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봤던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나고 대충 골자만 소개하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 제목이 기억나면 링크라도 달텐데.
한 90년대 초인가? 어떤 20대 초반쯤인가 되는 남매가 집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함. 남매는 홀어머니랑 좁은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고, 사건 당시 엄마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음. 남자는 방에서 살해당하고 마루에서 여자가 살해당했는데, 여자 손에 머리카락이 한줌 쥐어져 있었음. 검사결과 머리카락은 본인의 것으로 나왔고, 경찰은 칼에 찔린 고통에 자기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것이 아닐까 추정했다고 함.
근데 사건 조사가 진행될수록 엄마가 점점 수상함. 내가 정황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당일 행적에서도 여러가지 이상한 점들이 발견되고, 심지어 알리바이에서 중요한 인물인 만났다는 남자가 공범일 수도 있는 정황들이 발견되고, 살해당한 남매가 원한 살만한 일도 전혀 없는데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라 금전을 노린 범죄로도 보기 힘든데 엄마가 수령인으로 되어있는 거액의 생명보험이 남매에게 걸려 있었고, 보험금을 엄마가 수령한 정황까지 포착됨. 아마 이 쯤에 와서 이미 방송을 보던 100명 중에 99명 이상은 엄마가 범인이라고 거의 확신했을 거임.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당시 유전자 검식 기술이 아직 부족해서 머리카락으로 알 수 있는건 "모계혈통" 정도까지임. 무슨 말이냐면 이 머리카락의 주인과 피해자인 딸이 같은 모계혈통이라는거. 즉 머리카락의 주인은 피해자 본인 아니면 엄마인거임. 근데 처음에는 수사팀이 엄마가 범인일 거라고 생각을 아예 못하고 초동수사의 초점을 잘못 맞춰버린거야.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던 거지. 유일한 물증이 머리카락 뿐인데 이 당시 기술로는 이걸로 엄마를 피의자로 특정지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결국 수사당국은 엄마를 피의자로 기소조차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남아버렸어.
내가 제목과 별 상관 없어 보이는 긴 이야기를 한게 유독 성범죄에서 자주 거론되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무죄 추정의 원칙, 그리고 성범죄에 대한 요상한 인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래.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건 사건의 정황을 접한 사람이 피의자를 유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같은 윤리원칙이 아니야. 100% 확실한 물증(이란건 사실 있을 수도 없지만)이 없으면 유죄 선고를 내릴 수 없다는 원칙은 더더욱 아니고. 공권력을 집행할 때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자를 유죄로 간주함에 따라 줄 수 있는 어떠한 불이익도 주어서는 안된다는게 무죄 추정의 원칙이지.
그러니까 곰탕집 성추행 사건같은걸 놓고 "cctv에 확실히 엉덩이를 주물렀다는 게 나온 것도 아닌데 피의자를 비난하는건 무죄 추정의 원칙을 어기는 일이다" 혹은 "확실한 물증도 없이 유죄선고를 내린건 무죄 추정의 원칙에 위배된다" 같은 소리는 다 멍청한 주장이라는 거야.
그리고 곰탕집 사건이나 안희정 사건, 조덕제 사건, 혹은 비슷한 종류의 정황은 많지만 100% 확실한 물증은 없는 수많은 성범죄들의 상황을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살인 사건이나 혹은 다른 종류의 강력범죄 사건에 대입해 보면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어. 저 살인 사건 이야기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들어?
보통은 "아 남매가 너무 불쌍하다 천벌받아야 마땅할 엄마인데 그놈의 법 때문에 처벌을 못하네" 혹은 "저런건 물증 없어도 빼박인데 잡아 넣어야 하는거 아냐" 하고 생각할거야. 거기다 대고 "엄마가 죽였다는 물증이 나온 것도 아닌데 엄마를 범인이라고 욕해선 안된다"라고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혹은 BBK 주가 조작 사건에서 이명박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 이명박이 X나 강아지라서 해먹을거 다 해먹고 교묘하게 빠져나갔다고 생각하지, 이명박이 정말로 혐의가 없고, 그저 우연히 정황이 맞아 떨어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사건 당시에 실제로 그런 소리를 했다면 보통은 '음 일리 있는 소리군' 하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명박 지지자구나 내지는 가진 재산이 허벌나게 많아서 사기 당한 개미들보다 저쪽에 감정 이입하나 라고 생각했겠지.
