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달콤쌉싸름한 30살(13)

리드미온 |2004.01.20 12:21
조회 23,738 |추천 0

'김정민님에게 이은수님으로부터 음악메일이 도착했습니다.'

제목을 보기에도 업무 메일같지는 않았다.

같은 팀에서 근무하면서 메일이 업무상 메일이 오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음악메일이라니....

분명히 그 둘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메일이었다.

나는 슬쩍 은수의 자리 쪽을 보았다. 은수는 어디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착한 마음과 나쁜 마음이 또 싸우고 있었다.

'봐선 안됏'와 '보면 어때?'라는 갈등....

이미 보고 싶은 마음이 51%는 넘은 것 같았다.

그러나 본다고 해도 걱정이 있긴 했다.

메일을 본 상태로 남겨 놓을 수는 없으니 보고 난 후에는 메일을 아예 삭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어설픈 계략이지만 나름대로는 메일을 보고 난 후 뒷처리 계획까지 세워두었다고 생각하니

보고 싶은 마음이 90%를 넘고 있었다.

 

내가 메일을 삭제해서 김대리가 그 메일을 못본다면?

그건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은수가 김대리에게 확인할 수도 있다.

사람에게는 의사소통 수단이 메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확실한 직접 묻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편지가 오가던 예전에도 편지를 보내고 직접 편지를 받았냐고 물어보기도 했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부가 배달을 해주던 그 시절에도 편지가 도착하지 않는 사고도 있었다.

아마 김대리가 메일을 못받았다고 생각하면 은수가 먼저 메일을 받았냐고 물어볼 것이다.

만약 은수가 김대리에게 '제 메일 못받으셨어요?'라고 물었는데

김대리가 '아니...'라고 대답하면....

'분명 보냈는데...어쩐 일이지?'

하며 메일 회사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완벽한 책임전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팀내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팀장으로도 알 권리가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고 하면 나도 업무 분장을 다시 해야할지도 모르는 거고...

여러 모로 메일을 보는 것이 나에겐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인 '보고 싶다'에서 이젠 '봐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신이여.....오늘은 딱 한번만 나쁜 일을 하겠습니다.

나는 마우스를 제목에 대고 과감히................클릭...............해버렸다.

 

음악은....'왕과 나'의 'Shell we dance?'가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 메일의 배경으로 쓰인 그림에는 예쁜 여자의 캐릭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내 양심의 가책을 마구 찔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클릭한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김대리님.....

 웬 음악 메일인가...놀라지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혹시 병원에 계시면서 메일은 읽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제 병문안 다녀오면서 다리가 아프신 김대리님 걱정보다는

 좋아하는 사람 병문안 할 수 있었어 저는 기뻤답니다.

 왜 좋아하는 사람 아플 때 옆에서 챙겨주고 그러는 거 있잖아요.

 김대리가 안계시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역시...저에겐 김대리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네요.

 제가 앰블런스 안에서 물어봤던 거 대답 ... 아직도 기다리고 있어요.

 

 추신: 전에 저에게 뮤지컬 괜찮은 거 없냐고 물어봐서 알려드린 '왕과 나'

          아쉽게도 이번 일요일이 마지막 공연이라 일단 일요일 거로 예약했는데

          혹시 그 날도 걷기 불편하시면 취소할게요. 알려주세요.

          이 노래 '왕과 나'에 음악이에요. 일본 영화 '쉘 위 댄스'에도 나왔던....

 

"한 팀장! 매출 자료 ....."

이부장의 목소리에 난 놀라서 일단 메일 창을 내리고 엑셀 창을 띄웠다.

 

"네..지금 김대리 컴퓨터에서 찾고 있어요. 5분만 기다려주세요."

일단 대답은 했으나 당혹스런 기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김대리의 토요일 뮤지컬 '왕과 나'의 예약과 취소, 은수의 일요일 뮤지컬 예약....

무슨 실타래 엉키듯이 이렇게 꼬여 있다니...

거기다 은수가 앰블런스 안에서 말했다는 것은 설마......사랑의 고백?

그럼 스키장에서 김대리가 다리를 다쳤을 때 놀라서 당황해했던 은수의 모습은 겁많은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애정의 표현이었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둔한 사람이었나...둘 사이에 어떤 이상한 기류가 있음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일단 메일은 지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은수는 일요일까지 김대리의 전화를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나의 죄를 은폐하려면 메일은 삭제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은수는...?

 

그 때 메일의 위쪽에 버튼 하나가 발견되었다.

'안읽은 상태로 표시'

 

오호라.....날 살려주는구나...이렇게 나쁜 일을 돕는 시스템이 있다니....

