱃속으로 안가고 머리로 올라가 청소를 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단숨에 한컵을 마시고 가볍게 나오는 트림을 뱉었다.
그리고 버릇처럼 이불에 다시 누웠다. 눈을 감고 있는데 서주희의 한심하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또 자게요?”
내가 아무 말도 않고 누워있자 서주희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 했다.
“곧 6시면 모임 시작할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에 눈이 번뜩 떠졌다. 숙취도 순식간이 사라졌다. 이건 어떤 강력한 꿀물보다 효과적이었다.
나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나왔다. 그리고 어제 걸쳐놓은 양복을 두르고 현관으로 나가서 허겁지겁 구두를 신었다.
그때 서주희가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지, 뒤집게를 들고 나타나 말했다.
“밥은 안 먹어요?”
“늦었어.”
시간을 보니 조금만 서두르면 늦진 않을 것 같았다. 아침이라 뛰어도 땀이 많이 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가볍게 뛰며 모임장소로 움직였다.
장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시계를 보니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것 같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칠복이 아저씨 옆에 앉았다. 곧 형님이 말을 시작했다.
“할 말은 어제 저녁식사 때 다 했어. 혹시나 의견 낼 사람 있어?”
형님의 말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형님은 나를 손가락으로 가르켰고, 나는 자리에 일어나 말했다.
“어제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전선기가 전문 경호원을 고용한답니다.”
내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하나같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형님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이었다.
“괜찮아. 우리가 그놈한테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없어. 그 점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형님은 침착하게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 이후로 어제 일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오갔다.
어제 김경은이 분명 나에게 누군가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늦게 끝났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 소란을 피운 사람들이 여기 있는 노숙인들 이었다. 나는 내심 김경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 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였다. 이미 몇몇 유통업체에는 연락이 닿아서 거래는 곧 끊긴다고 했다.
그리고 몇 명의 노숙인들이 그 근처에서 추태를 부려 사람들의 가게 접근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빠르게 일이 전개되자 진작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모임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맡은일을 하기 위해 움직였고, 형님은 나에게 와서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
“저는...”
“저는 그 종업원이랑 일단 연락을 계속 해볼게요.”
“그래 알았다. 몸조심하고.”
“예.”
일이 이제 막 시작된 상황이라 아직은 전선기가 대처를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일사분란하고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가만히 있을 전선기가 아니라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형님도 할 일이 있다면서 먼저 떠났고, 칠복이 아저씨가 잠시 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칠복이 아저씨는 내 표정이 좀 어두운 걸 알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왜 표정이 그래?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거 아니냐?”
“잘 풀리고 있죠. 생각한 것 보다 훨씬 신속하게 풀리고 있어요.”
“근데 뭐가 걱정이냐?”
칠복이 아저씨가 직접적으로 나에게 물어보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원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만큼 걱정되는 게 많았다.
“항상 절 돕거나 하는 사람은 전선기에게 당했거든요. 그게 좀 마음에 걸려서요.”
“웃기고 자빠졌네.”
“예?”
“니 신세를 좀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라. 니가 누굴 걱정해?”
칠복이 아저씨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을 다 하고는 혀를 차기도 했다.
나는 약간 화가 나서 언성을 살짝 높이며 말했다.
“그럼, 주변 사람들이 저 때문에 다칠지도 모르는데, 걱정이 안 되겠어요?”
내가 다소 공격적인 어투로 이야기를 하였지만 칠복이 아저씨는 여전히 나를 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화딱지가 올라 소리를 지르려는데, 칠복이 아저씨가 맥을 끊으며 말했다.
“그래 만약에 그 전선기란 놈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치자.”
“예.”
나는 화낼 타이밍을 놓쳐버리고, 어쩔 수 없이 칠복이 아저씨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칠복이 아저씨는 나와는 다르게 차분하면서 냉정하였다.
“그럼 여기 노숙인들이 크게 다칠 때까지 널 도와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마도 살짝만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 같으면 꼬리 내리고 그만 둘 거야.”
칠복이 형님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목까지 차오른 분노도 이미 발바닥까지 내려가 버렸다.
칠복이 형님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내가 여기에 들어온 지 몇 년이 된 것도 아니고 이제 몇 달된 신입중의 신입이었다.
게다가 형님의 눈에 띄어 들어오게 되어서 비교적 쉽게 이 모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언제 한번 들은 이야기 인데, 어떤 노숙인은 여기에 들어오기 위해서 근 한 달 동안 형님에게 지극정성이었다고 한다.
아마 누군가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갑자기 시무룩해지자 칠복이 아저씨는 웃으며 말했다.
“자식, 그렇다고 그렇게 기죽을 건 없어.”
“하지만 아저씨 말이 맞아요. 제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을 했네요.”
“그렇지만 반대로도 생각을 해봐.”
“반대로?”
