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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2박 3일간의 정동진에서의 여행 같지 않은 여행일정을 마치고 이제 막 집으로 향하는 기차
에 올랐다.
헤어진 그에 대한 미련을 비롯한 그에 따른 흔적들을 지우고자 떠났었건만, 오히려 상념(想
念)만을 떠 안을 뿐이었다.
게다가 아직도 그에 대한 묘한 배신감과 함께 낯선 여자와 바닷가를 거닐던 그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나의 의식의 통제 없이 그려졌다.
고개를 이리저리 젓는 등 여전히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그에 대한 모습, 그리고 그에 파생된
모습들을 지우려는 우스운 발악들을 하다보니 어느덧 기차에서 내릴 차례였다.
우선 나른한 걸음으로 역에서 나와 비좁은 버스를 타고 겨우 아파트 현관에 이르렀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두어 번 초인종을 눌러보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결국 귀찮지만 가방을 뒤적여 열쇠꾸러미를 끄집어내어 현관문을 열었다.
"엄마, 엄마...!"
이렇게 불러봐도 아무런 대꾸는커녕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디 갔지? 시장이라도 갔나...?"
일단 내 방으로 들어가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가방 속에 있는 물품들을 정리하고 입
었던 옷가지들은 세탁기에 집어넣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한층 더 몰려오는 피곤함에 잠이라도 잤으면 좋으련만 이상하게 피곤함만을 느낄 뿐, 잠이
올 기색은 없었다.
난 거실에 있는 소파에 넌지시 기대듯 앉아 리모콘으로 TV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TV를 향해 리모콘의 버튼을 눌러대며 이리저리 채널을 바꿔보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교양·시사 프로그램이나 재방송들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재방송이라도 꾸역꾸역 눌러앉아 봤을 텐데 오늘은 웬지 내키지 않았다.
결국 TV전원을 끄고는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는 무작정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간만에 인터넷이나 해볼까?"
구형 컴퓨터라서 그런지 부팅 시간도 유난히 길었다.
순간 괜한 짜증에 그냥 컴퓨터의 전원을 확 꺼버릴까 했지만, 바탕화면에 아이콘들이 서서
히 나타났고 [Internet Explorer]아이콘을 클릭했다.
그리고 비록 특별히 올 메일이 없다지만, 여느 때처럼 먼저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나의 메
일계정에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곤 로그인(Log-in)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새 메일은 한 통도 없었고 단지 [스팸편지함]이란 폴더에 스팸메일 8통
만이 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잘못되어 스팸메일이 아닌 것이 [스팸편지함]으로 옮겨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스팸편지함]을 확인해보지만 보기 민망한 정도의 제목의 성인광고들뿐이었다.
"하긴, 누구한테 메일이 오겠어...?"
씁쓸한 표정으로 이제 웹서핑이라도 할 작정으로 로그아웃(Log-out)을 위해 마우스를 가져
가 클릭할 찰나에 메일의 폴더 중 [Love Letter]이란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그에 대한 흔적은 모두 지우거나... 치우거나... 정리한 줄 알았건만.
잠시 잊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서 받은 메일들만을 모아놓은 폴더였다.
무심코 그 폴더를 클릭하자 서른 통 남짓한 메일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클릭해서 읽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그와 헤어진 이상 이 메일들
을 다시 읽을 이유는 없을뿐더러 괜스레 그에 대한 미련이 다시 아른거릴세라 애써 마음을
달래야 함이 옳았다.
언제까지 이별 후의 쓰라린 마음만으로 지낼 수 없는 노릇이거니와 행여나 지난 사랑의 미
련에서 벗어나지 못해 앞으로 내게 다가올 새로운 사랑도 놓칠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래! 이참에 이것도 모조리 삭제해버리는 거야...!"
마우스로 가져다가 [전체선택]을 클릭하곤 다시 [삭제]란에 마우스를 가져갔다.
클릭만 하면 이제 남은 그의 흔적마저 모조리 지울 수 있는데 일순 마음이 약해진 나머지
잠시 주저했지만 기어코 강경하게 클릭했다.
그 메일들은 모조리 삭제되어 버렸고 연이어 그가 보낸 메일들이 보관되어 있던 폴더마저
삭제해버렸다.
이제 그의 남은 흔적마저 지워버렸다는 사실에 후련한 감도 있었지만 차마 씁쓸한 감정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 씁쓸함이 더했다.
좀 전까지 하려고 할 생각이었던 웹서핑마저 구차하다는 생각에 인터넷은 물론 컴퓨터의 전
원까지 꺼버렸다.
그리고 등뒤 너머에 있는 침대에 나른한 몸이라도 맡겨보려는 마냥 침대로 향할 찰나에 나
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허탈하고 어의없는... 자조(自嘲)로 가득 찬 웃음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작은 장식장에 조그마한 종이가방이 있었던 것이다.
그 종이가방에는 그가 여태 내겐 건네준 100여 통의 편지들이 가득히 담겨져 있었다.
무심코 나의 손은 종이가방 속으로 들어가 어느 편지 하나를 집고는 펼쳐 보았다.
난 평범한 사람이기에
어쩌면 당신과 사랑하는 동안 아름다움만은 있지 않을 것입니다.
때론 당신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릅니다.
때론 내가 힘들고 지친 나머지 당신한테 응석 부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욕심이지만,
그러한 그 순간조차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
비록 이젠 헤어진 그이지만, 그만큼 날 사랑해준 사람도 없었다.
이런...!
