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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비가 쏟아졌다

누렁이 |2006.11.16 16:15
조회 17 |추천 0

장대비가 쏟아졌다

김충규

장대비가 쏟아졌다 나무들과 함께 나는 후줄근히 젖었다 작살에 살점들이 뚝뚝 떨어져 나갔다 오래 전에 떨어진 태양은 먹다 버린 사과처럼 더럽게 뒹굴고 있었다 내 생은 왜 항상 굴욕인가, 내 영혼은 자꾸 작살 같은 질문을 내 몸에서 퍼붓고 있었다 돌들이 일제히 딱딱한 옷을 벗고 맨몸으로 돌아다녔다 세상은 왜 항상 물음표 속에 갇혀 있는가, 내 주변에 선 나무들이 물음표로 구부러져 있었다 오래지 않아 둑이 무너져 먼 바다에 살고 있다는 흰 고래가 지상으로 올라온다면 나는 그 놈의 등에 올라 타고 지상을 떠나고 싶다 늘 어디로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함이 목마름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졌고, 그 사이 죽순은 쑥쑥 자랄 것이다 죽순, 그 연약한 짐승의 살갗을 만지고 싶어 한때 대숲에 머문 적도 있었다 대나무들은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물음표로 구부러지지 않았다 대나무들은 늘 느낌표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대나무, 그 앞에 서면 일종의 경건함을 느꼈다 속이 텅 비었으면서도 그렇게 꼿꼿하게 서 있기가 얼마나 불가해한 일인가 그러나 내 몸은 한번도 느낌표처럼 꼿꼿하게 서지 못했다 나는 왜 항상 물음표로 서서 세상을 굽어보는가, 이런 나를 사선으로만 퍼붓는 장대비는 비웃고 있었다 비 오는 날마다 비를 맞고 서서 흰 고래를 기다리며 한 시절 느릿하게 보내도 좋을 것 같으다 석 달 열흘동안 쉼없이 비가 퍼부어서 뭍과 바다의 경계가 지워져 버린다면 흰 고래 성큼 내 앞에 헤엄쳐와 등을 낮추리라 아아, 부질없는 짓 다 집어치우고 죽순처럼 단순하게 쑥쑥 자라기라도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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