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어떨결에 그와 한집에서 살게 되다?
민석은 평소처럼 서은을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그 웃음이 부담스러운 적은 없었다.
서은은 사실 남자친구가 많았다.
깊은 친구는 없는 반면 여기저기 남자를 많이 뿌려놓았다.
가슴 속에서 언제나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를 만들면 나아질 것 같았다. 아니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막연한 불안감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남자친구를 만들고 우월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가장 힘든 건, 밤에 침대에 누웠을 때 들었던 자괴감이었다.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서은이 가장 잘 알 고 있었던 것이다.
부족하고 허전한 건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욱 커져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서은은 또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언제나 남자친구들과는 몇 번의 만남 후에 허무하게 끝나버린곤 했다.
왠지 진지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서은은 자신도 원하지 않게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것 또한 서은에게 자괴감을 주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건 받는 것 만큼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은은 또 민석에게 그들에게와 같은 상처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
민석이 옆에 있을 때도 서은은 망설이지 않고 수시로 소개팅을 했고 남자친구를 만들었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되진 않았다.
모두 진지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만큼 민석이 착하고 괜찮은 남자란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은은 또 원치 않는 상처를 또 주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게 어떤 것인지 알면서 정작 서은이 그와 같은 일들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석훈은 서은에게 상처만 주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만 주었다.
그런데 지금도 서은은 석훈이 옆에 있을 때만 가슴의 두근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얼마나 화가 나는지.....서은은 너무나 억울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선택가능하고 조절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그건 그만큼 사랑이란 것에 대한 신성함을 덜어내는 일일 것이다.
서은은 민석 옆에서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이선재 교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머리속은 내내 윙윙 거렸다.
오늘 정말 자신이 찾아들어가야할 집이 어디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러한 생각들로 서은은 내내 싱숭생숭했다.
석훈과 단둘이 한 집에서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우습게도 그런 기대감과 설레임이 서은을 지배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녀의 마음 한편에선 그와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서은은 또 한차례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다른날보다 유난히 수업이 얼마나 재미없는지 엉덩이에 쥐가 나는 듯했다.
경영학과를 선택한 건 서은이 항상 후회하는 일중의 하나였다.
머리가 아프다.
그럭저럭 학점을 따라가는 건 그저 학점에 대한 의무감 때문일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서은과 민석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빼 먹었다.
학교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만큼 맛있는 건 없는 것 같다.
둘은 그늘이 지는 벤취에 앉아 있었다.
서은이 길게 한숨을 쉬자 민석이 한마디 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너 혹시 내가 만일........"
"무슨 소리야?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알아듣지...."
"아니야....오늘은 여기서 관두자."
"무슨 일인데?......집까지 데려다 줄게....."
"아니야. 오늘은 나 혼자 가야 돼. 집 말고 갈 데가 있거든. "
"어디? 약속 있어?"
"친척네 집에 가기로 했어."
"누구?"
"그냥 먼 친척이야....넌 몰라도 되는 친척이야......"
그때 서은은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누가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와이셔츠만 입고 맨위의 단추는 풀은채 넥타이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은이 남자들을 볼 때마다 가장 섹시하다고 느끼는 것중의 하나인 흰 와이셔츠의 팔을 걷은채 양복상의는 한손에 든채 석훈이 다가오고 있었다.
조금은 짧은듯한 머리가 상쾌했다.
남자지만 늘씬한 키에 스타일이 정말 좋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지적인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왠지 그를 보면 신뢰해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건 그가 타고난 장점중의 막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자들이 저 남자만 보면 혹하나 보다. 그는 29살이었다.
서은보다 7살이 연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를 느끼게 하지 않았다.
그 또한 그가 타고난 장점중의 하나였다.
오히려 또래 친구들을 보면 어리거나 시시하단 생각이 들 정도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서은의 가슴을 떨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우습게도 다시 서은의 심장이 두근반 세근반 뛰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민석도 같이 일어났다.
"여기 있었군. 잠시 찾았어....."
석훈이 다가왔다. 그는 민석을 잠시 흘끔 봤다.
하지만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다.
"왠일이세요?"
"오늘은 내가 데려가려고....."
"누구시죠?"
잠시 민석이 경계하는듯이 물었다.
석훈이 입을 열려고 한순간 서은이 당황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삼...삼촌이야......"
석훈의 표정이 잠시 혼란스러워보였다. 하지만 다시 평온해졌다.
오히려 재미있어보이기까지 했다.
저 사람 앞에선 난 항상 어린애가 되는 것 같다.
"어. 안녕하세요? 전 서은이랑 같은과 친구인 최민석입니다....."
"난 서은이 외삼촌 김석훈입니다."
석훈이 손을 내밀자 민석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눴다.
"그냥 친구인 것 같지는 않고 서은이 남자 친굽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
하지만 민석은 말과는 달리 싫지 않은듯 웃었다.
석훈이 알겠다는듯 웃어보였다. 서은은 바늘방석같았다.
"어디가서 차라도 마실까? 아니면 좀 이르지만 저녁을 해도 상관없
고....."
"아니요. 됐어요.....우리 그만 가요."
서은이 석훈을 잡아끌었다.
"그만 갈게. 내일 보자..."
민석은 아쉬운듯 보였지만 서은은 석훈을 잡아끌고 걸음을 서둘렀다.
"왜 그렇게 서둘러? 꼭 바람피다 들킨 사람 같잖아?"
"누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래요?"
"그런거 아닌가?"
"바람이라면 당신이 피웠겠죠. 당신을 당해낼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
"당신?"