“꽤 많은 사람이 있잖아? 목숨정도는 걸어줄 사람이 있진 않겠냐?”
칠복이 아저씨가 위로 아닌 위로를 해줬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정도로 해줄 사람은 없었다.
나는 애써 웃으며 칠복이 아저씨에게 농담을 했다.
“그렇겠죠? 있겠죠? 험한 꼴 안보이려면 저도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래라.”
칠복이 아저씨와 나는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헤어졌고, 나는 터덜터덜 걸으며 원룸 방향으로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출근에 정신없는 사람들 말고는 딱히 위협이 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조금 정신을 빼고 걸었다.
이렇게 힘이 빠지는 아침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멍하게 걷고 있는데 한쪽에서 갑자기 경찰차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헛숨을 들이키며 경직되어 걸었다. 경찰차는 바로 내 옆으로 3대나 지나갔다.
누군가 나를 주시해서 본다면 의심할 만 했겠지만, 경찰도 바쁜지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3대가 같이 움직이고.”
사이렌을 울리지 않는걸 보니 긴급출동은 아니었지만 정말 십년감수했다. 나는 덕분에 정신을 꽉 움켜쥐고 다시 걸었다.
정말 한시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큰일 날 것 같았다. 원룸에 도착하여 긴장을 풀자 온몸에 땀이 흠뻑 느껴졌다.
갑자기 극도로 긴장을 해서 이렇게 돼버린 것 같았다. 원룸에 들어가자 서주희가 희원이와 같이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희원이가 먼저 반갑게 현관으로 달려왔다.
“어디 갔다 왔어?”
“약속이 있었어. 빨리 일어났네?”
“응!”
나는 희원이의 머리를 웃으며 쓰다듬어주었다. 하지만 서주희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뛰어왔어요?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요?”
“그럴 일이 있었어.”
“얼른 샤워하고 오세요. 밥 차려놨어요.”
“까칠하긴.”
나는 혼잣말로 말하고 씻기 위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땀을 많이 흘려서 혹시나 상처가 덧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딱지는 쉽게 물이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야무지게 앉아있는 딱지를 보고 있자니 손으로 떼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나는 꺼끌꺼끌한 딱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손톱으로 딱지의 끝을 살짝살짝 긁어보았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뚜껑이 열려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떼어냈다간 다시 상처가 덧날지도 모른다. 나는 아쉬운 대로 딱지 주변을 벅벅 긁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며 거울을 슬쩍 보니 몸이 앙상해진 게 보였다.
그동안 잘 먹지 못하고 많이 움직여서 그런지 형사시절에 비해 몸이 말라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샤워를 마쳤다.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나오는데 상이 차려져 있었다.
나는 마침 배고프던 참이라 밥을 우걱우걱 먹고 아쉬운 표정으로 밥그릇을 보고 있는데 서주희가 빨래를 개며 나에게 말했다.
“요즘은 어때요?”
“뭐가?”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 해줬잖아요.”
나는 이미 서주희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알고 있었지만 서주희에게 하고싶진 않았다.
애초에 서주희는 아직도 전선기에 대한 마음이 변치 않은 상태였다.
내 상태가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서주희가 돌발행동을 했다간 일을 망치는 수가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자리에 누우며 말했다.
“별 진전 없어. 어디 있는지도 몰라.”
“어디 있는지 모른 다뇨? 제 집에서 살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얼마 전에 갔는데, 집만 그대로 있고 사람이 왔다간 건 한참 전이라더라.”
나는 능청스럽게 대답을 했다. 이 화제로 계속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간만에 낮잠이나 푹 자고 저녁 모임에 나갔으면 싶었다.
요즘엔 너무 움직임이 많아서 그런지 정수리를 큰 바위가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던 참이다.
나는 바닥이 조금 딱딱해서 이불을 한 겹 깔고 그 위에 누웠다. 내가 눕자마자 서주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자게요?”
“어. 아직 술도 덜 깼고, 잠도 좀 부족한 것 같아서.”
“할 이야기는 그게 끝이에요?”
“미안하다. 알아낸 게 없어.”
“참나, 그동안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서주희가 혼잣말로 툴툴거렸지만 나는 못들은 척 반대로 돌아누웠다.
서늘한 이불에 코를 박고 힘껏 숨을 들이 마시자 서늘한 포근함이 콧속을 맴돌았다.
나는 수면마취를 하는 듯 그대로 바닥에 깔린 이불을 끌어안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나를 툭툭 건드려서 눈을 떠보니 희원이가 젓가락 뒤편으로 내 등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내가 눈을 스르르 뜨자 희원이는 기분좋은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밥 먹어. 점심.”
“점심?”
나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시계를 보니 점심때는 조금 지나있었다.
상에는 밥이 차려져 있었고, 서주희는 한쪽에서 누워있었는데 낮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기지개를 가볍게 켜고 밥상 앞에 앉는데 희원이가 웃고 있었다.
