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뭐라고 많이들 읽어주셨네요.
제가 겪었던 시집살이 중에 몇 가지만 쓴 건데 꽤 발암글인가 봅니다 ㅎㅎㅎ
9년동안 겪은 걸 일일히 다 나열하자면 여기 쓴 것 하고는 비교가 안되게 많아요.
장편 대하소설 30권 쯤은 되지 싶습니다.
9년 동안이나 버티고 살았던 이유는 뭐니 뭐니해도 아들 때문이었죠.
없는 살림에 부모까지 이혼해서 살게 되면 얼마나 가여울까 생각하고 그냥 제가 다 참고 버텼던 게 9년이 눈깜짝할 새에 흐르더군요.
그 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기에 그랬던 거죠..왜 그러고 살았냐는 물음엔 그렇게밖엔 대답할 것이 없네요.
댓글 읽다가 여러분이 쓰신 글에 일일히 달기가 번거로워 추가글로 씁니다.
아이는 제가 안 키웁니다. 키울수가 없었어요.
별거를 결심하던 당시 아이 학교들어가기 전 해였는데 남편 집안은 거덜날 대로 거덜나고
남편의 실직상태가 장기가 되어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리니지에 미쳐서 게임만 하고 앉았는 남편한테 택배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아무 수도 없었고 남편이 자기 부모의 대출 빚을 떠안아서 그 빚도 갚아야 하는데
실직에 먹고 살 길도 묘연하니 어쩔수 없이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친정에 돈을 빌려 트럭을 사고 친정집에 얹혀 살았습니다.
저희 집은 남녀 차별이 심한 집인데다가 친정아버지는 막말 종결자에요.
여자도 집에 있는 꼴 못보며 가정 살림은 다 하고 육아는 독박에 일도 해서 돈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죠.
그런 집에서 벗어나고자 했다가 그래도 기댈데는 거기밖에 없다고 들어가니
갖은 분란만 일어나고 결국 10개월 살고 나오게 됐습니다.
시부모와 남편은 자기 아들 험한 일 해본적 없이 자랐는데 밥도 한숟가락 먹일 때마다 천원씩 줘 가며 키웠는데
너도 같이 택배해라 해서 같이 다녔어요 ㅎㅎㅎ
아이는 당연히 제가 못키우고 시골에서 시부모가 맡았습니다.
제가 다른 직업을 갖겠다는 것도 결사 반대이고 자기 아들 몸 고되니 일감 덜어라 이 논리요.
그러니 막일밖에 저도 할수가 없었던 상태였구요.
한달동안 8킬로씩 빠지고 두통은 이틀에 한번씩 병원에서 주사를 안 맞으면 밤에 잠을 못잘 정도로 심각해졌어요.
이러다간 내가 내 명에 못 죽겠구나 생각이 든게 그 즈음이었습니다.
자식도 무능한 남편새끼 때문에 내 손으로 못 키우고 택배일 다녀서
시부모 진 빚을 몇년이고 다 갚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살고 싶은 생각이 들겠어요?
어느날 그냥 가출을 했습니다.
친정에도 못 가고 수중엔 돈 한푼 없어 갈 곳이 없어서
그 달치 생활비 25만원을 들고 무작정 지금 사는 도시로 전철을 타고 흘러와
고시원에 보름치 방값을 주고 들어가 살기 시작해서
먹고 살랴 내 앞으로 된 빚 처리하랴... 힘들게 살았어요.
그런 상황에 아이는 데려올 수도 없었는데다가
전남편은 이년이 바람이 나서 나갔다고 모함을 했고요 ㅎㅎㅎㅎ
밤낮 지 놈이랑 택배 배달하러 다녔는데 누구랑 바람이 났다고 어이가 없더라구요.
거기에 대해서도 자세히 쓰자면 참 길기도 하네요, 그건 생략할게요 맘도 슬프고요.
강아지가 제일 불쌍하다고 하신 분, 제가 강아지 건사를 잘못한건 맞습니다 제 책임이죠.
근데 애가 잘못하면 쏟아져 나올지경이 되었던 터였고 그 당시 대학병원 입원해 있다가
차에 실려서 친정 간거라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었네요.
그 이후로 강아지는 마음아파 안 키웠습니다. 강아지가 간 곳은 가든하는 집이라 했는데
고깃집이죠..식용은 안됐을 거예요 워낙 잘 생긴 데다 같은 시츄 중에 비싼 몸값 지녔던애라.
아이 앞으로 대출이 안된다는 분 계시는데요
적금을 아이 명의로 들고 3개월 부은 뒤에 대출해주는 상품이 새마을 금고에 있어서
시어머니가 대출받았어요.
시골 동네 새마을 금고라 웬만하면 편의 봐주고 그러더군요.
전 이제 나이도 꽤 들었지만 재혼과 출산은 다신 안하기로 마음 먹었기에 노후대비만 하고 있고 생활에는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제 손으로 키우지 못한 아이가 제 가슴엔 대못이지만 아이는 이미 훌쩍 커버렸네요.
에미가 돼서 못키워 주어 미안하고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와요.
