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거부하는 짐승의 노동
인간은 땅의 한 생명체로 한 평생을 살아간다. 그 한 평생에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며, 이러한 삶의 목적인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하게 의식주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필요불가결한 의식주의 해결이 약점 아닌 약점이 되어 인간을 동물과 같은 육체적 노동의 도구로 취급하는 사회는 악마의 세상이 되어 인간의 정신에 하느님의 존재가 사라지게 되고, 귀신이 자리 잡게 된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노동이며, 노동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의식주가 아니다. 그러한즉 노동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은 행복한 삶과 함께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또한 노동에는 주체적 노동과 노예적 노동이 있으니, 주체적 노동에 의하여 의식주를 해결 할 때, 노동의 즐거울 것이며, 즐거운 노동에서 인생의 목적을 잃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예적 노동에 의하여 의식주를 해결 할 때, 노동은 괴로울 것이며, 괴로운 노동에서 인생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된다. 주체적 노동은 인간적인 노동이 되며, 노예적 노동은 짐승적인 노동이 되다.
짐승은 굶주림에 죽지 않기 위해서 먹을 일만 찾아다니며, 먹고 나면 자는 것이 일이고, 추위에 죽지 않기 위해 잠잘 자리를 찾으며, 비와 이슬을 피하기 위해 잠잘 자리는 찾는 것이 짐승의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노동을 하는 것이지 노동에서 인간다운 삶을 찾는 것이 아니다. 동물적 노동을 위하여 육체만을 단련하는 것은 곧 짐승의 삶을 사는 것이니, 동물적 노동이 아닌 인간적 노동이 되어야 한다.
동물의 육체는 동물의 삶을 이루며, 인간의 육체는 인간의 삶을 이룬다. 인간의 육체를 동물의 육체와 같이 취급할 때, 인간은 존재론적 자아를 망각하게 되고, 그러한 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니,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인 수단이 오히려 목적을 침범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인간을 짐승취급을 할 때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영혼이 미개한 사회일수록 인간을 노동의 도구로 취급한다. 노동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인간은 노동을 멀리하는 인간이다.
진정 노동의 즐거움을 아는 인간은 남에게 노동을 강요하지 않으니, 노동의 즐거움은 노동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가정속에서 즐겁게 자아를 찾는 인간적인 삶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며, 인간적인 삶이란, 육체와 정신이 균형을 이루는 삶을 말한다. 육체적 노동의 즐거움이 정신적 즐거움을 갖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물적 노동을 하는 것으로, 정신을 단련하는 것은 인간적 삶을 위한 것이며, 육체를 단련하는 것은 동물적 삶을 위한 것이다.
정신의 단련과 육체의 단련이 균형을 이룰 때, 행복한 삶이 되며, 이러한 행복한 삶에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루어 육체를 버리고 갈 때는 정신의 단련에 의한 영혼의 존재로 존재하게 된다. 육체적 노동만을 강조하는 인간사회는 악마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그러한 사회는 육체적 노동에 필요한 인간세상으로 사회를 발전시키게 되니,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에 의한 주체적 삶을 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일을 하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마라”는 구호는 인간을 노동의 노예로 취급하기 위한 악마들의 발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 악마적인 인간들은 인간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먹을 것에만 매달리게 만드니, 그리하여 인간사회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사회가 된다. “일을 하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마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자신의 일을 자랑하는 인간은, 스스로 영혼이 없는 짐승임을 자랑하는 것이며, 그러한 구호를 내세우면서 정작 본인은 일을 회피하는 인간은 가장 사악한 인간이니, 그런 인간은 인간의 영혼을 말살하고 인간세상을 귀신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을 노예취급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생존을 위하여 직업적 일을 하는 것은 생업이며, 생업은 살아가기 위한 모든 일이 생업이 된다. 그리하여 직업이라는 것에는 귀천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말에는 귀천이 있으며, 이러한 노동에는 인간을 노동력으로 평가하고 차별하며, 그것으로 인간성까지 차별하게 되는 것이니, 그러한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행복해질 수 없으며, 존재를 이루는 보람된 인생이 되지 못한다.
편협적 노동의 갈증
정신노동은 육체활동을 저하시키고, 육체노동은 정신활동을 둔화시킨다. 정신의 게으름은 그 영혼을 썩게 하고, 육체의 게으름은 그 삶을 썩게 한다. 그러한즉 정신의 게으름은 존재론적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영적인 타락을 하게 되며, 육체의 게으름은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이루게 된다.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과 행복한 현재론적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조화로운 생활에서 균형 잡힌 인생을 이루어야 한다.