'안읽은 상태로 표시'라....

나는 얼른 클릭을 했다.

 

역시 인간은 기계를 지배한다. 읽은 메일마저 안읽은 메일로 돌려놓을 수 있다니....

나는 이제 양심의 가책도 벗어날 수 있었다.

나만 모르는 척 하면 된다. 아니...나도 모르는 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자기 최면이리라...

 

그러나....은수는 김대리를 왜 좋아하는 걸까?

그렇다면 김대리는 은수를 좋아하는 걸까?

앞으로 둘은 어떻게 되는 걸까?

 

잊어버리려 해도 그 두 가지 의문 때문에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저녁 때 민준을 만나 런던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는....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고 있었다.

한국 어느 한구석에서 회사 생활을 하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왕족이라도 된 듯한 기분....

비행기의 퍼스트클래스는 이코노미 클래스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같은 비행기 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널찍한 의자와 많은 스튜어디스 거기다 음식도 정식 테이블보를 깔아주고 컵도 진짜 유리컵, 포크나 나이프도 일회용 플라스틱이 아니라 고급 식탁에서 쓰이는 진짜 나이프와 포크였다.

그 전까지는 내가 이코노미 클래스라서 일회용 식기로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 안이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퍼스트 클래스 첨이지?"

민준이 물었다.

나의 어색한 행동들이 눈에 거슬렸을까?

 

"하긴...나도 퍼스트 클래스는 두번째다...이번에 한국에 올 때랑 지금...첨 미국에 갈 때... 난 그 때 비행기 처음 타봤었거든....심란했지...아무 예정도 없이 맨주먹으로 도전하겠다는 결심만으로 가던.....그땐 내가 로스쿨에 다닐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

 

'로스쿨이라면 민준은 변호사가 되겠다는 건가?'

하긴 지금까지 민준에게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민준은 변호사가 되는 거고...그럼 나는?

 

3년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아무런 비전도 없어보이던 아르바이트 생과 회사의 대리...라는 차이보다

오히려 지금의 민준과 나의 차이가 더 커진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민준과 함께 있을 때 가끔 불안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예전에 민준이 스스로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이젠 내가 그런 느낌 때문에 자꾸만 위축되는 것 같았다.

 

"그리스에 그런 동상이 있대...앞머리가 무성하고 뒷머리가 대머리고 발에 날개가 달린...사람들은 그 동상을 보며 흉칙하다고 하지만 다들 그 동상의 설명을 보면...감동을 받는데...그 동상의 설명이... 내가 앞머리가 많은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얼른 알아보고 잡기 위한 것이고 뒷머리가 없는 이유는 내가 돌아선 후에는 잡을 수 없게 하고...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내 이름은 기회이다....라고...나에게 지우..넌... 기회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거야..."

 

민준...너야 말로 나에게 행운의 여신이야....

민준 말대로라면 나에게 민준은 앞머리를 보여주고 잡으라고 손짓하는 기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사랑의 기회일지도....

지금 놓치면 영영 기회의 뒷모습만 보며 통곡을 해야만하는 것은 아닐까....

민준.....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민준도 나에게 그런 마음일까?

 

런던의 히스루 공항에 내렸다.

대학교 때 왔을 때는 대도시의 공항답지 않게 지저분하고 퀘퀘했으나 이젠 말끔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작년 크리스마스 전에 본 '러브 액츄얼리'라는 곳에서 영상으로 보았듯이 이젠 완벽하게 신축을 끝낸 것 같았다.

 

"여기 러브액츄얼리 첫장면이랑 마지막 장면에 나왔던 곳인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민준도

 

"너도 그 영화 봤니?"

라고 물었다.

 

"그 영화보면서 런던 나오길래 네 생각했었다. 예전에 지우가 런던에 가고 싶다고 했었지....라고"

나는 그 영화를 볼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금방 런던에 올 수 있을지는 몰랐는데....

 

"지우야..이틀밖에 안되지만...우리 많이많이 놀다가자...나 타워브릿지도 보고 싶고...빅벤인가..하는 시계도 보고 싶고..."

민준은 마치 어린 아이가 소풍을 나온 것처럼 들떠서 말했다. 그의 미소는 너무나 사랑스럽다....당장이라도 키스해주고 싶을 만큼....매력적이며 유혹적이다....

 

-----------------클릭, 달콤쌉싸름한 14편 보러가기, 이 글씨를 꾹 누르시면 됩니다------------------

 

 

☞ 클릭, 첫번째 이야기부터 보기

 

 

 

 

친구에게, 연인에게 게시물로

새해 연하장을 보내세요~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