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웃대, 피더스님
그 다음 부터 대채 어떻게 흘러갔을까.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다. 그 뒤로, 골목길에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가득 울려퍼졌다. 물론, 경찰이 도착하고, 감식반이 시체를 확인하던 그 순간까지도 나는 시체의 앞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멍하니, 그리고 아주 두려운 듯이. 최초 목격자라는 명분으로 경찰서까지 동행한 나는 경찰들의 질문에 서스럼없이 대답했다.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경찰 한 명이 나에게 물어왔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굳건히 닫혀있던 내 두 입술을 뗀 뒤, 아주 천천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콜라….”
내 말에, 경찰은 의아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혔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네?’ 하고 다시금 되물어 오는 경찰의 대답에 나는 다시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한 마디로 그때의 내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시키기는 어렵겠지.
“편의점에서 산 콜라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콜라를 담고 있던 봉투 손잡이가 뜯어졌거든요. 그래서 콜라가 굴러갔는데….”
나는 말의 끝을 애매모호하게 마무리 지었다. 경찰은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경찰서의 분위기는 꽤나 살벌했다. 내 주변에도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경찰과 마주보고 앉아 나와 같이 경위서 (혹은 진술서) 를 열심히 작성해나가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용의자와 경찰이 정겹게 자장면을 먹는 광경은 볼 수 없었다. 물론 짬뽕도 마찬가지였고.
그 뒤로, 경찰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져왔다. 하지만 모두 대답하는데에는 그리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정말로, 그저 내가 시체를 처음 발견한 목격자 정도로만 생각하고있었기 때문일까. 시체를 어떻게 발견했냐는 둥, 발견한 경위, 발견하고 나서 왜 곧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 평소에도 그 골목길을 자주 이용하는가와 같이 아주 간단한 질문들이였다.
그렇겠지. 알 리가 없겠지. 그 여자는, 이 시체를 만들어낸 장본인과 내가 어재 새벽 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겠지. 내가 이 여자가 죽는 소리를 두 귀로 생생하게 들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겠지. 내가…, 내가 살인마와 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경찰들이 알 리가… 없겠지.
“간단한 인적사항 몇 가지만 적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나에게 던진 질문은 이 거였다. 최초 발견자의 진술이 또 다시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설명한 경찰은, 나에게 한 장의 종이를 들이밀었다. 종이의 기입란에는 여러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내 나이, 성별, 이름, 거주지의 주소, 전화번호.
“알겠습니다.”
나는 종이를 건네받아, 잘 나오지 않는 볼펜 한 자루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 종이를 대부분 다 채우고 나서야, 나는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무슨 일 생기시면 꼭 전화주시길 바랍니다.”
경찰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경찰서의 유리문을 밀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하라고? 일은 이미 생겨버렸다. 내가 어젯밤 그 전화를 받은 그 순간, 그때 이미 사건은 터져버렸는데.
경찰서에서 나오니, 이미 밖은 어두컴컴했다. 오늘 아침 집을 나설때만해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밖에 나와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만약 알고있었다면 이 추운 날, 잠옷 차림을 입고 경찰서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콜라….”
나도 모르고 있던 사이, 나는 양 손으로 콜라 두 병이 들어있는 봉투를 껴안고 있었다. 한 쪽 손잡이가 찢어져서 더 이상 콜라를 담아가기가 힘들어진 봉투도. 그 사실에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젠장, 내가 대채 왜 콜라를 마시려던 거지? 아침에 콜라를 사러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아니, 애시당초 봉투 손잡이가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괜한 짜증감이 밀려왔다. 나는 콜라 두 병을 경찰서 입구 옆에 자리한 쓰레기통에 아무렇게나 던져넣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어왔지만, 시체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적이 있는 이 콜라를 마실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내 담력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거리로 나왔다. 다행히도 경찰서에서 집 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만한 거리는 아니였기에, 나는 집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에는 이미 많은 양의 단풍잎이 떨어져있었다.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단풍잎이 밟히는 사각소리가 내 귓가를 건드려왔다.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어제의 전화 통화가 머릿속에서 점점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친, 진짜 지금 뭐가 어떻게 되는거야?”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나는 욕설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옆에 걸어가던 여성이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쓸 여유는 없었다. 지금 내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분명 싸이코는, 랜덤으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주머니 속에 넣고 뜨르륵. 근데 하필이면 전화를 받은 게 나였을뿐, 별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대채 어떻게, 내가 그 시체를 발견할 수 있는거지?