정신노동은 하늘의 의무이자 존재론적 행복이며, 육체노동은 땅의 의무이자 현재론적 행복이다. 그러나 정신노동은 땅의 성품을 다스릴 수 있으니, 즐겁고 행복한 삶에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룰 수 있지만, 육체노동은 하늘의 성품을 잊고 땅의 성품을 다스릴 수 없으니, 번뇌와 갈등의 고뇌를 극복할 수 없다. 그리하여 육체노동에만 치우친 삶은 불행한 삶에서 존재론적 자아를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번뇌와 갈등을 이기기 위해서 더욱 육체노동에 매달리는 것은, 일시적으로 그러한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더 괴로운 고뇌에 빠지게 되고, 그로써 육체노동에만 치우친 삶은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짐승적인 삶이 되어 인생을 허무하게 끝내고 마는 것이다.
정신노동은 공간의 영역에서 존재를 이루는 삶이며, 육체노동은 시간의 영역에서 소비하는 삶이다. 그리하여 인생을 통하여 남는 것은 공간의 영역에 존재를 이룬 영혼만이 남게 된다. 인간세상이 육체노동에 치우친 삶이 되면, 육체노동에 따른 영혼의 갈증을 일으키게 되고, 그리하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한다는 것이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믿음에서 영혼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정신노동이기 때문이며, 종교적 믿음은 정신노동이 아닌 감성의 작용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종교적 믿음은 공간의 영역에 존재를 이루지 못하고 땅의 성품에 따라 소비되는 것이기에, 종교적 믿음을 가져도 끊임없는 번뇌와 갈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 말살의 노동
영혼을 잃은 인간이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잃게 만들기 위하여 노동을 찬양한다. 인간을 부려먹으려는 인간이, 인간은 노동을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 말하며, 노동을 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인간에게 도둑질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인간이야말로 노동은 하지 않고 도둑질하려는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은 자기 집 앞을 쓰는 것 정도로 노동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을 좀 더 부려먹을까 연구하는 인간이 노동을 강조하며, 노동은 투쟁이라는 인식을 시켜 인간세상을 물질의 노예로 만든다. 물질의 노예가 된 인간에게는 더 이상 영혼이 존재할 수 없게 되며, 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을 말살시키기 위한 귀신의 짓임을 알라.
배타적 투쟁의 노사관계
노사(勞使)란 일하는 노동자와 시키는 사역자를 말한다. 노동자(勞動者)는 육체를 움직여 일을 하고 그로써 생계를 꾸리기 위한 벌이를 하는 자를 말하며, 사역자(使役子)는 노동자를 부리어 일을 시키는 자를 말한다. 노동자와 사역자는 각기 그 유형이 있으니, 노동자의 유형은 자발적인 노동자와 피동적인 노동자가 있으며, 사역자의 유형은 정상적인 사역자와 불법적인 사역자가 있다. 또한 노동자가 임금을 요구하는 성향은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부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가 있으며, 사역자가 일을 시키는 성향은 인격을 존중하는 사역자와 인격을 무시하는 사역자가 있다.
그러한즉, 노동자는 네 가지 유형의 노동자가 있으니,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부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 그리고 피동적으로 일을 하고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피동적으로 일을 하고 부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가 있다. 사역자 또한 네 가지 유형이 있으니, 정상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사역자와 정상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사역자, 그리고 불법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사역자와 불법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사역자가 있다.
노사관계는 이러한 네 가지 유형에 의하여 협조적이거나 배타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와 정상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사역자의 관계이니, 이러한 관계가 되어야 바른 체계에 따른 조직을 이루어 각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을 힘들게 하는 모든 일들이 정상적인 것이나 비정상적인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을 무너트리려는 짓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피동적으로 일을 하고 부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를 음해하는 것과, 불법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사역자가, 정상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사역자를 힘들게 하는 것이다. 특히 피동적인 일을 하고 부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유형의 노동자와, 불법적인 노임을 지불하고 인격을 무시하는 유형의 사역자가, 노사관계를 왜곡시켜 반목과 투쟁의 배타적인 노사관계를 형성시킨다.
