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봐도 진짜 너무너무 설렌다... 솔직히 이 선배랑 나랑 마주칠 때마다 엄청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있었거든. 그래서 그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적어볼게. 아무래도 좀 소설같은 형식이 예쁘겠지?
***
모 국제학교 (천재, 재벌, 정부 인물들만 다니지만 난 장학금 타먹으면서 등교함) 금요일, 학교 끝난 후
"알았어. 그럼 알리사랑 줄리아는 세포를 맡고, 제이콥이랑 루이스는 분자 쪽을 조사하는거지?"-응. 포스터는 오늘 내로 끝내기 힘들텐데, 우리가 월요일에라도 좀 도와줄게.-"고마워! 그럼 조사된 자료는 메일로 보내줘."
뚝.
고1의 첫 학기. 과학의 조별과제로 나는 포스터 그리기에 당첨됐다. 다른 조원들의 그림실력은 너무나 절망적이라 무엇이 육각형이고 무엇이 삼각형인지 구분이 안가기에 내가 맡았다.
학교가 이미 끝났기에 교내의 스*벅스에서 딸기 프라푸치노를 한 손에 안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바람 때문에 쌀쌀하지만 아직은 햇빛이 더 따뜻했기에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야!! 고블린 좀 잡으라고~~""아니 마법계열 안통함""렉인가? 아!! 힐러 뭐함??????? 팀원하나 죽었잖음 오마이갓"
역시 방과후의 도서관은 소란스럽다. 사서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서관의 2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도서관의 2층에는 나만의 비밀장소가 있다. 비록 아무도 안쓰는, 탁자 하나랑 엄청나게 큰 창문 하나가 있다는 것 빼고는 좀 작은 방이었다해도 비밀장소다.
종이와 색연필을 늘어놓고는 물의 분자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역시 옥상정원이랑 연결되어 있는 방이라 차분하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느새 단백질까지 다 그렸을 무렵,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왔다.
6개월 동안 다른 사람이 이 방으로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기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들어온 사람은 한 학년 선배, 나랑 같은 오케스트라 수업을 듣고 있다. 그마저도 나는 플룻이라 앞 쪽에 앉고 선배는 첼로를 연주하여 뒤 쪽에서 수업을 듣기 때문에 말을 해본 적은 몇 번 되지 않는다.
"어, 안녕하세요."
일단 어색하니 말을 건네보도록 하자.
자세히 보니 선배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훗날 알게된 사실이지만, 선배는 우리 학교의 수영팀과 농구팀의 에이스라 매일 이런 스케줄을 소화해내고 있다고 한다:
1. 농구팀 연습2. 샤워3. 수영팀 활동4. 샤워
아무튼 그는 내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인사를 했다.
"어, 안녕. 일이 바쁘십니까?""네. 과학 선생님이 미친 것 같아요."
젠장. 역시 내 사교성세포는 오래전에 말라죽은거야.
하지만 선배는 가벼이 고개만 끄덕이며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있어 뭐라고 더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어쩐지 방 안이 더워지는 것 같아 창문으로 걸어가 작은 틈새를 만들었다.
그러자 결이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커튼과 우리 둘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선배는 참 잘도 잔다. 코를 골거나 뒤척거리지도 않아서 빨리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월요일에는 알리사나 줄리아들의 도움은 필요없을 듯 한데.
마침 다음 주의 '더 보이스'라는 대회? 음... 뭐 그런 비슷한 이벤트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 기억났다. 비밀장소의 참문 반대편에는 또 다른 문이 하나 더 있는데, 그 문을 열면 방음이 잘되는 피아노실이 있다.
선배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방과 포스터를 그대로 책상 위에 놓아둔 채로 피아노실에 들어갔다.
벽에 붙어있는 피아노 바로 위쪽에도 큰 창문이 있어서 악보가 잘 보였다. 일단 피아노 반주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15분 쯤이 지났을까, 나는 반주를 다 외우고 노래를 연습하기로 했다. 나름 나쁘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자부하고 있고, 실제로도 피아노 소리와 제법 잘 어울렸다.
"...So say goodbye...""...To turning tables."
어? 으음? 으어흐으음??
내가 끝내야 할 소절에 다른, 더 낮고 허스키? 음, 갈라진 목소리가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새 깨어난건지 선배는 문 앞에 서있었다. 문은 열고 연습실 안으로는 들어오진 않은채.
"..아, 연습실 쓰실거에요?"
차곡차곡 악보를 모으기 시작하자 선배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냥 구경 중이었습니다."
영어에는 딱히 경어의 개념이 없지만 예의를 차려 말하는 방식은 있다. 그리고 얼핏 선배의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다. 말투는 아빠에게서 영향받은건가.
"뭐, 어차피 끝났으니까. 연습실은 쓰셔도 돼요. 버스가 올 시간도 거의 다 됐으니까, 저는 그냥 짐 챙겨서 나갈게요.""...그렇다면야."