대채 얼마나 낮은 확률일까. 우연히 걸려와서 받은 전화의 상대가 싸이코패스이고, 그 싸이코패스가 나에게 살인을 생중계하고, 나는 그 다음 날 시체를 발견한다?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다. 우연히 건 전화의 상대가, 우연히 같은 동네에 살고있었다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소설에 등장시키기에도 너무 개연성이 떨어져, 한번 이상은 고민해봤을 정도의 소재. 그 정도였다.
게다가… 하필이면 시체의 최초 발견자가 나라니. 이건 정말 운명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확률.
“하, 오늘도 글쓰기는 글렀다. 이게 뭐냐고 진짜.”
그렇게 말한 나는, 얼굴을 때려오는 차가운 바람에, 점퍼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렇게 깊어지는 생각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예의 그 편의점에 도착했다. 편의점의 간판에 적혀있는 영문을 생각없이 읊어내려간 나는, 아까 산 콜라를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지만, 먹을 건 먹고, 마실건 마셔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편의점의 문을 열었다.
“어, 오빠! 아까 뭔 일있었어요? 요 앞에 골목길에 경찰차오고 난리도 아니였는데.”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건넨 봉투 손잡이가 끊어져서, 우연히 내가 콜라를 떨어뜨렸고, 콜라가 향한 지점에 시체가 있어서 경찰서에 동행했다. 그리고 지금 막 경찰서에서 나오는 길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사람과.
나는 습관처럼 콜라 두 병을 집었다. 하지만, 이내 콜라병을 내려놓은 나는 그 옆에 위치한 사이다 두 병을 집어들었다. 아무래도 콜라는 한 동안 못 마실것 같았다. 계산대 위에 사이다를 올려놓자, 지희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다.
“어, 왠일로 사이다를 다 마셔요? 나 처음 보는거 같은데. 아니 그보다 아까전에 콜라 사갔잖아요. 벌써 다 마셨어요?”
“아까 가는 길에 잃어버렸어.”
“네? 콜라를 잃어버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희는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쳐보았지만, 나는 별 다른 반응없이 그녀가 계산을 마치길 기다렸다. 그 순간,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지희의 뒤 편에 자리잡은 여러가지 담배들. 담배는 끊었다. 아니 끊었다기보단 보류해두고 있었다. 누군가가 그랬었다. 담배는 끊는게 아니라 평생 참는거라고. 나는 그걸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다. 콜라를 주식처럼 마시기 전에는 담배를 피어왔다. 소설이 써지지 않을때마다 한 개피, 한 개피를 피다보니 어느새 내가 피우는 양이 너무 많다고 느꼈기 때문이였다.
건강을 해치는건 별로 상관 없었다. 애시당초 내 몸을 그리 아끼는 편도 아닐 뿐더러, 단 걸 좋아하는 편이였다. 물론, 정말 단 음식을 표현하는게 아니다. 몸에 좋은건 쓰고, 나쁜건 달다. 그리고 언제나 나쁜게 자극적인 것이다. 전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리였다. 그렇기에 나는 단 걸 좋아한다.
“저거, 저것도 한 갑.”
나는 손가락으로 담배곽을 가르켰다. 붉은색과 하얀색이 적절히 섞여있는 고풍스런 모양새. 예전에 담배를 폈을때 항상 피던 담배였다. 그러자 지희는 더욱 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담배 한 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오늘 진짜 이상하네요, 담배 끊었다면서.”
“끊은 적 없어. 참고있던거지.”