뭔 말이냐면, 사람들의 법 감정은 실제의 법 집행과 다르기 때문에 충분한 정황이 나오면 보통 피의자를 유죄로 생각한다는 거야. 그게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왜나면 보통은 피해자 쪽에 감정이입하기 마련이거든. 근데 유독 성범죄에 대해서만 정황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서 억울하게 범죄자로 낙인 찍힐지 모르는 피의자 쪽의 편을 든다는게 무슨 의미일까? BBK 예시에서도 봤듯이, 보통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범죄자한테 감정이입한다고 하지.
억울하게 성범죄자로 낙인찍힌다는 얘기도 웃긴 얘기야. 성범죄 40%가 무고라는 통계가 거짓이고 성범죄의 무고율이 다른 범죄와 별 차이가 안난다는 얘기는 이미 다들 알고 있으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곰탕집 사건만 봐도 그래. 피의자가 피해자한테 항의를 받은 그 순간부터 끝까지 "접촉이 있었던 건 맞는데 고의는 아니었다"로 일관되게 밀고 나가면서 접촉 순간 다리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같은것도 적당히 잘 얼버무렸으면 아마 진짜 무죄가 떴을지도 몰라.
범죄 입증이란게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야. 너네 경찰서에서 사건 조사, 특히 고소같은거 해본 경험 있으면 수사관들이 얼마나 집요한지 알거야. 내가 누구 고소하려고 X나 꼼꼼하게 준비해서 아 이정도면 그래도 확실하지 않을까 하고 가져가도 이 정도면 됐지 뭘 더 입증하라는거야 싶을정도로 집요하게 증거보강을 요구해. 그만큼 누군가를 유죄로 입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서 대부분의 범죄 증명에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물증이 요구되지만, 성범죄는 특성상 확실한 물증이 남는다는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황증거와 진술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은 것 뿐이야. 저 사건도 물증이 없다 뿐이지 목격자 진술, cctv 영상, 처음에 신고받은 지구대 측 진술 등 수많은 정황들을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 이 정도면 피의자를 유죄로 간주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재판부가 결론 내린거지.
사실 유죄 입증이 얼마나 깐깐하게 이루어지는지 생각해보면, 오히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을때 "그래도 아직 모르는게 아닌가" 하는게 더 자연스러운 판단이야. 아까 말한 살인 사건의 예에서 만약에 별 다른 혐의점은 없는데 저 머리카락이랑 보험금 정황 정도만 있다고 생각해봐. 당연히 무죄는 커녕 기소조차 못하겠지. 그럼 너희들은 아 엄마가 아무 죄가 없구나 생각할거야? 엄마가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는데 우연히도 얼마 안 지나서 돈도 별로 없는 집에 그것도 늦은 밤에 우연히도 엄마만 없던 시간에 강도가 쳐들어와서 애들을 다 죽이고 갔고, 딸은 칼에 찔린 고통에 자기 머리카락이 한 웅큼 뽑힐 정도로 쥐어뜯고 숨졌다고 믿을거야?
곰탕집 사건도 마찬가지야. 설사 무죄 판결이 났다고 쳐. 우연히도 남자가 여자 옆을 지나가기 전에 여자를 힐끗 쳐다봤고, 별로 좁지도 않은 그 공간에서 옆에 여자가 있는걸 방금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여자 엉덩이 쪽으로 손을 뻗었고, 우연히 그 순간에 부자연스러운 스텝으로 걸었고, 우연히도 여자가 유난스러운 사람이라 남자가 처음에는 인지도 못했을 정도로 가벼운 접촉을 성추행으로 인식해서, 혹은 접촉이 있지도 않았는데 뒤로 지나가는 남자의 인기척을 느끼고 아 방금 내 뒤로 지나간 새끼한테 빅엿을 선물해야겠다 하고 돌아서서 항의를 했고, 접촉을 인지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돌아서서 항의하기가 무섭게 어떻게 자기한테 하는소린지 알았는지 기다렸다는듯이 바로 여자쪽 방향으로 돌아서 반응했다는 모든 것이 있을 법한 일이라고 믿는게 얼마나 이상한지 아직도 모르겠어?
사실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닌 소리를 엄청 길게 쓴 것 같은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성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판단이 다른 강력범죄들이랑 비교하면 유독 이상하다는거야. 어떤 성범죄 관련 뉴스를 보고 자기 가치판단기준이 옳은지 아닌지 판단하고 싶으면, 그 사건을 절도나 사기같은 다른 범죄로 바꿔서 생각해봐. 만약에 나의 판단이 거기서 바뀐다면, 아마 성범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