서주희 때문에 크게 웃지도 못해서 작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쿡쿡거리고 있었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왜 웃어?”
“머리 둥둥 떴어. 거미줄 같아.”
희원이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가리켰다. 벽에 걸어진 거울로 내 얼굴을 보니 머리카락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잠을 자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희원이를 따라 웃으며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에 이를 닦기 위해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생각나는게 있어서 희원이에게 물었다.
“양치질 했어?”
희원이는 내 질문에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희원이에게 칫솔을 건네주었다.
희원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억지로 칫솔을 입에 넣고 이를 닦았다.
양치를 끝내고 간만에 여유를 누리며 핸드폰을 보니 김경은에게 전화가 3통 와있었다.
시간을 보니 한번에 3통을 하진 않고 출근시간에 한번, 점심시간에 2번 한 모양이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와서 김경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은 꽤 오랫동안 울렸다.
--선후 씨?
“네, 전화 하셨던데요?”
--네. 오늘 가게에 경찰이 왔었어요. 그래서 잠깐 시간이 나서요.
“경찰이요?”
--경찰도 오고, 갑자기 계약도 다 파기됐다고 하던데요. 사장님도 엄청 화나셨어요.
아까 봤던 경찰차 3대는 어쩌면 전선기의 가게로 간 모양이다. 나는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 더 물어보았다.
“경찰은 왜 온 거에요?”
--가게 주변에서 영업을 방해하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사람들 다 잡아가고 사장님은 파기된 계약 건 때문에 나가셔서 지금은 좀 널널해요.
“그렇군요.”
전선기의 반응이 금방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나타날지는 몰랐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걸 알아채고 먼저 움직이다니, 나도 이대로 집에 있기만 할 순 없었다.
한참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하세요?
“아침 일찍부터 일이 있어서요. 핸드폰을 깜박 집에 놓고 왔는데, 점심먹고 가지러 오는 길이죠.”
--그러시구나.
김경은은 뭔가 할 말이 없는데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마음이 급해진 나는 통화를 끊고자 말했다.
“아직 일이 안 끝나서요. 제가 좀 있다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뭔가 아쉬운 듯 한 김경은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즉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민창수의 양복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요즘은 계속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나는 하늘을 슬쩍 보고 얼른 지하철로 향했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얼마 걸리지 않아서 형님이 있는 곳에 도착을 했다. 형님은 여전히 같은 자세,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형님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님!”
“선후구나?”
형님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눈빛. 나는 보채듯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영업을 방해하던 사람들이 다 경찰한테 잡혀갔데요. 그리고 이미 계약 건 때문에 유통업자들과 접촉하고 있구요. 이러다가...”
“마음이 급한 건 이해한다. 하지만 천천히 기다려 봐.”
“이건 급하고말고 한 게 아니에요. 다 잡혀갔다구요.”
내가 말하는데 형님에게서 전화벨 소리가 났다. 나는 더 쏘아붙이려다가 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형님은 전혀 어색하지 않게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어 받았다.
“여보세요? 네. 내일이요? 그 이야긴 끝난 거 아닙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형님은 누군가 통화를 마치고 나를 바라봤다.
“지금 누구와 통화한지 알겠냐?”
“제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전선기다.”
형님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입을 멍하게 벌리고 형님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형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문득 화가 나서 형님에게 따졌다.
“설마 장난치시는 겁니까?”
“장난?”
“전선기가 형님한테 전화를 왜 하겠어요? 깜박 속을 뻔했네.”
내 말에 형님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나로썬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전선기는 잘 나가는 가게의 사장이다.
형님에게 전화를 걸만한 일이 없었다. 형님은 옆에 있는 박스 하나를 옆에 깔며 말했다.
“일단 앉아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형님의 옆에 앉았다. 형님이 장난으로 이런 말을 할 것 같진 않고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형님은 헛기침으로 잠시 목청을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사람들이 경찰서로 잡혀갈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요? 근데 왜 그런 지시를 한 거예요?”
“어차피 경고 수준으로 끝날 거야.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놈의 혼을 빼놔야 했지.”
“그건 그거고 전선기는 어떻게 된 일이예요?”
“그놈은 약간 완벽주의자 같더군. 결벽증이 있어.”
“그걸 어떻게 아시죠?”
전선기의 그런 면이야 나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면 빠르고 치밀하게 해결하였다.
그 과정에서 소음을 일으키는 요인조차도 애초에 처리를 해버리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완벽한 놈이었다.
“일이 생긴 지 하루 만에 우리 사람들을 잡아버리고, 경호원 고용도 하고, 거래처에 일일이 연락해서 일을 매듭짓고 있어. 날 만나자는 시간도 내일이고.”
“그러니까!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대화가 자꾸 엉뚱한 곳으로 새자 답답해져서 소리치고 말았다.
