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아 처음으로 글을 올려봅니다
어떤 식으로 써야 될지 몰라서 일기형식으로 써봅니다.
조금 길어질 것 같습니다
난 요즘은 흔한 이혼 가정의 아들로 모친께서 키워주셨다.
IMF 때 건설업에서 종사하던 아버지는 청구가 휘청이자일거리가 없어지면서 다른 가장들도 힘들어하듯이 아버지도 힘들어하다 결국 모친과 당시 12살이던 나를 두고 그대로 잠적해버렸다.
어머니는 19살 때 시골에서 홀로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를 만났고 그대로 동거를 시작했다.변변한 직업도 없던 아버지는 생활비도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했고 어머니가 조금씩 버는 월급과 할아버지에게 손을 벌려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생활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얼굴이 반반했던 아버지는 바람기도 다분했고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었고 같이 살아보려 노력했다 같이 사는 동안 4번의 임신 3번의 중절 수술 이번에도 수술한다면 불임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낳은 아들
그렇게 내가 세상에 나왔다
어머니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아들이 태어났으니 정신 차리고 키우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아버지는 내가 3살 때 어머니와 날 두고 가출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여자 혼자 아들을 키운다는 게 녹록지 않았나 보다. 너무 힘이 들어 결국 시골에 날 데려갔는데 큰외삼촌이 하는 말이
"내 호적에 올리고 내 아들로 키울 테니 넌 새 출발해라"
그래서 어머니는 날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새끼 생각에 잠도 잘 못 자고 계속 눈에 아른거려 3개월 만에 다시 큰외삼촌을 찾았지만 시골집에서 놀 던 난 어머니가 날 부르자 모르는 사람을 보듯이 커다란 커튼 뒤로 몸을 말고 숨어서 어머니를 바라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직도 그때의 내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을 울면서 내가 키울 거라며 외삼촌과 나에게 빌다가 어머니와 난 서울로 다시 오게 됐다고 한다.
그리곤 어머니는 당시 공장을 하시던 아버지의 삼촌 나의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의 행방을 물었고
어머니를 만나기 전 같이 살던 여자의 집에서 아버지를 찾았다고 한다.
아이를 두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집을 나가면 어쩌냐고 한참을 싸우다 아버지가 정신 차리고 책임지겠다며 다시 돌아왔다 과정에 작은할아버지의 입김도 있었고 그 덕에 작은할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아버지도 직업이 생겼다 당시 집이 없어 아현동에서 아버지가 같이 일하던 사람 집에 세 식구가 얹혀살다가 내가 6살이 되던 해 가양동 반지하 집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2년을 반지하에서 살다 부모님은 돈을 좀 모아서 공공임대아파트에 처음으로 입주하게 됐다.
여담이지만 이상하게도 난 아버지가 집을 나가기 전 그러니까 12살 이전에 기억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아버지가 우릴 버렸다는 생각에 방어기제가 생겨 다 잊고 싶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력도 좋고 암기도 잘하는 내가 이상하리만치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기억나는 건 어떤 여자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는 것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전처? 같은 여자였고
남자와 여자 아이는 내 이복형제였다.
어머니는 당시 500만 원을 주며 다신 오지 말라고 돌려보냈고 그 후론 집에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1년 2년 지나가고 마침내 IMF가 터졌다.
여기저기 자살도 하고 다들 힘들어하던 시절 우리 집도 다를 게 없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만 바라보던 어머니는 세상을 잃은 것처럼 망연자실하여 그 이후 1년 동안 집을 돌보지 않았다 난 매일 라면을 끓여먹었고 엄만 술만 마시며 울다 지쳐 잠드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기초생활수급자도 신청하고 일을 시작했다.
직장이 멀어 집엔 들어오지 못했다 그렇게 난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혼자 살게 됐다.
그때 정신 차리고 공부했다면 내 삶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아직도 종종 한다.
어머니는 이일 저일 다 하며 돈을 벌었고 나는 사고는 치지 않았지만 졸업하며 대학 진학은 생각하지도 않고 17살 때부터 시작했던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려 돈을 벌었다
그때 어머니가 집으로 다시 들어오셨지만 성장기에 였던 나의 6년이란 시간 동안 어머니의 부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란 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어머니와의 불편한 생활이 시작됐고 21살이 되던 해 바로 입대를 했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중 어머니는 돈을 더 벌어 좀 더 크고 새로 지은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전역하고 조금 살만해지니 방황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마냥 놀고 싶었고 취직 퇴사를 반복하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버렸다. 어머니는 작은 호프집을 하시며 돈을 벌고 있었지만 내가 방황하는 동안에 점점 병들어 혼자 끙끙 앓다가 일을 못하게 되어 결국 호프집도 망하게 됐지만 병원에 가는 게 두려워 집에만 누워 계셨다.
그렇게 1년 반 만에 찾은 병원에선 유방암 3기~말기쯤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가게를 차리기 위해 받았던 대출이 장기연체가 되어살고 있던 아파트 보증금도 빼앗겨 집에서 쫓겨났다.
부랴부랴 집을 구해 들어간 곳이 월세 27만 원짜리 반지하 북향에 햇빛도 안 들어오던 그런 창고 같은 집..
그 이후로는 보험도 없었기에 순전히 모든 병원비는 내가 감당해야 됐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던 나에겐 돈이 없었고 정말 무력한 내 모습을 봤다
하지만 힘들다고 아버지처럼 어머니를 버릴 수 없었기에
일단 어머니는 살려야한다는 생각만 있었다 거의 말기라는 절망적인 진단에도 기적적으로 림프를 타지 않아 전이가 근육에만 조금 되어 수술이 가능하다는 얘길 듣고 이후로 6년 동안은 쓰리잡까지 해가며 담배꽁초도 주워 피고 직원 휴게실에서 파는 300원짜리 레쓰비 하나 못 사 먹을 만큼 빈곤하게 살았다. 어머니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빌린 대출 빚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면서 내 생활이 없어졌다. 그렇기에 담배를 주워 피면서도 끊을 수 없던 이유가 담배라도 피우지 않으면 정말 풀 곳이 없었던 것 같다.
빌리고 갚고를 반복하던 중 같이 일하던 곳에서 날 좋아한다는 사람도 나타났지만 내 상황이 너무나 참담했기에 나의 상황을 얘기하며 거절했지만 그 친구는 내가 쓰면 되지라며 날 설득했고 2년이란 시간 동안 소박하지만 내 인생 다시없을 만큼 너무나 사랑했고 멋진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여자 친구는 결국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떠나갔다.
절망스러웠지만 잡을 수 없었다. 잘 피해 간 거라고 계속 만나봐야 짊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 후에도 열심히 살았지만 어머니는 몸이 계속 안 좋았고 빚은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다 지금은 손대기 힘들 정도로 늘어버렸다 번아웃이 와서 우울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누군가 한 번만 이라도 도와줬으면 좋겠다'
'누군가 한 번만 이라도 손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던 내가 '이제 끝내고 싶다' '다 놓고 싶다' 라고 생각하며
영등포역에 있는 노숙자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너무나 무섭고 일어서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아직은 죽는 게 더 무섭기에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직도 빚에 허덕이고 이젠 사채까지 써버린 지금 어찌해야할까 앞이 막막하다
무언가 중요한 걸 빼먹고 사는 느낌
점점 감정이 무뎌져서 남에게 공감하기 힘든 삶
눈물 흘려 울면 다 놓아버릴 것 같아서 버티는 나
아무나 붙잡고라도 도와달라고 울고 싶다
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