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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치고는 어이가 없는 이야기

ㅇㅇ |2015.10.05 00:43
조회 17,304 |추천 36

확실히 10월이라 그런지 결혼식 많지 않나요. 시월에 잡힌 결혼식이 세 번 있는데, 어제랑 오늘 결혼식에 다녀왔어요. 오늘 과 선배 결혼식 다녀왔는데, 참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는 것 같아요. 마지막 여자친구를 오늘 결혼식에서 만났거든요.

 

 

제가 공대 나왔는데 그래서 오늘 결혼식 갔던 동기나 선후배들은 남자가 월등이 많았죠. 물론 여자도 간간히 있었고. 동기들이랑 홀 밖에 식장 로비라고 해야 되나. 거기 모여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누가 어깨를 툭툭 치더군요. 돌아보니까,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친구가, 선배, 하고 인사하더라고요. 저보다 한 학번 아래였는데 사귀는 내내 저를 선배라고 불렀었죠. 공대였으니까, 그냥 아름이라고 부를게요. 공대 아름이라고들 하니까.

 

저를 툭툭 친 사람이 아름이라서 진짜 깜짝 놀랐어요. 일단 오늘 결혼하는 선배가 남자선밴데, 아름이랑 아는 사이인 줄도 전 몰랐거든요. 아름이가 올 줄 전혀 몰랐죠. 그보다 놀란 건, 아름이가 아는 척을 해서 놀랐죠. 좀 안 좋게 헤어졌는데 반가운 표정으로, 선배, 라고 부르니 놀랄 수밖에 없죠.

 

 

음. 그렇게 서서 한 십분 정도 대화 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사귀다 헤어진 사람은 맞는지 좀 의문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태도에 전 되려 어색해하면서 대화했어요. 잘 지내냐, 어느 회사 다니냐, 뭐 여자친구는 있냐 이런거 물어보더라고요. 왜 물어보는걸까요 대체. 왜 내 안부가 궁금하지 싶더군요.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에는, 그냥 있다고 대답했어요. 뻔히 들킬 거짓말이긴 한데, 왠지 그렇게 대답해야 될 것 같더라고요. W 오빠랑은 아직도 붙어다니냐고 묻더군요.

 

 

아름이가 웃긴 게, 저한테는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면서 W한테는 오빠라고 불렀죠. 물론 W가 다른 학교이긴 한데.. 2년 가까이 사귀었는데 선배라고 부르는 것도 좀 웃기지 않나 싶은데. 전 계속 말 놓으라고 했는데 말 안 놓더라고요.

 

 

전, W랑 가끔 연락한다고 말했고.

저한테 연락해도 되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번호를 바꾼 적이 있어서 제 번호를 모르거든요. 제가 보수적인 건지 모르겠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우리가 연락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해줬죠. 말하고도 너무 냉정하게 굴었나 싶긴 했지만, 헤어진 사이니까 그게 맞는 것 같았어요. W는 잘 지내냐고 묻길래, 잘 지낸다고 했는데 결혼 얘긴 굳이 안 꺼냈어요. 아름이는 제 소식이 궁금한건지 W 소식이 궁금한건지 사교성이 미친 듯이 좋은건지 참, 알쏭달쏭한 여자라고 느꼈죠.

 

 

 

아름이를 처음 알게 된 건, 상병일 때였는데, 휴가 나오면서 군대 안 간 동기들, 휴가 맞는 동기들, 그 외 선후배들 다 같이 술 마시고 그랬거든요. 그 때 아름이가 나왔었죠.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통성명만 하고, 우리 과에 이런 애가 있구나, 이 정도만 알게 됐죠. 제가 1학년 마치고 바로 입대한 거라 후배들은 전혀 몰랐었거든요.

 

그렇게 몇 번 휴가 나와서 술자리에 갈 때마다 대부분 아름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공대라서 홍일점같은 존재기도 하고 꽤나 예쁨받는 애였거든요. 술자리 나오는 인원이 거의 고정적이라 저랑 아름이도 친해진 건 아니고 어색하지 않은 정도?로 지냈죠. 언젠가 아름이가, 선배는 폰 없죠? 묻더니, 그럼 편지 써도 돼요? 라더군요. 편지 써주는 거야 당연히 저한테는 반가운 일이라서, 된다고 했죠. 주소를 알려달라길래 가르쳐주고나니, 꼭 답장쓰세요 선배. 라고 하더라고요.

 

저한테는 딱히 편지 올 사람이 없었어요. 어머니가 두 번 정도 써주셨나. 훈련소에 있을 때는 인터넷으로 편지를 쓰면 그 출력물을 받는거라서, 그 땐 제법 써주시더니 자대배치 받고나니까 안 써주시더라고요. 친구놈들은 두말하면 입아프고. 입대 전엔 여자친구도 없었고.

