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낳았어요.
뭐가 그리 급했는지 애 같은 6살 연하 신랑이랑 키우겠다고 애를 낳았네요.
결혼을 하긴 할거지만 아직 혼인신고도 안 했고, 일단 직장이랑 가까운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있어요.
신랑은 처가살이 눈치가 보이는 건지 책임감을 느끼는 건지(둘 다 겠죠?) 매일 야근하고 들어와서 일찍 나가고 그래요.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일 처음 했던 말이
"내가 제왕절개 한다고 했잖아!!"하고 소리를 빽 질렀던 것 같아요.
그리고 눈에 들어온게 아직 빨간 핏덩이 같은 애기였는데...그때 그게 너무 미안해서 애기 얼굴을 잘 못보겠어요..
뭔가 죄책감이 들고, 준비 안 된 부모 때문에 이 아이의 미래가 불행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엄마가 수발 들어준다 해서 모아둔 돈도 많지 않고 하니까 일단은 집에서 산후조리하고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내가 중학교 때부터 살던 우리 집인데...
지금은 같은 자리에 같지만 다른 내가 앉아 있다는게 싱숭생숭하면서도 묘하게 우울하고 그래요.
이런게 산후 우울증인가 싶기도 하고...
그 와중에 아빠가 자꾸 비움 다이어트인가 하는 다이어트 보조제랑 각종 차 같은 거 자꾸 사다주시는데 안 그래도 출산 이후로 임신하기 전보다 13kg가 쪘거든요.
근데 자꾸 그런 살빠지는 약 주니까 나한테 살 좀 빼라는 건가 싶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유분수지 싶고 그냥 가만히 있는게 도와주는 건데
계속 부엌에서 이상한 거 하니까 엄마가 짜증 소리내면 저는 또 그 소리 듣기 싫어서 짜증나고 그랬어요.
그리고 뭔가 제가 자꾸 나쁜 년이 되는 것 같은거에요...
다들 춥다고 하는데 저는 더워서 베란다 문 열어놓으면 다들 말없이 겉옷 하나 더 걸치는데 그것도 보기 싫고
밥 먹고 나면 아빠가 꼭 비움약이랑 미지근한 물이랑 입원환자 약주듯이 가져다 주는데 싫은 소리 하기는 미안하고
누가 옆에 오는 것 자체가 다 귀찮고 싫은 그런 상황인데 그걸 어떻게 말해요 대인기피증도 아니고....
그래서 신랑한테 우리 작은 원룸으로 가더라도 독립해서 살자 이랬더니 너무 이르지 않냐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엄마아빠한테 말을 하려했는데 보나마나 산후조리 더 해야하는데 어딜가냐, 애기 어린데 어쩔거냐 이럴게 눈에 훤히 보여서...
솔직히 우리가 철없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일단 편지를 써서 아빠방에 놔야겠다 하고 아무도 없을 때 아빠방 들어갔는데 A4용지가 빼곡히 쌓여있었어요.
얼핏 봤을 때 형광펜도 막 쳐져있고 해서 아빠가 무슨 공부를 다시 시작하나 싶어서 봤는데....
산후조리, 산후우울증 그런 관련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모든 내용은 다 스크랩해서 뽑아놓고 공부한 거더라구요...
다 PDF로 변환해서 화면 통째로 출력하셨는지 인터넷창 전체가 다 출력돼서 글자도 작게 뽑혔는데 그 옆에 돋보기 안경이 놓여있고 옆에 공책에는 필기가
'일차적으로 살이 잘 빠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이어트, 임신 전 체중으로' 별표....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 했던건데 저는 역시 철없는 애라서 애가 무슨 애를 낳고 키운다고 여름만해도 애 낳겠다니까 노발대발하던 아빠였는데...
아빠는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저는 이게 뭐하고 있는건가 너무 한심하더라구요....
그래서 편지는 그래도 꾸겨서 찢어서 버리고 뭔가 밝은쪽을 보려고 그날부터 많이 노력했어요.
애기 한글 정도는 제가 떼게 해주고 싶어서 동화, 동시 이런거 만들면서 소일거리 삼고
운동도 하고, 운동하려니까 골반이 제일 문제더라구요.
밥 먹고 나면 딱 소파에 앉아서 "아빠 비움!!" 이렇게 나름대로 발랄하게 소리치면 아빠가 "어어~"하면서 가져다 주고
한 번 휴가 냈다가 그 모습보더니 신랑이 질투도 했어요. 장인어른이 누나랑 신혼기분 내는 것 같다고 ㅋㅋ
그래서 그렇습니다. 아직도 누나누나 거리는 애 같은 신랑이랑 여전히 철없는 애 엄마랑 애 셋을 돌보는 엄마랑.... 아빠.
제일 어린 갓난애기 얼굴 보면 녹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가 한 집에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