지하철에서 목소리가 울려 내 귀로 다시 들어오고 나서야 난 실수했다는 걸 알았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형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초초해 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듯 희미하게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형님은 내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리고 말을 했다.
“나도 그 거래처중 하나다.”
어떤 말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내 턱은 자동문이 되어버렸다.
탄성조차 질러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벌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형님은 내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칠복이랑 내일 가기로 했다. 너는 우리를 미행하도록 해.”
“그럼 내일 끝내는 건가요?”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형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그건 아니다. 내일은 가벼운 만남이지만, 일주일 안으로 끝날거야.”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나는 두 주먹으로 애꿎은 바닥만 수없이 내려치는 걸로 만족했다.
하지만 형님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계획대로 된다면 일이 잘 풀리겠지만, 혹시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어. 그땐 우리의 신변도 보장할 수 없어.”
형님의 말에 나는 다시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이 흥분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이번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관여가 된 만큼 더욱 조심해야한다.
“내일 바로 처리할 수 있지 않아요?”
“그놈의 경호원이나 이동 루트를 미리 확인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럼 저는 내일 왜 미행을 하죠?”
“그놈이 빈틈을 노출하면 언제든지 노리기 위해서다.”
형님의 차분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설명을 다 듣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정말 쓸데없이 형님에게 투정부린 것 같아요.”
“됐다. 사람들 보니까 그만둬.”
“예.”
형님은 나에게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었고, 사람들의 눈이 많아서 나는 곧 자리를 떴다. 막상 내일 전선기를 죽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약간 들떴다.
혹시라도 챙길게 있을까 생각을 해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나는 평소에도 긴장하고 다녀서 특별한 건 없었다.
나는 그대로 원룸에 들어갈까 생각을 하다가 아까 김경은과 했던 전화가 생각이 났다.
주변에 인적이 드문 곳을 살펴보다가 적당한 곳에서 전화를 빼들고 김경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가지 않았는데 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접니다. 일 끝나자마자 전화를 했네요.”
--잘 되셨나 봐요? 목소리가 좋은데요?
“귀신같네요. 맞아요. 잘 풀렸어요.”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잠시 정적이 오갔다. 나는 어떤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
“어젠 잘 들어가셨어요?”
나는 그냥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전화기에선 대답이 없었다. 주변의 약간의 잡음이 들리는 걸로 보아서 전화기가 끊긴 건 아니었다.
나는 의아해서 되물었다.
“경은 씨?”
--네? 아, 죄송해요.
“바쁘세요.”
--그게 사실은...
김경은은 잠시 망설이더니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는 전화기로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약간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잘 안 들리는데요? 뭐라구요?”
--사실 어제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이번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말끝은 거의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시뻘개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으며 말했다.
“택시타고 집에 잘 들어가셨어요.”
--지금 웃고 있죠!
분명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김경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삐친건지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았다. 나는 당황해서 손까지 저으며 급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안 웃었어요.”
--알았어요.
목소리는 아직도 미묘하게 달랐지만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웃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은 거기에 사장이 없는 겁니까?"
--네 지금은 안계세요.
우리는 잠시동안 더 이야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분명 어제 만났는데도 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이상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었다. 나는 오랜만에 상당히 충동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신없이 걷고 나서 도착한 곳은 전선기의 가게였다. 주변을 오랜 시간 배회하여 충분히 주변을 살핀 나는 조금 긴장된 상태로 가게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남자 종업원이 나에게 붙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종업원도 인사를 하며 나에게 말했다.
"어떤 제품을 찾으십니까?"
"잠시 돌아다니면서 살펴도 되나요?"
"예. 알겠습니다."
나는 매장을 쭉 한번 훑어보았다. 김경은이 멀리에서 다른 손님을 상대하고 있었다. 주변의 간판을 보니 일식 칼이 많은 곳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근처로 이동을 했고, 종업원도 서둘러 내 뒤를 따랐다.
나는 일부러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그녀의 바로 옆에 있는 칼을 집어들고 종업원에게 물었다.
"이건 어떤 칼인가요?"
"이 칼은..."
종업원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고, 옆에서 내 목소리가 들리자 김경은이 슬쩍 내 쪽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놀란 얼굴로 다시 나를 돌아봤다. 나는 그녀를 힐끗 보고 종업원의 말에 집중했다.
나는 일부러 이것저것 칼을 들어 보이며 시간을 끌었고, 그녀의 손님은 곧 가게를 떠났다.
손님을 배웅하는 걸 마치자마자 그녀는 내 쪽으로 오더니 남자 종업원에게 말했다.
"이 손님은 제가 맡을게요."
"예? 방금까지 하시던데 좀 쉬시지."
"아니에요. 저번에 왔었던 손님이라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게 빠를 거예요."