 

 

어쨌든 복귀하고, 아름이를 잊고 있을 때쯤, 편지가 오더라고요. 별 내용은 없었어요. 그냥 육군아저씨께 쓰는 그런 보통의 내용이었어요. 힘드시죠 날씨가 어쩌구 이런거. 별 내용 없어도 그냥 편지 받는다는 것 자체가 좋거든요. 그래서 저도 답장을 쓰긴 썼는데 쓸 말이 없어서 한 장 쓰는데도 꽤나 애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렇게 저희가 편지를 주고받았고, 편지 주고받으면서 문서상 친해졌죠. (실제로는 아니고) 어느 날 아름이가 편지에 자기 사진을 한 장 넣어주고, 핸드폰 번호를 적었더라고요. 그 때까지 번호 모르고 있었거든요. 콜렉트콜이라도 괜찮다고 전화해달라고. 콜렉트콜은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카드사서 걸면 되는 거지만 사실 전화해서 할 말이 없을 것 같은 거예요. 제가 사교성이 남자들하고만 좋은거라서 여자들은 좀 어색해해요. 뭐 흔히들 남중남고공대군대. 이런 말 하잖아요. 전 남고는 아니었지만 남고와 다름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쨌거나 전화는 안 하고 편지만 주고 받았죠. 병장 달고 꽤 길게 휴가를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술자리에서 아름이가, 왜 휴가 나오는 거 말 안했냐고 하더라고요. 전, 그걸 아름이한테 말해야 했던건가 싶어서 좀 어리둥절 했죠. 그러다가 제가 잠깐 편의점 갔다 온다 그러고 바람 쐬러 나왔는데 아름이가 따라나오더라고요. 자기도 음료수 사러갈거라고. 그래서 같이 걷다가, 선배 내일은 뭐해요? 라고 묻더라고요. 다음날이 요일은 기억안나지만 주말이었는데 딱히 예정이 없어서, 별거 없다고 했죠.

 

그럼 선배니까 밥 좀 사주세요. 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랑 한 살 차이지만 그 때 들었던 생각이, 요새 여자들 진짜 당돌하다였나, 적극적이다 였나. 엿튼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복학하고나서 더 느꼈어요. 요새 여자들(자꾸 요새라고 하니까 제가 진짜 늙다리같네요) 진짜 적극적인 것 같다고. 말도 잘 걸고 폰 번호도 잘 물어보고 만나자고도 잘 하더라고요. 오히려 남자들이 더 소극적인 느낌?

 

 

밥 사달라는 소리에 알겠다고 하고 아름이가 뭐 어디서 만나자그랬나, 몇시에 만날까요 그랬나. 이렇게 말하길래 제가 반사적으로, 둘이? 둘이 만나? 라고 되물었죠. 밥 사달라는 소리가 아름이랑 아름이 동기들 밥 사달라는 말인 줄 알았는데 문맥이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좀 답답한 스타일같긴 한데 그땐 눈치가 좀 없었죠.

 

네. 둘이요. 불편해요? 라고 하길래, 아.. 그런건 아닌데.. 라고 말을 흐리고 뭐, 결국 둘이 만났습니다. 전 사귀고나서 가끔씩 아름이를 신여성라고 불렀는데, 워낙 주도적인 여성이여서 그랬죠.

 

 

아름이한테 그렇게 큰 관심은 없어서 다음 날, 밥만 사주고 갈랬는데 아름이가 영화를 예매해놨다고 하더라고요. 외국 로맨스 영화 봤는데 내용은 기억 안 나고 전 좀 지겨웠어요. 영화보고 나왔을 때가 저녁이었는데, 술 마시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그 당시엔 이성친구가 없어서, 여자랑 둘이 술까지 마시는 게 좀, 그렇더라고요. 오해사기도 싫고. 그래서 그냥 카페갔던 것 같아요.

 

 

전 왜 글을 쓰기만 하면 이렇게 길어질까요. 진짜 서론이 너무 기네요.

마지막 휴가 나오기 전에, 아름이가 면회가도 되냐고 묻더라고요. 자기도 면회 같은 거 가보고 싶다고. 그래서 오라고 했죠. 1호선타면 올 수 있는 위치라서 그렇게 부담스러운 거리는 아니었거든요. 어쨌든 아름이가 면회를 왔는데 도시락을 싸왔더라고요. 면회 온다고 할 때부터 약간 느낌은 왔는데, 도시락까지 싸온 거 보고 확실히 알았죠.

 

사실 면회오는 사람들이 가족 아니면 보통 여자친구거든요. 고맙기도 하고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가기전에 편지를 주더라고요. 편지로 고백을 받았는데, 긍정이면 꼭 전화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기다리고 있겠다고. 물론 편지 써주고 면회 와주고 이런 건 너무 고맙고 기특했지만 누굴 사귄다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전화는 안 했죠. 다만 기다릴 것 같아서 편지로 제 생각은 적어서 보냈어요. 마지막 휴가 나갔을 때도 아름이도 안 만나고 술 자리도 안 나가고.