노동자와 사역자는 알아야 한다. 상보적 인간에게는 노동자나 사역자라는 것이 따로 없다. 노동자든 사역자든 그것은 인간의 현재론적 삶을 이루는 방편이며, 그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목적인 존재론적 자아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써, 결국 인간이, 인간이 되는 것은 존재론적 목적을 이루는 자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현재론적 삶을 위한 방편은 방편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노동자든 사역자든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서 현재의 삶을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상보적 정신으로 행복한 삶을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상보적 정신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삶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상보적 정신에 의한 현재론적 삶이 영혼의 빛을 밝고 강하게 형성시키기 때문이며, 배타적 정신에 의한 노동자나 사역자의 삶은 현재론적 삶을 불행하게 하고, 존재론적 자아를 잃고 실패한 인생으로 끝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이중배반적 쇄뇌사회
사회적 쇄뇌주의자들은 경영자와 노동자를 끊임없이 이간하여, 사회적 안정에 의한 삶의 안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형성시킨다. 노동을 자유를 잃어버린 기계와 같은 행위로 인식하게 하고, 자유를 유린당하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쇄뇌를 시키어, 이성을 잃고 육체를 기계처럼 다루는 노예적 삶이라고 말한다.
노동자들은 밤낮없이 일만하고 노동의 댓가를 빼앗긴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러한 삶을 거부하고 투쟁적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며, 사회적 구조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도록 만든다. 사회적 안정과 삶의 안정을 취하는 것은 습관에 빠진 안일주위로 만들고 그러한 삶은 아무생각 없는 짐승과 같은 삶이라 말하며, 노동을 자존심이 상처받는 행위라 하여 노동자로 하여금 부끄럽게 만든다.
노동자들로 하여금 생계를 의지하고 있는 그 일에 만족할 수 없도록 만들고, 그러한 삶이 노예적 삶이라 하여 안정된 삶을 벗어나 경영자와 투쟁하게 만든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간을 깎아내려 증오하게 만들고, 사회적 지위에 앉는 것을 죄악스럽게 만들면서, 노동자로 하여금 부에 대한 증오와 지배층에 대한 갈등을 쌓게 만든다.
경영자를 노동을 착취하고 노동자를 멸시하는 존재로 만들어, 경영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며, 노동자들이 하는 일들이 운명에 지어진 굴욕적인 행위라 말하면서, 그렇게 타락하여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고 그렇게 취급받는다고 말하여 노동자로 하여금 스스로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렇게 사회를 부정적으로 인식시켜 경영자와 노동자를 이간시키고 끊임없이 싸우도록 조장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적인 존재로 만들면서 경영자와 노동자 모두를 삶에 회의감을 갖게 한다.
모든 현실을 부정적으로 인식시켜 자신을 비통한 존재로 만들고, 그렇게 하여 그 돌파구라는 것은 종교적 노예가 되는 것이 인간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경영자와 노동자에게 정신적ㆍ물질적 착취를 하니, 인간사회로 하여금 영원히 행복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인간사회를 이간시키는 사악한 존재들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인간들이 있다는 자체가 인간세상의 불행이며, 인간세상에 사악한 종교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수치다.
또한, 인간의 영혼을 노예화시키는 사악한 종교가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손인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넘어 죄악적 방관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정과 사회를 무너트리고, 국가와 인류를 반목과 갈등의 세상으로 만드는 쇄뇌주의자들에게 방관적 자세를 취한다면, 인간세상의 불행은 그러한 방관자들에게 돌아가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 현실적 피부로 불행을 느낄 때는 늦은 것이다.