"정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남자 종업원은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카운터로 돌아갔고 그녀는 조금 새침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뭐에요. 놀랬잖아요. 무슨 일로 온 거에요?"
"그냥 왔습니다. 오늘은 널널하다면서요."
"그래도 온다고 말은 하시지."
"어? 나 그냥 갑니다?"
"누가 가랬어요? 이리로 와요."
그녀는 내 팔을 잡고 한쪽으로 잡아당겼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오고 나니 맨 처음 왔었던 양식칼 코너였다.
보통 일식 종류의 칼이 사람이 많이 몰리는 반면, 양식 칼은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다.
나는 혹시나 전선기가 올지 몰라서 주변의 상황을 놓치지 않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칼 사러 온거 아닌데요?”
“알아요.”
“아는데 왜 여기로 와요?”
“일하는 중인데 사장님 없다고 대놓고 놀 순 없잖아요.”
그녀는 나에게 바로 앞에 보이는 큰 칼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 칼을 집어들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서있자 그녀는 영업용 웃음을 짓고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를 표현하였다.
아마 누군가가 멀리에서 본다면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비출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손짓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일이 진짜 잘 풀렸나봐요.”
“네 잘 풀렸죠. 어떻게 아셨어요?”
손짓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그녀가 좀 적응이 되진 않았지만 나도 조금은 칼을 이리저리 보는 시늉을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칼을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표정이 그래 보여요.”
그녀는 영업용 웃음이 아닌, 진실로 나를 보며 웃었다. 하지만 나는 좀 당황하였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좀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각오를 다지고 왔었다.
이렇게 쉽게 들키게 되니, 내 마음을 알아주어서 고맙기 보다는 조금 답답해졌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더니 다시 말했다.
“기분 나쁘셨어요?”
그녀가 조심스럽게 나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내 얼굴을 만졌다. 내 얼굴이 그렇게 티가 나는 얼굴인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나름대로 잠복도 많이 해보고, 용의자 앞에서 뻔뻔하게 담배를 핀 적도 많았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원래 그렇게 사람 표정을 잘 읽으세요?”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친구들한테 눈치 없다는 소리 많이 들었어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던 그녀는 어느새 다소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다른 칼을 집어 들고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이 칼은 어떨 때 써요?”
“아, 이 칼은...”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기계처럼 멘트를 뽑아냈다. 아무래도 여러 번 연습했던 버릇인 것 같았다.
한참을 주절주절 설명만 하던 그녀는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죄송해요! 맨날 하는 말이다 보니...”
“왜요. 잘 하는데요.”
내가 손뼉을 치며 웃자, 그녀도 잠시 나를 따라 웃었다. 우리들은 그 후로도 잠시 물건을 판매하는 척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다 카운터에서 눈치를 주는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오래 있었네요. 카운터에서 눈치도 주고.”
내 말에 그녀는 왼팔에 차고 있던 시계를 슬쩍 보고 웃었다.
“정말 꽤 오래 있었어요. 곧 마감시간인데요?”
전선기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눈에 띈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는 아쉬워하며 나에게 말했다.
“조심히 가세요. 마중은 못 나갈 것 같아요.”
“마중이라뇨. 일하는 중인데.”
내가 웃으며 말해도 그녀는 계속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끝나고 연락하세요. 집에 바래다 드릴 테니까.”
나는 대답을 듣지 않고 가게를 나섰다. 지난날 들었던 그녀의 우렁찬 형식적인 인사소리가 유리문을 뚫고 들려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걷는데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한 소리 하려던 나는 얼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부딪친 남자의 뒤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남자들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고,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사죄를 했다.
다행이 나와 부딪친 남자는 바쁜지 급하게 가게로 들어갔다.
나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상당히 경직된 몸짓으로 그 주변을 벗어났다. 코너를 2개쯤 돌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전선기가 바쁜 상태가 아니었다면, 조금만 가게에서 늦게 나왔다면 영락없이 마주칠 뻔 했다.
특히나 그 놈의 주변에 있는 경호원은 인상이 험악한 건 물론, 풍채도 상당해서 팔뚝 정도는 쉽게 부셔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전문 경호원이 아닌, 건달 같은 부류로 보였다. 나는 호흡을 몰아쉬며 긴장을 떨쳐버리고 주변에 있는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문득 전선기의 가게에 얼마나 있었는지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김경은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급하게 물었다.
“혹시 주변에 누구 있어요?”
김경은이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대답이 들려왔다.
--아뇨. 아무도 없어요. 방금 가게에서 나왔거든요.
“그렇군요.”
이 말을 듣자마자 안도가 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그녀는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사실은 나오면서 가게 사장님을 봤어요.”
--사장님이요? 그게 왜요?
“그 뒤에 경호원도 있더군요. 근데 아는 사람인줄 알고 깜짝 놀라서요.”