계산이 다 끝나기 전, 나는 라이터 하나를 추가로 구입했다. 그리고 계산이 끝나자, 나는 서둘러 편의점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담배곽을 열었다. 비닐포장을 뜯고, 담배를 가리고 있는 겉포장을 다시 뜯었다. 그러자 보기만해도 흡연욕을 자극하는 담배의 하얀 필터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한 개피를 입에 물고, 불을 붙혔다. 담배 특유의 갑갑하고, 매케한 향기가 입과 코를 통해 내 폐 속을 향해 들어갔다. 오랜만에 펴서 그런걸까. 담배연기가 내 몸 속에서 흐르는 느낌이 아주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머리에 피가 확 돌고, 막혀있던 코도 뻥 뚫리는 느낌이였다.
“좋다….”
담배 연기를 하늘로 후, 불면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 입에서 빠져나온 연기는 바깥 공기를 하얗게 더렵혔다. 담배를 반 정도 태우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
내가 있는 곳은 아까의 그 골목길이였다. 이 곳으로 지나가려고 하진 않았는데, 발이 멋대로 이 곳으로 향한 것이였다. 평소의 습관을 발이 기억하고 있던걸까. 순간, 나는 내 발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일순간 담배연기에 흘려보내던 지독한 기억을 다시금 꺼내게 만들다니. 말의 목을 베었다는 김유신 장군도 이런 심정이였을까. 물론, 내 다리를 벨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시선을 돌리자, 쓰레기 봉투의 주변에는 노란 폴리스라인이 채워져있었다. 괜히 그 쪽으로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 나는 애꿏은 담배만 더욱 깊게 빨아들일 뿐이였다.
앞으로 나는 또 이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오늘 일을 떠올리게 되겠지. 아니, 앞으로는 이 곳을 지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 조카, 미치겠네. 내가 왜 이렇게 된거지?”
계속해서 한탄을 해도, 이미 이유는 알고있었다. 그 싸이코년. 모든 일의 원흉이 바로 그 년이였다. 이런 기적같은, 믿을 수 없는 우연을 만들어 낸 것도 모두 그 년 때문에….
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보니, 나는 왜 그 여자의 말을 믿고있는거지? 솔직히 말해서 그 여자가 나에게 진실만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더 높겠지. 나는 공기중에서 흩날리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연히 번호를 눌렀다고?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그게 과연 진실일까? 아니, 진실일 리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정도 우연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보통 사람들의 휴대폰 번호의 자릿수는 대채 몇 개일까.
맨 앞의 세 숫자를 한 가지로 통일시킨다고 해도, 남은 자릿수는 여덟개. 0 부터 9. 수학에 약한 나였기에, 정확히 몇 개의 가능성이 있는지 구하는건 힘들었다. 하지만, 이게 아주 어마어마한 양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양의 가능성 가운데, 아주 랜덤으로, 그래 예를 들면 주머니 속에 넣고 뜨르륵, 하는 식으로 번호를 눌렀는데, 그게 또 아주 우연히 같은 동네에 살고있는 사람이 받을 가능성은 대채 얼마나 될까? 그리고, 내가 또 시체를 첫번째로 발견할 확률은?
답이 나왔다. 거짓말이다. 내 번호를 우연히 눌렀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였다. 그 여자는 나를 알고있다. 물론, 내가 시체의 첫번째 목격자라는 건 어디까지나 엄청난 확률을 뚫고 만들어진 우연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왜 눈치채지 못한거지? 그런 우연이 있을리가 없는데. 그래, 그 여자는 나를 알고있다. 내가 누군지, 내 번호가 몇 번인지, 내가 어디 사는지. 확실한 건 아니였다. 다만,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입에 물고있던 담배개비를 퉤, 하고 뱉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뛰다시피해서, 재빨리 내가 살고있는 빌라의 계단을 올랐다. 3층이다. 계단을 한번에 서너칸을 뛰어넘어 집 문 앞에 도착한 나는, 망설임 없이 도어락을 열고 집 안에 들어갔다. 바깥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두렵게 느껴졌다. 그 여자는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싸이코였다. 그 정도는 말이 됀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문을 닫고 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아무렇게나 던진 나는, 재빨리 신발을 벗고 집 안 곳곳을 살폈다. 혹시, 그 여자가 이미 내 집 안에 들어와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옷장 하나하나를 열어 살폈고, 침대 밑까지 살폈다. 심지어는 냉장고의 문도 열어본 다음에서야 나는 겨우 진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집 안에는…허억, 없는건가. 헉헉.”