"뭐라고 불러야할지 어색해서 그래요. 오빠라고 부를 수도 없고....."
"편한대로 불러, 오빠든 석훈씨든 당신이든 여보든 상관없어...."
서은은 눈을 흘겼다.
"지금도 여자가 있다는 거 알아요.."
"무슨 말이야?"
"당신이 의외로 여자한테 인기있다는 건 제가 가장 잘 안다구요."
"그러고 보니 예전 일이 생각나는군. 그때 어린 어떤 여학생이 날 유혹하려고 별
의 별 수를 다 썼던 것 같은데....난 안넘어가려고 최선을 다했고 말야.
그런데도 어쩔 수가 없었지. 그 여자가 지금은 그 남자의 아내라고 하던
가.....아니던가....??"
서은은 셀죽해서 미리 앞장서서 걸었다.
뒤에서 석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서은은 화가 났는지 뽀루퉁해져서 뒤를 보고 소리 질렀다.
"차 어디 있어요? "
석훈이 다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데 서은을 더욱 기분상하게 한 건 지나가는 여자애들이 석훈을 흘끔흘끔 쳐다본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서은은 그를 유혹하려고 애썼고 석훈은 그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일로 석훈은 오래 사귀던 애인과 헤어지게 됐다.
그리고는 어이없게 서은에게 원하지도 않던 발목이 잡힌 것이다.
석훈은 그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서은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달리는 차안에서 서은은 창밖만 내다봤다.
"아까 그 친구는 뭐야?"
"네?"
"당신은 결혼한 여자야. 자기가 결혼한 사실을 숨기고 사람을 이용하는
건 나쁜 거야...."
"알아요. 하지만 내가 결혼한 사실을 아무도 몰라요. 사실은 나조차도 실
감나지 않아서 결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거든요. 얘기하려면 시
간이 필요해요. 갑자기 결혼했다는 말 하기가 그렇게 쉬운지 알아요? 그리고 우
리가 언제 깨질지 어떻게 알아요?"
"난 당신과 아주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일부러 그는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을 했다.
서은은 토라져서 툴툴거렸다.
석훈이 갑자기 서은은 얼굴을 잡아서 자기를 보게 했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내말은 진심이야...나에 대해서는 온통 불신감 뿐이라는 거 아는데 조금
은 날 믿어주는 건 어때?"
서은의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석훈이 웃으며 서은의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홍당무가 되면 내가 꼭 나쁜놈 같잖아....."
서은은 뛰는 가슴을 주체하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이 남자만 보면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집에 도착했을 때 서은은 어제 잠을 제대로 못자서 피곤하다는 걸 깨달았다.
긴장감 때문에 잊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주택에 살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를 싫어했다.
그의 집은 아름다웠다.
화려한 것보단 왠지 운치가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집은 아름다웠다.
혼자 사는 집이 서은네 아파트보다도 훨씬 크고 아늑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산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잘 정리된 정원도 눈에 들어왔다.
휴식공간이 정원에 잘 자리잡고 있었다.
목재를 이용해 테이블이나 의자가 시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석훈과 같이 시간을 보낸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더욱 눈이 동그래졌다.
화려하거나 가구가 많진 않았지만 깔끔함과 단순함이 돋보였고 공간이 넓은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어?"
"네."
"다행이군."
석훈이 웃었다.
석훈이 방을 안내했다. 방 4개에 서재가 있었다.
안방의 침대를 보자 서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석훈이 웃었다.
"어제 당신이 한 말을 생각해봤어. 당신은 아직 우리가 남들과 같은 진
짜 부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어. 생각해보니 정말 그럴만했어. 당신
과 나의 관계가 평탄치 않았던 건 사실이니까.... 그래서 좀더 시간을 갖
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 당신을 급작스럽게 결혼 생활에 끌어들이진 않
을 생각이야. 당신은 몸은 이제 다 큰 어른이 됐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아
직은 어린애야. 자연스럽게 우리가 진심으로 다른 부부들과 같다고 느낄
때까지 당신한테 시간을 주고 싶어.....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필요
하다고 생각해."
"무슨 소리에요?"
"우리 당분간은 각방을 쓰자. 그게 좋겠다고 생각했어.....당신이나 나
나 시간이 필요해. 그러다 보면 서로 깨닫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뭘 깨달아요? 당신이 말하는 의미를 모르겠어요. 아니면 이혼하기 위해
일부러 이러는 건가요? 당신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
"흥분하지마. 그런 뜻이 아니야. 사람과 사람이 같이 산다는 건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좋아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당신이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을 뿐이야.."
"좋아요...... 그렇게 하죠. 제 방은 어디에요?"
"가장 넓은 방을 당신의 방으로 했어. 이미 일하는 아줌마가 대충은 정리
하셨을 거야. 마음에 안드는 건 당신이 마저 정리해."
"고맙군요. 그렇게 대단한 선택권을 줘서......"
서은은 쌀쌀하게 말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달라졌나 했었다. 그래서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는 서은과 진심으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은은 눈물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가장 억울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훈을 사랑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은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 인기척은 잠시 있었을 뿐 곧 사라져갔다.
그는 아직도 서은을 어린애로 취급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서은은 그에게 어린애일 뿐이다.
여전히 그에게 동등한 여자는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은은 그에게 여자가 되고 싶었다.
어린애가 아닌 동등한 인격자로서의 여자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서은에게 더 자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말이다.
*자주는 못올리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찾아오겠습니다. 초고라 엉망인 거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