--아닐 거예요. 제가 알기론 그 사람들 전문 경호원이 아니라 업체에서 고용한 사람들이라고 들었어요.
“업체라뇨?”
--그건 자세히 잘 몰라요. 그나저나 저 이제 끝났는데요.
“아, 그렇군요. 항상 보던 곳에서 봅시다.”
--네.
항상 보던 곳은 어느새 아파트에 있는 정자로 굳어졌다. 나로서도 그 편이 좋았다.
일단 가게에서 꽤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무엇보다 외진 곳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먼저 장소에 나가있기로 했다. 저녁이라 그런지 어두운 가로등 불만 정자를 비추고 있었다.
저녁때라 그런지 피곤함이 느껴져서 하품을 하고 있는데 멀리에서 검은 실루엣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쩍 벌어진 입을 강제로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오자마자 웃으며 내게 말했다.
“피곤하세요?”
“아뇨, 심심해서요.”
내가 농담어투로 말을 하자, 그녀는 자신의 눈꺼풀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쌍꺼풀이 심하게 지어졌는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자동으로 손이 눈으로 갔다. 그녀는 내 모습이 웃긴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눈을 힘껏 비비고 나서 여전히 졸리는 눈으로 말했다.
“피곤한 거 맞아요.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셨어요?”
“일단 걸읍시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얼굴이 사정없이 뭉개지며 잠도 어느 정도 깨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내 옆에서 걸으며 나의 말을 기다렸다. 걸어서 그런지 정신이 조금 맑아진 나는 입을 열었다.
“근데, 안혼났어요?”
“혼나다뇨?”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아까 카운터에서 눈치 엄청 주더라고.”
“뭐라고 하긴 했어요.”
“뭐라고?”
내가 되묻자 그녀는 잠시 골똘히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먼저 말했다.
“어설프게 장난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봐요.”
“어떻게 알았어요?”
“얼굴에 다 써있구만 뭘. 장난 칠거라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잠깐 매만져 보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무슨 손님이 그렇게 물어보기만 하고 안사가냐고 그랬어요.”
굳이 장난치지 않더라도 이건 꽤나 웃기는 내용이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지갑을 흔들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한 자루라도 사야하나?”
“일부러 사진 말고 필요하면 사가세요.”
“어? 직원이 판매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어떻게 그래요?”
“첫날엔 사라는 식으로 말했으면서.”
내가 잠깐 그녀를 몰아세우자 그녀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잠깐 동안 그녀의 변명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땐 진짜 손님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손님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보통 손님이 아니에요.”
“그럼 어떤 손님?”
“그건...”
나는 이제 그만하기로 하고 크게 웃었다. 그녀는 나를 잠시 쏘아보더니 같이 미소를 뗬다.
이런 저런 장난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녀는 들어가기 전에 몸을 돌려서 나에게 인사를 했다.
“바래다 주셔서 고마워요.”
“뭘요. 들어가세요.”
나는 손을 흔들며 그녀가 가는 것을 지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소리없이 입만 우물우물 거리고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뭐 하실말 있으세요?”
“아니요!”
나의 물음에 그녀가 과도한 반응을 하자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서둘러 인사를 꾸벅하고는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잠시 생각을 했지만 도저히 뭐가 떠오르진 않는다. 나는 금세 포기를 하고 원룸으로 방향을 잡았다.
여름이 거의 끝이 나는지, 한여름때처럼 덥지는 않았다. 나는 지갑을 슬쩍 열어보았다.
충분한 돈이 있음을 확인한 나는 근처에 보이는 슈퍼에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시선은 TV에 향한 채 무성의하게 인사를 하는 50대로 보이는 여성 주인이 나를 반겼고, 나는 곧바로 아이스크림이 잔뜩 있는 냉장고 앞에 섰다. 냉장고 유리에는 매직으로 써진 할인 가격이 붙어 있었고, 나는 아이스크림 3개를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2000원이요.”
나는 지갑을 열어서 5만원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슈퍼 주인은 지폐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천원짜리 없어요?”
“네.”
전선기에게 훔친 돈들이 모두 5만 원짜리라 천원 지폐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한숨을 푹 내쉬던 가게 주인은 뭐라고 한마디를 더 하려다가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는 가만히 서있는 슈퍼 주인에게 말했다.
“뭐하세요? 거스름돈 남겨주세요.”
“아, 예. 알겠습니다.”
가게 주인은 허겁지겁 금고를 열어 나에게 잔돈을 건네주었다. 나는 받은 돈을 세보지도 않은 채 아이스크림을 들고 슈퍼에서 나왔다.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나오면서 거스름돈을 살펴보니 만 원짜리가 5장이었다.
나는 돌려줄까 생각도 해봤지만, 나오기 전 주인의 태도가 거슬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에 가던 길로 가려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돌아가더라도 골목길로 방향을 잡았다.