물질의 노예로 만드는 종교적 사업수단
인간은 삶에서 즐거운 기억과 어두운 고통의 기억을 갖게 된다. 즐거운 기억이든 어두운 기억이든 그것을 잊기에는 쉽지 않지만, 마음을 닦는 많은 수련법들은 이러한 기억을 잊고 밝은 영혼을 이루게 하기위하여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세상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떠올려 고통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일수록,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떠올려 지우는 것은 가장 확실한 어두운 기억을 지우는 방법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에서 어두운 고통을 찾게 하고, 그 어두운 고통에 묶이게 함으로 해서 영원히 어두운 고통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러한 고통은 인생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며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개인으로 하여금 심적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인간세상이 가장 비참한 인간세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야생에서 뛰놀며 즐겁게 살고 있는 짐승을 잡아다가 우리에 가두어 키우게 되면, 처음에는 반항을 하겠지만 점차 적응을 해간다. 짐승을 다스려 적응시키는 방법은 먹이조절을 하는 것이니, 말을 안 들으면 먹이를 주지 않고, 말을 잘 들으면 먹이를 더 준다. 그렇게 하여 짐승은 말을 잘 듣게 되고, 항시 거의 정확한 시간에 먹이를 주니 짐승에게는 고맙기 그지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짐승은 먹이를 주지 않으면 배고픈 고통을 참지 못하는 약점 아닌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여진 짐승을 야생에 다시 풀어놓으면 그 짐승은 죽게 되니, 그것은 사냥하는 본능적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짓을 거짓된 종교에서 인간에게 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노예적 영혼으로 만드는 것이니, 노예적 영혼에게서의 자유는 우리 안에서만이 허락되며,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거짓된 종교에서 교리가 복잡하고 조잡한 것은 노예적 영혼으로 하여금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결과적인 문제는 노예적 영혼에게서 발생한다. 우리에서 길들여진 짐승이 야생에서 살수 없는 것과 같이, 노예적 영혼은 주체적 영혼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주체적 영혼에서 영적자아를 이루는 방법을 잃어버리게 되니 우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곧 영혼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자유로운 영적자유가 존재하는 것 자체를 모르는 구속적 영혼이기 때문이다.
영혼을 구속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인간에게 어두운 고통을 떠올리게 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어두운 기억들을 나열하여 그러한 것이 자신이 한 것이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춘 것이 인간이게 그러한 것을 속죄하는 인생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인간은, 또한 인간세상은 영원히 어두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니, 이것이 거짓된 종교에서 하는 사업적 수단이다.
노동 찬양의 종교 교직자
인류의 인간에게 있어 영원한 진리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영혼을 이루는 진리이며, 또 하나는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루는 진리이다. 존재론적 영혼을 이룰 수 있는 진리는 인간의 본능인 이성으로서만이 이룰 수 있으며,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는 진리는 인간의 본능인 이성으로 감성을 다스리는 것에서만이 이룰 수 있다. 이외의 어떠한 방법도 있을 수 없으며, 어떠한 요령도, 어떠한 요행도 바랄 수 없는 것이 진리적 이치이다.
존재론적 영혼을 이루는 삶은 정신적인 삶이며, 현재론적 행복을 이루는 삶은 육체적인 삶이다. 정신적 이성에 의하여 내세의 영혼을 완성하게 되고, 육체적 감성에 의하여 현세의 행복한 삶을 이루게 된다. 인간의 영혼은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가야 하는 것이 존재론적 진리이며, 인간의 육체는 땅으로부터 와서 땅을 가게 되는 것이 현재론적 진리이다. 인간의 삶은 존재론적 영혼을 이룰 수 있는 진리적 노력과, 현재론적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는 진리적 노력을 하는,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인류의 지극히 높고 순수하여 더 할 수 없는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절대진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진리를 왜곡하여 인간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존재론적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삶이 되게 한다.
종교의 교직자로 있는 인간이, 남자는 모두 땀 흘려 일만하는 존재로 취급하고, 여자는 모두 아기를 낳는 일만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더럽히는 말이며, 인간의 삶이 자신들의 말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착각에 빠진 간교한 인간의 말이다. 남자가 땀을 흘려 일을 한든 안 하든 그것은 개인의 지유이며, 여자가 아기를 낳고 안 낳고는 개인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기본법칙이며, 그러한 기본법칙은 누가 시켜서 하고 시키지 않아서 하지 않는 일이 아니다. 그러한 기본법칙에 따르는 인간의 삶은, 종교의 교직자로 있는 인간이 말을 한다고 하여 그러한 기본법칙이 있고 없는 것이 아니며, 실천을 하고 안 하는 것이 아닌즉, 그러한 문제를 종교적 교직자가 자신들이 무슨 기본법칙을 이루게 한 존재인 냥 “일을 하라!”, “아이를 낳아라!” 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인간을 하등동물로 취급하기 때문이니, 그러한 인간은 과대망상적 자기우월에 빠진 교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종교의 교직자로 있는 인간이, 남자는 모두 땀 흘려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종교의 교직자로 있는 남성은 모두 땀 흘려 노동을 하면서 그러한 말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종교의 교직자로 있는 인간이, 여자는 모두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종교의 교직자로 있는 여성은 모두 결혼을 하여 자식을 낳고 나서 그러한 말을 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은 하늘로부터 선택된 인간이니 육체적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여기고, 인간위에 군림하여 거만하게 하늘로 돌아갈 것을 바라면서, 다른 인간들은 하늘로부터 선택된 인간이 아닌 땅으로부터 온 인간인지라, 아기 낳는 일을 포함하여 개미처럼 육체적 노동만을 하고 흙으로 돌아가게 될 존재라고 말하니, 사악한 종교의 교직자가 허상의 신에 빠져 인간세상을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은 위선적인 생활을 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개미처럼 일을 하는 노동을 찬양하는 짓은, 참으로 사악한 인간 중에 사악한 인간의 사악함이다.
