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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변명뿐인 이야기

스푸트니크 |2015.10.02 00:25
조회 19,353 |추천 51

 

딱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동안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댓글을 봤는데 너무 자기 일처럼 위로해주시고 화내시고 조언하시고 욕해주셔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뭐라도 씁니다.

 

댓글에 대한 답변을 좀 해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지금도 술을 한잔 하고 와서 오늘도 횡설수설 할지 모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디노님이나 규님처럼 학생 때 일이 저질러졌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까지 왔을까요. 라는 댓글에 저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제가 디노님도 규님도 모르지만, 아마 학생 때부터 연애하신 동성커플인 것 같은데.

 

 

그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땐 좀 더 두려울 게 없고, 무모했을 때니까.

 

 

 

제가 자꾸 변명을 하는 것 같아서, 글로 적는 것도 힘드네요. 글을 적는 제 자신도 괴롭습니다. 적을 때 마다 정말 변명에 자기합리화에 비겁한 말들뿐인 것 같아서. 보시는 분들 짜증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위로 받고자 적은 글도 아니었는데. 글을 적으면 적을수록 제가 오히려 글 읽으시는 분들을 화나게만 하는 것 같아요. 저라는 사람을 모르셨다면 이런 일이 세상에 일어나는지도 모르셨을텐데 제가 괜히 글을 써서, 답답함만 유발시키네요.

 

많이 위로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댓글 볼 때마다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고, 죄책감도 느낍니다.

 

제 말이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고, 이해는 되도 용납이 안 되실 수도 있는데. 그냥 일단 주절주절 떠들어보자면.

 

 

 

여러분들은 읽으시면서, W가 고등학생 때부터 저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게 보이시겠죠? 그래서 오랫동안 힘들어했겠다, 싶으시겠죠?

 

 

저는 몰랐습니다. 제 감정도 몰랐고 W의 마음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W의 이상한 행동들이 지금에서야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지만 저는 W가 저를 좋은 친구로 여기는 동시에 괴롭히고 싶은 만만한 상대로 여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고1때 처음 사귄 여자친구를 W가 뺏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여자친구가 W를 좋아해서 절 찼던 것뿐이고.

 

 

고2때 연인 같은 이상한 감정을 느낀 친구이긴 했지만, 그것도 지금에야 정의되는 감정일 뿐이고 그 당시엔 W라는 독특한 친구에게 느끼는 그저 독특한 감정, 혹은 우정인데 조금 이상한 우정 이정도로만 자각했을 뿐이죠.

 

빤히 쳐다보다가 웃어준다, 내 일에 관심가져준다, 내가 터치해도 가만있는다, 뭐 이정도로 날 좋아하리라고 누가 생각하나요. 저 또한 제 행동들이 W를 좋아했기 때문에 했던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고.

 

 

미묘한 우정의 연장선에서, 자기에게 키스를 하라고 해서 키스를 하고, 그 뒤로 나는 W를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매일 밤을 W 때문에 고민하고, 내가 W한테 왜 이상한 감정이 드는건지 괴로워했는데 W는 태연하게 여자친구를 사귀어버리고.

 

W와 달리, 저는 감정이 칼 같지 못해서 고3 내내 W에게 질질 끌려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W의 하루아침에 바뀐 태도에 전 더 불안해져서 W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고, W가 하라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 들어주는, 거의 주종관계와 다름없이 지냈죠. W는 점점 더 제게 차갑게 굴어댔고.

 

 

수능이 끝나고 제가 고백하겠다고 마음먹은 여자에게 W도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자기가 고백해서 사귀어버리고.

 

클럽에서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키스를 하고.

 

대학 생 때 잘 사귀고 있던 여자를 마지막으로 빼앗기고.

 

그 시기에 우리도 서로에 대한 감정이 그저 우정인것만은 아니란 걸 알아서 여행도 다니고 붙어 다니고 스킨십도 하고 했지만 어느 날부터 잠수를 탄 게 2년.

 

그러다가 얼마 전에 만나서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이거 다, 정말 이 새끼가 내가 좋아서 이러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으시겠어요? 실제로 겪었을 때 말입니다.