막 골목길에 접어드는데, 뒤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렸다. 몸을 잘 숨겨서 소리 났던 방향으로 가보니, 슈퍼 앞에 경찰차가 하나 멈춰있었다.
슈퍼 주인은 주변에 다 들릴정도로 외치고 있었다.
“정말 이에요! 분명 수배서에서 봤던 사람이라니까요!”
“정말 맞아요? 잘못 보신 건 아니고?”
“경찰이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아닙니다. 요즘 따라 봤다는 사람이 계속 나타나는데 실제로 잡히진 않아서요. 충분히 참고하겠습니다. 연락처 좀 적어주시죠.”
“네.”
나는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슬슬 나를 봤다는 목격자가 나타나고 있나보다.
이 반장에게서 연락이 안 오는 걸 보니 저번 통화 이후로 이 반장은 날 도와주는 것을 그만 둔 모양이었다.
나는 주변을 충분히 주의를 하며 원룸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마자 서주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오세요?”
“어.”
나는 서주희의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손에 아이스크림이 든 비닐봉투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조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서주희에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왔어. 먹을래?”
“웬일로 마음에 드네요.”
서주희는 아이스크림을 받고 잠시 바라만 보더니 나에게 짜증나는 투로 말했다.
“뭐에요. 다 녹았잖아요.”
“어?”
나는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어 만져보았다. 비닐 외부에서 만져도 흐물흐물 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스크림은 녹아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오다 보니 아이스크림이 녹는지도 몰랐나보다.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냉장고에 넣어둘게.”
“어쩐지 마음에 드는 짓을 하더라니.”
서주희는 혀까지 차며 나를 타박했다. 나는 짜증이 올라왔지만 내 잘못이라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녹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을 뿐이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갑자기 피곤해져서 자리에 누웠다.
서주희가 그런 나를 보고 말했다.
“벌써 자게요? 시간도 얼마 안됐는데.”
“괜히 피곤하네. 일찍 자야겠어.”
“그러세요.”
희원이는 책을 보며 졸고 있는지 고개가 주기적으로 끄덕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힐끗 보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막상 눈을 감으니 내일 있을 일이 생각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내일을 대충 그려보며 잠을 청했다.
잠이 쉽게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일어나 보니 아침이었다. 일찍 잠들어서 그런지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꽤 이른 아침이라 아직 원룸의 불은 꺼져 있었고, 커튼에서 잔잔하게 푸른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희원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세면을 하고 옷을 갈아 입었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을 나서고, 밝은 곳에서 옷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리고 마스크를 끼고 지하철로 갔다. 아직은 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형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형님은 같은 자리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형님을 툭툭 건드렸다.
“응?”
잠귀가 밝은 편인 형님은 살짝 건드렸는데도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나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짜증을 내며 신문지를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나는 다시 신문지를 내리며 형님에게 말했다.
“미리 계획을 짜놔야죠. 일어나세요.”
내 말에 형님은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약속시간은 11시 반이야. 아직 멀었어.”
“그래도 동선 같은 건 파악해 놔야죠.”
“귀찮은 놈 같으니라고.”
형님은 붕 뜬 머리를 벅벅 긁더니 자리 정리를 했다. 나는 정리를 도와주고 형님의 말을 기다렸다.
형님은 찌그러진 생수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 약속장소로 간다.”
형님은 아직 잠이 오는지 하품을 연거푸 하며 걸었다. 나는 형님의 옆에 꼭 붙어서 걸었다. 문득 형님을 보니 한쪽 손에 검은색 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그건 뭐죠?”
“이거? 옷이야. 사업차 만나는 건데 격식은 갖춰야지.”
형님이 슬쩍 벌려서 봉지안을 보여주었다. 그곳엔 언젠가 원룸 옷장에서 보았던 양복들 중 하나가 들어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형님에게 물었다.
“어제 원룸에 오셨어요?”
“그래. 너 자고 있더라? 넌 많이 자놓고 날 이렇게 깨우는 게 말이 되냐?”
“오신지 몰랐어요.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됐어. 거의 다 왔다.”
약속장소는 형님이 자던 지하철에서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다. 사거리를 끼고 있는 카페였다. 위치 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장소였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람이 많아서 미행하기에는 알맞은 곳이었다. 아직은 아침이라 카페 내부의 불은 꺼져있는 상태였다.
“이런데서 만나시네요? 희한하게.”
“뭐가 희한해?”
“보통 사업일로 만나면 회사 사무실에서 보든가 하잖아요.”
“그럼 다 들키잖아. 내가 사무실이 어디 있냐? 지하철 화장실에서 만날까?”
“그놈 가게에서는 안 해요?”
“내가 뭐 하러 호랑이 굴에 들어가겠냐.”
들어보니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형님도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장소를 정하신 것 같았다. 우리는 간단하게 그 주변을 돌며 전선기의 동선을 체크했다.