금세 이 편지를 읽은 사실에 대해 후회가 막심했다.
그가 보낸 메일마저도 지운 마당에 이 편지들이 내 곁에 있어봤자 이제는 아무런 존재가치
가 없다.
오히려 짐만 될게 뻔하다.
난 이런 강경한 생각을 아직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내 마음 한구석의 내 자신에게 보
란 듯이 행동으로 옮기려 편지를 찢으려 두 손으로 편지의 중앙을 잡고는 서로 엇갈린 방향
으로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나의 두 손엔 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가지만... 오히려 힘이 들어가다 못해 편지를 잡
고 있던 나의 두 손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구석진 그에 대한 미련이 나의 의식 전체를 장악이라도 하듯 결국 편지를 찢
지 못했다.
찢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진정, 날 사랑했던 그의 진심에... 그의 사랑에...
[He...]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통 잠 올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내 방에 이부자리를 펴서 누웠다.
그리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웅얼거리며 환하게 발
하고 있는 천장의 형광등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노래 서너 곡이 끝날 무렵 책상 위에 놓여있는 탁상용 충전기에 꽂혀있는 휴대폰이
울렸다.
한밤중이라 그런지 벨소리는 더욱 요란하게 느껴졌다.
"이 밤중에 누구지...?"
잠들어 있는 다른 식구들이 깰세라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외부 LCD화면을 보니 [발신번호
표시제한]도 아닌 [발신정보없음]이란 메시지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아함 따윈 잠시 뒤로하고 휴대폰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야, 정진이!"
작년에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난 대학 동창이었다.
"어, 그래. 반갑네. 무지 오랜만이다, 그지?"
"그렇지... 그 동안 메일 한 통도 없고 말이야."
순간 뜨끔했다.
그러고 보니 정진의 메일주소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통도 보내지 않았다.
정진의 섭섭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내가 메일을 먼저 보냈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답장이 없어서 이렇게 직접 전화했
지."
일주일이라...
생각해보니 지난 일주일동안 컴퓨터 전원조차 켜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최소한 메일확인이라도 했는데...
"미안... 그 동안 내가 컴퓨터를 하지 않은 바람에 메일확인도 못했네. 대신 내가 바로 확인
해서 장문의 답장을 보내줄게. 그럼 섭섭한 거 푸는 거지?"
"좋아, 이 마음이 넓은 정진님께서 화를 풀어주지."
비록 늦은 시간일지라도 좀 더 많은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만 국제전화였기에 요금상의 제약
으로 서로의 간단한 안부를 묻고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전화를 끊고는 행여나 잊어버릴세라 바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빠른 부팅을 마치고 인터넷을 연결해서 메일을 확인해보았다.
몇 통의 스팸메일과 함께 정진의 말대로 그녀의 메일이 수신되어 있었다.
메일의 내용은 나의 안부를 묻는 것을 시작하여 캐나다의 생활들에 대해 주절이 적혀있는
것을 보아하니 나의 염려와는 달리 잘 적응하고 있는 듯 해서 다행이었다.
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차근차근 답장을 작성해서 보냈다.
원래 작문실력이 없거니와 괜한 미안함에 장문의 답장을 보내다보니 시간도 꽤 흘러 조금씩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이제 자야겠다..."
스팸메일을 삭제하지도 않은 채 로그아웃(Log-out)을 하려는 순간 편지함 중 [Love Letter]
란 폴더가 보였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에게 받은 편지들은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책상 어느 한구석에 보관했다지만, 메일은
생각조차 못했다.
사실 이 폴더는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메일들을 채우고자 함께 만든 폴더였다.
자연스레 마우스를 가져가 그 폴더를 클릭하자 예상대로 그녀에게 받은 수십 통의 메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의 손에 쥐어 쥔 마우스는 자연스레 첫 번째 메일부터 클릭하기 시작하여 단숨에 남아있
는 메일들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메일들을 읽으면서 그녀와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들을 상기하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
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덧 마지막 한 통의 메일만이 남겨져 있었다.
마지막 메일이니 만큼 차근차근 읽어내려 갔다.
안녕∼!
♥♥이야
항상 너에게 편지 써야지 하는 생각은 하는데 오늘도 너가 먼저 나에게 편
지를 썼네..미안^^;
방학때 자주 못만난다고 너무 신경쓰지마
몇번을 만나는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너와 자주 못만난다고 해서 너가 나한테 소홀히 할꺼란 생각은 안해..
내말 맞지?^^
그리고 우리 미래를 위해서 보고 싶어도 좀 참고 널 이해해줘야지..
♥♥이가 아무리 속이 좁아도 그정도는 이해 해줄수 있답니다^^:
그러니깐 ♥♥이 너무 신경쓰지 말구 공부 열심히해
난 널 믿어
지금도 많이 행복하지만.. 앞으로 날 더 행복하게 해줄꺼라고..
나도 널 위해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노력할께 ^^:
♡♡아 사랑해~!
우리 낼은 볼수 있는거지?
그럼 남은 하루 잘보내구.. 낼 봐요∼!
이렇게 날 믿는다고 했으면서 내게서 떠나버린 그녀가 순간이나마 원망스러웠다.
물론 내가 그녀에게 진정한 사랑을 주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의 머릿속에 상기되었던... 헤어진 그녀와의 행복했던 추억들은 어느새 슬픈 추억으로 남
아있을 뿐이었다.
이내 그 슬픈 추억은 나의 두 눈망울에 서글픈 눈물만을 남겼다.
진한 슬픈 향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