나는 혼잣말을 한 사실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여자가 내 말에 대답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불안과는 달리 여자는 대답해오지 않았다. 집에 없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던 그 순간이였다.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한 발라드 곡이였지만, 나는 마치 총에 맞은 듯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혹시, 그 여자일까? 화면에 상대방의 번호가 나타났다.
「○○출판사」
“하…신발, 사람 놀래키고 있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몇 번 고른 뒤, 통화 버튼을 눌러 휴대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어, 태호씨. 나야.”
남성의 목소리. 목소리를 듣자말자 상대방의 얼굴이 딱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 했다. 언제나 나에게 신작을 요구하던 편집장 강석민. 나와는 달리 꽤나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어딘가 모르게 조금 여성스런 기운을 풍기고 있어서 별로 마음에 드는 인물은 아니였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신작말인데.”
“아, 네. 재촉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될거 같거든요.”
“아, 그래?”
완성은 개뿔. 아직 A4용지 한 장 분량도 못썼는데.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 남자와 오랜 통화를 하고싶진 않았기에, 나는 대충 대화를 얼버무렸다.
“이야, 그럼 조만간 또 미스테리 장르 정점 소설을 볼 수 있겠는데?”
“에이, 정점이라뇨. 그 정도는 아니예요. 오히려 전에 썼던거 보다 조금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라서요.”
“사람이 너무 겸손한 것도 안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기대할게. 완성되면 꼭 전화줘.”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종료되었다. 겸손이라니, 오히려 지금의 나한테는 오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표현이였는데. 그러고보니 일곱 가지 욕망 중에 오만을, 나는 지금 저지른건가?
“하아…, 이제 어쩌냐.”
일단 글을 쓰긴 해야했다. 소설은 완성시켜야 하는데, 적당한 소재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말도 안되는 사건에 휘말렸기에, 나는 지금 글을 쓸 상태가 되지 못했다. 글쓰기는 커녕, 키보드를 두드릴 힘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아까 사왔던 사이다 뚜껑을 열어 그대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컵은 필요없었다. 어짜피 나 혼자 마시는 건데 무슨 상관이랴. 벌컥벌컥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사이다의 탄산에, 목이 조금 따가웠지만 나는 계속해서 사이다를 부어댔다.
그런데 그 순간.
또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이번에도 역시 잔잔한 곡. 아니 젠장할, 어젯밤부터 이 노래가 날 몇번이나 놀라게 하는거람? 깜짝놀라 입에 붙혀두던 사이다가 흔들렸기에, 내 몸은 이미 사이다로 샤워를 한 것처럼 젖어있었다. 젠장, 역시 컵을 쓸 걸 그랬나.
나는 주머니에 넣어뒀던 전화기를 꺼내어 번호를 확인했다. 그리고 번호를 확인한 그 순간, 나는 사이다에 젖어 끈적거리는 몸뚱아리를 걱정하던 내 머릿속이 일순간 차갑게 굳어버렸다.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어린아이 처럼.
“그 년이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게다가 익숙한 숫자. 분명 어젯밤, 잠결에 봤던 그 번호. 받아야하나? 나는 섣불리 전화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대로 전화가 끊어졌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화가 끊기면 안됀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알고있었다.
확실히 해야한다. 어제 나한테 전화를 건 것이 정말로 우연이였는지. 아니면 내 생각대로 나에 대해서 알고있었는지. 만약 전자라면, 믿을 수 없지만 만약 전자라면. 나는 앞으로 이 여자에 관한 기억을 전부 잊고 살 것이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렇게 할 것이다. 전화 한 통화만 빼면 나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이 여자가 나에 대해 알고, 어젯밤에 전화도 일부러 건 것이라면? 그럼 대채 어떻게 해야하지? 애시당초 이 여자는 무슨 목적으로 나한테 전화를 건걸까? 왜 전화를 걸어서 살인을 생중계한거지? 머릿속이 의문이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마음을 굳힌 나는,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댄 뒤,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안녕, 아저씨?”
익숙하고도 끔찍한, 다시는 떠올리기 싫었던 그 여자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넘어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