 

다시 만나게 된 건, 전 칼복학 했는데 교필 중에 토론 수업이 있는데 아름이랑 같은 조가 되면서 친해지고 연락하고 하면서.

 

제가 2,3학년 다닐 동안 아름이도 졸업반이고 해서 학교에서 계속 붙어다니면서 거의 2년 가까이 사귀던 것 같아요.

 

 

 

 

헤어지기 전 반년이 진짜 비상식적인 연애이야기인데. 사실 이 얘기가 하고 싶었던 건데, 왜 이렇게 길어졌나 모르겠어요. 마지막 반년동안 W랑 셋이 자주 만났거든요. 그리고 아름이가 저와 W가 너무 친하다고 질투 아닌 질투? 귀여운 앙탈 같은 걸 자주 부렸는데 아름이가 양다리를 걸쳤죠, W랑. 근데 전 그걸 알고 있었고요. 진짜 병신 같겠죠.. 제가 쓰면서도 제 이야기가 진짜 암유발 이야기네요. 약간 이상한 삼각관계 같은 사이였는데, 그걸 다 알면서 만났단 게 진짜 비상식적인 만남이었던 것 같네요.

 

 

시각이 늦어서 오늘 서론만 쓰다가 갑니다.

 

 

 

 

**

그리고 댓글 하나하나 다 읽었습니다. 저는 딱히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글을 올린 게 아니었는데 오해가 있으셨나봐요. 그리고 마지막 제 글이, 제 감정이 울컥한 상태여서 그런지 아무래도 까칠?했었나보네요. 전 전혀 화나지도 않았고 댓글에 대해서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조언해주신 댓글에 대해서 아니꼽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들 받아들이셨나 모르겠네요. 저 그렇게 좀생이가 아닙니다. 아마 상냥하지 못한 제 말투가 문제인가봅니다. 오해를 푸셨으면 좋겠어요. 댓글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만큼 제가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고요. 물론 따뜻한 댓글 너무 감사하죠. 하지만 쓴 소리 했다고 기분 나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실제 제 삶은 더 지옥같은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베스트댓글이 아주 박력있는 글이던데, 잘 새겨들었습니다. 고민이랍시고 글을 올렸던 건 아니고 그냥 회상하는 차원에서 글을 올렸던거였습니다. ‘지금 연애중’에 올린 건 동성채널이라서 올린게 맞고. (다른 곳에 올리면 모르고 읽다가 깜놀할까봐요) 쓴소리하면 W 쉴드친 것도 맞고 제가 질질 흘리고 다닌 것도 다 맞습니다.

 

 

물론 후회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느 쪽을 선택했어도 후회는 있을거라 생각하고 제 선택을 번복하지는 않을거예요. 아마 제 태도가 모호해서 오해하셨나본데, 전 처음부터 잡을 생각 없었습니다. 다만 제 이야기에 너무 안타까워하시고 (혹은 비겁하다느니 역정내주시기도 하고) 진심 어리게 조언을 해주시니 그에 대해 입 닫고 귀 닫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제가 이렇게 선택한 데에 대한 피드백은 해야 할 것 같았고요. 결국 변명이었지만 어쨌건 제 생각은 이러했다고 커뮤니케이션의 일환으로 했던 말들이 불쾌하셨나봅니다.

 

 

그리고 예전 글에도 쓴 적이 있는데, 저와 같은 사람만 있으면 누가 어려운 여건 극복하고 사랑을 쟁취하냐고 했었죠. 전 다른 동성커플이 비현실적이라니 소설이라느니 생각하지 않습니다.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채널에 글 올리시는 분들이 대부분 그런 분들이겠죠. 다만 저 같은 사람도 있다, 그렇게 받아들여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제가 쓰는 글이 행복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 만큼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그냥 저런 찐따도 있네, 병신~ 하면서. 자학하는 건 아니지만, 제 글 읽으면서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결말 진짜 욕나오는 책이나 영화들 있잖아요? 그런 거 보는 마음으로 가볍게. 영화 미스트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결말이 진짜 독특하고 좀 화나지 않나요.

 

댓글들에 대한 설명이 다 됐나 모르겠네요. 제 댓글보고 전쟁터인 줄 알았어요. 너무 날 선 댓글들이 많아서. 저는 쓴소리도 달달한 소리도 애정이라 생각하고 다 기쁘게 감사하게 읽고 있다는 거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좌우명이, ‘양약고구 충언역이’거든요. 제 마음 알아주시길 바라면서, 항상 읽어주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부턴 글을 좀 상냥하게 써볼게요.

 

 

추천수36
반대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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