 

저도 제 감정이 혼란스럽고 정리가 안 되어 있었고, W 역시 마찬가지였을테고. 제가 W에 대한 감정이 애정이고 W 역시 애정이란 이름으로 내게 잔인하게 굴었다는 거, 그걸 알게 된 게 얼마 전입니다.

 

 

내 감정을 알았다고, 그럼 우리 이제 잘 사겨보자, 라고 하는 게, 우리 관계에 있어서 말처럼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한번도 W에게서 좋아한다느니 따위의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 사실 우리가 ‘사귄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너무 낯설고 남의 일 같습니다. 우린 그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관계가 아닙니다. 같이 있으면 괴롭고 힘든 관계가 차라리 더 어울리죠.

 

 

우리가 학창시절에 혹은 대학생 시절에 절친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함께 하면 좋고 즐거운 사이였다면 모르겠는데,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어요. W 때문에 고통 받았던 시간들을 일일이 말씀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물론 이런 것들도 변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맞습니다. 이제라도 감정을 알았다면 감정에 충실해라, 라고 하실 수도 있겠죠. 애꿎은 여자는 무슨 죄냐, 라고 분노하시는 것도 너무 이해가 됩니다만.

 

 

 

댓글 중에 꼭 언급하고 싶은? 대답하고 싶은 글이 있는데.

 

아무 의미 없는 가정이지만 W가 고백했다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라는 댓글과

W가 저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서 저의 선택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인거 안 보이시냐는 댓글에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왜냐면 제 생각과 너무 같고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W가 제 선택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아니라, 제가 W 선택을 그저 지켜본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여지껏 우리 관계가 그래왔어요. 모든 선택권이 W에게 있었습니다. 제가 아직 고2때까지만 이야기해서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겠지만.

 

 

W가 어느 날, 여자를 데려와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게 정말 그저 떠보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전 아닙니다. 아마 잡아달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겠죠. 하지만 제 생각에 W는, 본인도 본인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있기 때문일겁니다. 정말 오로지 절 좋아하고 저와의 미래만 꿈꿨다면 결혼이라는 대안을 생각하지도 않겠죠. 제가 아무 여자도 못 사귀고 있는 것처럼. 그게 꼭 W와의 미래를 꿈꾸기 때문은 전혀 아니지만.

 

 

W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한 길에는 제가 있고, 또 다른 길에는 보통의 평범한 삶이 있겠죠. 그 곳에 결혼도 함께 있는 거구요.

 

전 W의 마음이 보통의 평범한 삶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인도 확신을 못하니까 저에게 자기가 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받고 싶어하는 거겠죠. 정말 아무런 마음이 없는데 오로지 절 잊기 위해서 (잊는다는 단어도 조금 우습지만. 왜냐면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고 과거에도 아무 관계도 아니었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두 가지 선택지에서 조금이라도 무게가 가는 곳을 선택하는 게 전 옳다고 생각합니다. W가 날 좋아하면서도 결혼을 선택했기에 혹은 동성애자의 삶보다는 이성애자의 삶이 평탄하기에 그 길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종국적으로는 W의 선택이기 때문에 전 그 길에 확신을 실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W가 저를 선택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거예요, 아마도.

 

물론 부모님에게 죄송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는 하겠지만, 제가 그런 것들 때문에 W를 붙잡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저는 W가 하자는 대로 했겠죠. 여지껏 그래왔듯이.

 

이것이 W에게 책임이나 부담을 떠넘기려는 것이 아니라, W가 선택하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저희가 둘 다 말로도 꺼내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죠. W는 자신을 멈춰달라고는 하지만 붙잡아달라고는 말하지 못한다고요. 저 또한 마찬가지이고. 그건, 저희의 절실함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일거예요.

 

 

아마 W나 저나, 서로의 마음을 몰라서도 아니고, 책임감을 떠넘기고 싶어서 말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닐겁니다. 제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건, 나와의 길이 파라다이스가 아님을 알기에 W의 선택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W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건, 글쎄요, 본인 스스로도 아직은 두렵고 갈피를 못 잡았기 때문 아닐까요? 만약 갈피를 잡았다면, 그런 식으로 결혼을 고려하면서 절 떠보지는 않겠죠.