아이와 제 삶은 어디가서 보상받나...그저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됐지 생각하고
제가 그저 할수 있는건 나중에 키워주지 못한 보상으로 집이나 한채 물려주자는 생각으로 삽니다.
그걸로 보상이 되랴마는 제가 지금 와서 할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네요.
길러주지 못한 못난 어미지만
씨다른 형제 안 만들고 죽을 때 뭐라도 남겨주는 걸로 제가 할 수 있는건 이것밖에 없네요.
이해 못해주겠지만 그건 제 죄값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저 남은 인생 구박 안 받고 눈치 안 보면서 편히 사는게 제 지금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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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에 신박한 시어머니 보고 저도 생각나는게 있어서 써 봐요.
전 갖은 시집살이에 병신같은 남편때문에 만성 두통에 9년을 시달리다가 이혼한 사람입니다.
우리 아들 약사며느리 볼 수 있었다 부터 해서 시누이들 본받아라 까지
안 당해본 시집살이 없을 정도로 종류별로 다 겪어 본 것 같네요.
앨범에 있던 대학시절 사진들 중에 남자교수님 같은과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보고선
어딜 감히 남자와 찍은 사진을 시집오면서 가져오냐 하고 남자들 얼굴을 다 오려내질 않나,
무능력한데다가 치맛폭에 싸여 사는 남편이 결혼 후 3달만에 실직을 하자
남자 기죽이는거 아니라고 니가 벌어서 먹고 살아라,얘는 천천히 직장 알아보게 맘편히 쉬게 하고
넌 내가 당장 직장 알아봐주마 돈 벌어라 하고는 동네 유치원에 취직하라며
(제가 2급교원자격증이 있고 학원강사를 몇년 했었는데 결혼하면서 남편 사는 지방 멀리로 내려오는 바람에 일을 그만두었던 상태)
본인이 유치원 찾아가서 사람 구하냐고 설레발 치기.
제가 임신막달 다 되어서 조산끼가 있어 8개월부터 대학병원에서 누워만 있으라고 했었는데 니네집 가서 애 낳고 오라고 여기서 니 뒤치닥꺼리 못해준다며 날뛰었는데
친정가서 그렇잖아도 맘편히 조리하려 생각했었고 8개월까지 심하게 일을 해서 유산기가 생긴것이어서 병원 입원하고 그러니 정신도 없었어요.
부랴부랴 입원했던 병원서 퇴원해서 부른배 움켜쥐고 서울로 왔는데
우여곡절 끝에 겨우겨우 해산하고 (자궁 들어낼 뻔했음) 돌아가보니
처녀때부터 키우던 강아지를 자기 손주한테 해가 된다며(작은 시츄입니다) 고기파는 식당에 주어 버렸더군요.
울고불고 도로 찾아다 달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하고 애나 기르라며.
그곳이 어딘지 몰라 찾으러도 못가고 그렇게 헤어지고 말았어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제 옷 중에 청바지 단 부분에 쇠고리 장식이 조르륵 붙어 있는 것이 있었거든요.
일하고 들어오는데 세상에 시부모 둘이 마주앉아서
초가위라고 해야 하나?? 실밥 뜯는 가위 있잖아요?
그걸 가지고 사이좋게 제 옷 장식을 하나 하나 뜯고 앉아 있는걸 봤네요.
기가 탁 막혀 말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하는소리가
여자 옷이 이게 뭐냐며 해맑은 얼굴로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자기네가 뜯어줄테니 입으라고...
지금도 문득 문득 생각하면 홧병이 도지는 것 같아요
그땐 어떻게 그걸 참고 살았었는지.
애 있으니 참자 참자 하고 9년을 살았는데 더 살다간 내가 죽을것 같아서 이혼하고 사는 지금
왜 진작 빨리 이혼하지 않았나 그게 제일 후회됩니다.
이혼도 버팅기고 안해줘서 별거 7년만에 도장찍었네요 ㅎㅎㅎ
전남편 이혼도장 찍으러 와서 갖은 거짓말을 다 늘어놓고 돈 잘 버는 것처럼 말하면서
미우나 고우나 애엄마가 그래도 다른 여자보다 낫다며 합치라고 지네 엄마가 말했다면서
은근슬쩍 수작거는데 토나올 뻔한거 꾹 참고 절차 마쳤어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9년 참지않고 바로 이혼할텐데
바보처럼 왜 그러고 살았나 어떻게 그걸 견뎠나 생각만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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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분 중에 위자료 받았냐는 말이 있어서 추가해요.
위자료는 1원도 못받았어요.
그집 빚이 몇억에 아들딸부터 해서 저까지 명의 빌려 대출을 안받은 자식이 없었고
형편이 이렇다는걸 아이 낳고서 말해줘서 알았구요,그전엔 감쪽같이 절 속였어요.
하다하다가 갓난쟁이 제 아들앞으로 적금대출을 했더라구요 저몰래.
그런집구석에 무슨 받을 돈이 있겠어요.이혼 도장 찍은것만도 감지덕지죠.
그나마도 이혼 안해준다고 버티고 버티고 하다가 작년에 이혼했어요.
약지 못했던 제가 바보였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