빈약한 영혼의 삶
인간세상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는 없다. 다만 그 차이가 있을 뿐이며, 그 차이는 정신의 차이와 물질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부자는 부자의 인생에서 자신을 이루는 운명의 길이 있으며, 가난한 자는 가난에서 자신을 이루는 운명의 길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운명적 차이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물질에만 차별을 두어 물질적 부자는 행복하고 물질적 가난은 불행하다거나, 물질적 부자는 잘났고 물질적 가난한 자는 못났다고 하는 차별을 두는 것 등, 인간의 본질까지 차별을 두는 것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목적에서 벗어나는 환경적 인간세상이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편안할 때 영혼의 빛이 밝아지지만, 불편할 때 오히려 영혼의 빛은 더욱 밝고 강하게 할 수 있다. 특히, 물질적 부자와 가난을 차별하여 인간의 본질에까지 차별하려 하는 것은, 영혼의 가능성까지 같은 차별하기 위한 물질적 간악함이다. 또한 이러한 간악함을 극복하려는 것이 오히려 부자를 인간성 부족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인격을 무시한다.
영혼의 빛을 강하고 밝게 하는 것은 부자와 가난의 차이에 있지 않다. 어떠한 물질적 환경의 삶이라도 영혼의 빛을 강하고 밝게 하는 것은 스스로 밝음을 이루는 정신의 길에 있다. 이러한 정신의 길에서 물질은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이 아니며, 인간의 현재적 삶은 물질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은 이 땅에서 만의 한계이며, 내세적 삶에는 오로지 정신의 영향을 받는 정신세계이니 육체적 삶이 아닌 영혼의 삶이 되는 것이다.
존재적 삶의 중심을 물질계인 땅에 두고 인생을 살 것인가? 존재적 삶의 중심을 정신계인 하늘의 영혼에 두는 가는 전적으로 인간 개개인의 선택이다. 이 땅의 삶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에 살다가 영혼의 세계에서도 또한 풍요로운 삶을 살거나, 이 땅의 삶에서 물질적 풍요로움에 빠져 살다가 영혼의 세계에서는 빈약하게 살거나, 이 땅의 삶에서 물질적 빈약함에 살다가 영혼의 세계에서는 풍요롭게 살거나, 이 땅의 삶에서 물질적 빈약함에 빠져 살다가 영혼의 세계에서도 또한 빈약하게 살거나 하는 것은, 이 땅의 삶에서 물질을 어떻게 대하고 관리하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영혼을 이루고 못 이루고 하는 것에 있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산다고 부러워할 것이 없으며, 물질적 빈약함에 산다고 하여 살망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특히 물질적 풍요로움에만 빠져 사는 인간들이 인간을 그러한 물질로 차별을 두는 것에서 인간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인간세상은 밝은 영혼을 이루기가 힘든 환경이 되지만, 스스로 노력하는 인간에게는 오히려 영혼의 빛을 이루기가 더 좋은 환경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정신이 바르고 강한 인간만이야 그렇게 하며, 대부분의 인간은 물질에 놀아나는 환경적 인간세상에서 자신의 영혼의 길을 잃고 살기에, 다 같은 하느님의 자손으로서는 영혼의 빛을 이룰 수 있는 기회적 불공평한 인간세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아의 영적성숙을 위하여 인간의 삶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삶을 위해서 인간마다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이 있다. 그 운명에는 정신적 운명과 물질적 운명이 있으니, 정신적 운명에만 따라가면 삶은 빈약하게 될 것이고, 물질적 운명에만 따라가면 영혼은 빈약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정해주신 선천적 운명은 풍요로운 정신적 운명과 풍요로운 물질적 운명으로 개체적 인간의 선천적 운명을 정해주신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이 모두 풍요로울 때 가장 강하고 밝은 영혼의 빛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것을 인간세상이 잘못된 차별을 두어, 영혼의 빈약이나 물질의 빈약이 발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