 

 

제가 만약 그냥 평범한 여자라면, 혹은 W가 그냥 평범한 여자라면 백번이고 붙잡았겠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꿈만 같을지, 저도 압니다. W와 둘이 짝짜꿍 사랑한다는 게 좋다는 거, 저인들 모르겠나요. 저도 압니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를 나 혼자 짊어질 수도 없는 것이고, W도 함께 해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그저 제가 붙잡는다고 넘어올만큼 가벼운 일인가 싶네요, 저는.

 

W가 절 원한다면 전 W에게로 갈 수 있는데, 방황하는 W의 손을 잡아끌고 내게 오라고는 하지 못하겠는걸. 알아주시면 좋겠는데..

 

 

제가 W를 결혼으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W가 결혼을 앞에 두고 마음속으로 저와 결혼을 재고 있을 때, 전 한걸음 물러서서 W의 선택에 무게를 실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제 마음을 모르시겠나요.

 

 

 

그리고 결혼할 여자분이야기는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중간에 나선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 여자를 위해서 친구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앞으로 얼굴도 보지 말라고 하시던데. 그게 맞는거라면 친구도 하지 않겠지만. 다시는 W를 보지 않겠지만. 그 여자분 때문에 W를 흔들고 싶지는 않네요.

 

 

제 글 읽으시는 분이 대부분 여자분인 것 같은데 맞나요? 그래서 W의 결혼 상대자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더 제가 밉고 화가 나시죠.

 

만약 글 읽으시는 분이 W의 부모이거나, 누나이거나, 여동생이라면 어떨 것 같으세요? 같은 남자를 좋아하는 아들이, 동생이, 오빠가 이제 마음을 정리하려고 자기 좋다는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하는데,

 

너 그거 그 여자한테 진짜 몹쓸 짓 하는 거다, 라고 말릴 수 있으세요, 정말? 결혼상대자한테는 미안하지만, 결혼하라고 하지 않으실건가요?

 

 

아니면 제가 이기적인가봅니다.

 

 

제가 오늘 좀 울컥해서 말이 너무 거칠었던 것 같네요. 따지는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저도 그냥 제가 싫습니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입장이 저도 마냥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니까.

 

오늘도 제 글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 댓글을 보고 그저 침묵하고 있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짧게라도 한 마디 하려던 건데 또 길어졌네요. 제 말들이 모순적일지도 모르겠네요. 제 생각도 마음도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읽으시는 분들의 화를 풀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제가 글을 계속 쓰는 것이 맞는 건지도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만약,

그 여자분을 만나서 사실을 털어놓는다면

그 때는 읽으시는 분들의 화가 좀 가라앉을까요.

추천수51
반대수6
베플패러독스|2015.10.02 09:43
스푸트니크님이나 W의 선택에 우리가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은 두분의 불행이 안타까워서겠지요. 어느 한사람이 용기를 내어 잡거나, W님이 결혼을 하거나.. 두 갈림길에서 어느 선택을 하든 스푸트니크님은 후회하겠지요. 그래서 전 감히 어떤 선택을 하란 조언도 못합니다. W를 위해서 옳은 선택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스스로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시는거 같아서.. 그냥.. 스푸트니크님의 지인들은 모르는 둘만의 이야기가 넘 아리네요. 그런데, 스푸트니크님.. 가슴속에 그말 못해보고 그냥 W 보내도 괜찮겠어요?? 이건 W의 선택이 아니라, 님의 선택이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그러했듯이 W의 선택에 님은 따라갈 뿐이다?? 글쎄요.. 전 그냥 회피를 교묘하게 숨긴 여린 변명같아요.
베플엉뽕|2015.10.02 14:55
답답한 마음을 누군가에게도 털어 놓지 못하고 익명으로 여기에 그나마 답답한 속 좀 풀겠다는데 왜이리들 민감하게 받아 들이고 하시는지...... 그냥 이런 사람도 있구나... 다 나처럼 내맘처럼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사는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 주세요. 스푸트니크님의 상황도 보시고요. 임금님귀 당나귀귀라고 대나무밭에서 외치던 이발사의 심정으로 글로 풀어내는 님을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본인도 충분히 아파하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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