오늘은 그냥 탐색전이기 때문에 전선기를 직접적으로 노릴 장소는 찾지 않았고, 혹시라도 일이 잘못 될 경우에 도망칠 길을 알아두었다.
어느 정도 둘러보자 아침 모임 시간이 되어서 우리는 조금 서두르며 장소로 이동했다.
아슬아슬하게 장소에 도착을 했지만 장난 섞인 사람들의 야유가 들렸다.
“에이, 형님 늦으셨어요.”
“이제 오시면 어떡해요?”
항상 일찍 오시던 형님이라 늦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놀리기 바빴다. 하지만 형님이 헛기침을 한번 하니 소란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분위기가 잡히자 형님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경찰서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돌아왔나?”
“네, 어제 저녁 즈음 해서 다 풀려났답니다. 그런데 다시 잡혀가면 이번처럼 끝나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럼 그 정도로 됐어. 영업 방해는 이제 그만 하도록 해.”
형님에 말에 한쪽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어제 끌려갔던 무리 중 한명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놈이 벌써 계약 업체들과 접촉을 시작했답니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마쳤구요.”
“그것도 그 정도면 됐어. 나머진 나한테 맡겨라.”
“예.”
형님은 그동안 지시해 두었던 일들을 모두 거두었다.
물론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선기의 행동이 너무 적극적이라 밀어붙였다간 여러 사람이 다칠 우려가 있었다.
형님은 칠복이 아저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각자의 일을 하도록 말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형님과 칠복이 아저씨는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가는 동안 내가 거듭 물어보았지만 대체 말을 해주질 않았다.
“대체 어딜 가는 거예요?”
“따라오기나 해. 가보면 알아.”
칠복이 아저씨가 귀찮다는 듯 한가지 대답으로 일관하자 나도 포기하고 말았다. 얼마 가지 않아서 도착한 곳은 동네의 한 목욕탕이었다.
“목욕탕?”
“원래는 명절 때만 씻는 건데 덕분에 때 좀 밀겠다.”
나는 기가 차긴 했지만 충분이 납득이 가기 때문에 군말 없이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형님과 칠복이 아저씨는 다소 비장한 표정으로 칫솔 같은 목욕 용품을 구입하고 내부로 들어갔다.
나는 아침에 씻고 나와서 탕 속에 주로 있었지만 형님과 칠복이 아저씨는 한참동안 씻고 탕으로 들어왔다.
얼마나 씻은 건지 그들의 몸은 벌겋게 일어나 있었다. 형님은 탕에 몸을 담그며 걸쭉하게 말했다.
“어으. 시원하구만!”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나는 그들이 말없이 탕에 있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11시 반에 약속이니 11시 정도에 나가면 되겠지.”
“아직 2시간이 넘게 남았다고요.”
“뭐가 그렇게 급해. 천천히 하자고.”
형님의 말에 칠복이 아저씨는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랜만에 와서 최대한 누릴걸 누리고 갈 모양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쪽에 잠을 잘 수 있게 마련된 공간에 누웠다.
어제 충분히 잠을 잤는데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자 잠이 솔솔 왔다. 딱딱한 바닥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적당한 온도가 내 몸을 바닥에 붙여버렸다.
잠시 눈을 감기만 했는데 금방 누군가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나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일어났다. 내 앞에는 형님과 칠복이 아저씨가 서 있었다.
“가자. 다 씻었다.”
“예.”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의 물기는 이미 다 말라버려서 수건을 별로 쓰지 않았다.
양복을 얼른 입고 평상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정장을 말끔하게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자동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차려입으니 괜찮으신데요?”
내 말에 칠복이 아저씨가 넥타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생활을 그렇게 해도 관리를 소홀히 하진 않았거든.”
확실히 흔히 보는 노숙자치고는 풍채가 좋았다. 내가 두 사람을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형님이 지금까지 듣던 목소리보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은 먼저 카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일부러 내가 볼 수 있도록 창가 쪽이었다. 나는 가까운 주변 건물 창문을 통해서 내려다볼 심산이었다.
아침에 봐둔 상가에 올라 작은 창문을 통해서 두 사람을 관찰했다.
“왔군.”
곧 차량 한 대가 카페 근처에 나타났다.
흰색의 중형차는 전선기와 경호원 두 명, 그리고 수행원으로 보이는 여성 한명을 남기고 주차를 하러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찡그리며 그들을 자세히 보았다.
“많이 봤던 얼굴인데?”
멀리서 보니 확실하진 않았지만 여자 수행원은 꽤 익숙한 얼굴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그들이 카페로 들어간 후에 건물에서 내려와 카페로 접근했다.
경호원들은 인상을 잔뜩 치푸린 채 주변을 살피고 있었고, 나의 시선은 전선기의 옆에 앉은 수행원에게 향했다.
“김경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