비밀공간, 내 아지트의 문을 닫고 나서야 비로소 명치가 파르르 떨려왔다.
'우와아아아ㅏ아ㅏ아ㅏㅏㅏㅏ아ㅏㅏ 남자 생명체랑 그렇게 오래 얘기한거 처음이야야ㅑㅏㅏ아아ㅏㅏㅏ아ㅏ아ㅏㅏㅏㅏ'
내 내면은 지랄발광하고 있었다.
"...아. 헐."
악보를 정리하긴 했는데 안들고 왔다. 여러분, 정신줄이 이렇게나 중요합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연습실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끼익, 문이 열렸다.
밝은 방 안, 선배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 있습니다.""죄송해요. 악보를 두고 가는 바람에. 그럼, 다음 오케스트라 수업 때 봬요.""아닙니다."
결국 민망한 재회를 마치자마자 다시 얼굴을 볼까봐 후다닥, 방을 뛰쳐나갔다.
버스 안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아직 출발할 때 까지는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이어폰을 꽂고 책을 펼쳐들었다.
똑똑.
그냥 애들이 부딪힌거겠지. 노크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똑똑.
누구지?
똑똑똑.
반복되는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자, 바로 밑에 뽀송뽀송하게 마른 부드러운 회갈색 머리카락과 휘어진 푸른색 눈이 보였다.
"선배?"
아니, 사람 무안하게 왜 또 나타난걸까. 또 내가 잊어버린게 있나? 으아아아악 이렇게 쪽팔릴 수가아아아아아
[잠깐 나와줄 수 있을까요?]
입모양으로 대충 이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버스 밖으로 나갔고 선배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또 잊어버린게 있나요?""아닙니다."
또, 또 그 부담스러운 말투.
"그럼 왜 부르셨어요?""아, 할 말이 있어서요. 그다지 중요하진 않습니다. 바쁘시면 가보셔도...""전 괜찮습니다."
뭘까? 괜히 손에 찬 땀을 슬그머니 바지에 닦아냈다.
"그게...""어이, 학생! 버스 출발한다! 빨리 타도록.""음, 가는게 좋겠습니다.""그런 것 같네요.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얘기해주세요.""네. 그리고 여기, 가면서 드십시오.""어? 감사합니다."
싱겁게 끝나버린 대화다. 뭔가, 감칠맛나는 무언가가 있었는데. 아쉬운 마음에 선배가 손에 쥐여준 것을 확인했다.
석류 가향 녹차.
맛있는 브랜드다. 뚜껑을 따고 비닐 커버를 벗기려고 하는데, 하얀 무언가가 떨어졌다.
이게 뭐지? 주워보니 뭔가가 쓰여진 종이다.
[좋아합니다.]
응?
으응??
흐으음???????
사고가 정지되었다. 버스는 이미 출발했고, 마음은 급했다. 어딘가의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뭐, 선배를 짝사랑했다기 보다는 짝좋아한거지만. 아니, 아니. 사실은 모르겠다. 나는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창문을 활짝 열고 배기가스를 들이마셨다. 좋아, 이 매캐한 냄새. 정신이 번쩍 드는군.
"리엄!"
선배, 까지 소리치려고 했지만.
"좋아해!"
기습공격에 입이 다물렸다. 와, 이거 뭐지 도대체.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어 뒷편의 그가 잘 보였다.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심장이
쾅,
떨어지는 느낌이다.
***
네........... 연애고자의 심심한 설렘썰이었습니다................... 저는 한*미 혼혈이라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해요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모쪼록 썸도 무난하게 탔던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은 되게 설렜어요.
지금도 설레고, 아직도 연애고자고, 또 선배랑은 6년째입니다만, 리엄은 저를 2, 3년 쯤 짝사랑했다는군요. 첫사랑인 것 같습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방에 들어온 건 그저 우연.
으음.... 사실은 그 방에서 자고 있지 않았대요. 그냥 민망해서 자는 척.
물론 더 오랫동안 좋아해준건 선배지만 이제는 제가 너무 좋아해서 심장이 아픕니다. 으앙 아파
그날 이후로 뭐, 사귀고, 뭐, 뭐..... 그랬죠 하핫
그냥 다음 달에 결혼한다구요! 그냥 그렇다구요! 저는 현재 29살, 선배는 30입니다.
뭔가 두서가 없어졌네요. 여러분도 예쁜 사랑하시고 이번 크리스마스를 옆구리 뜨끈하게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Liam, I love you. I've been too shy to tell you this often, so allow me to say this in my wedding dress (which you've never seen before, so be prepared!). I swear an oath to make you as happy as I am able to.
으음, 그리고 유진아! 연애사업 도와줘서 고맙닿ㅎㅎㅎ 준수랑 백년해로하셈
올해를 일찍 마치는 20대였습니다. 내년은 앞자리 수가 바뀌네요....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