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33)
중국 팀장은 내 예상대로 회사 근처의 가장 근사한 한정식집으로 갔다.
그곳은 중국 팀장이 특별히 좋아하는 곳으로 나름대로는 가장 귀한 손님 접대를 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맛도 좋았지만 가격도 비싼 편이라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역시 중국 팀장은 현수와 일하게 된 것이 무지 기쁜 모양이었다. 나도 덕분에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햄버거를 먹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정훈이 떠올라서 불편했다. 약속이 겹치지만 않았으면 정훈과 지금 보다 더 즐거운 점심을 먹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팀장님...여기 우리 일 년에 한번 오는 데 아니에요?"
일부러 나는 과장된 농담을 했다.
"그럼, 앞으로 이대리 잘해줘야 해. 내가 이렇게 특별히 점심도 사고 그러니까..."
중국 팀장도 내 농담을 받아 현수에게 말했다.
"네...그러지요."
현수는 여전히 중국 팀장에게는 깍듯하게 대답했다. 나름대로 상사에 대한 예의를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나는 현수를 처음 만났을 때 다투던 생각이 나서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어라...강팀장은 뭐 그렇게 좋아? 혼자 실실거리고.."
"에이...좋아하는 건 팀장님이시네요. 뭘."
"하하..그런가? 근데 어제 둘이 얘기는 잘 한 거야?"
아차 싶었다. 어제 나는 중국 팀장에게 현수를 만난다고 말하고 난 후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현수도 내가 중국 팀장 때문에 만나려고 했다는 것은 모르는 일이었다.
"아..네. 현수씨가 좋아하면서 다닌다고 했어요."
나는 얼른 대답해버렸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어가겠지 싶었다.
"이대리...금방 대답 안해서 내가 강팀장한테 부탁했었어. 기분 나쁘지 않지?"
"아..네."
현수는 상황을 다 이해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대답은 해주었다.
나는 갑자기 어제 저녁 회사 앞에서의 묘한 상황이 생각나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나보다는 조금 더 여성스러운 강팀장이 미인계 좀 써달라고 했어. 혹시 내가 너무 깐깐해 보여서 두려움에 떨까봐..."
"팀장님은 외강내유 스타일이잖아요. 10분만 겪어보면 알아요."
내가 그렇게 대답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녀는 첫인상과 말투 때문에 빈틈 없어 보이긴 하지만 알고보면 정많고 부드러운 여자!이기도 했다.
"만약 민아씨가 제 팀장이었다면 오히려 입사 안했을지도 몰라요..."
"네?"
"민아씨는 외유내강형이에요.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속은 단단해 보여요. 그래서 아마 10분만 지나면 정 떨어질 거에요."
현수는 농담같은 진담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아. 이대리는 어떻게 그렇게 강팀장에 대해 잘 알아? 그런데 두 사람 어떻게 아는 사이야? 학교 선후배도 아닌 것 같은데.."
"한번 맞춰 보세요..."
나는 당황스런 질문인데 오히려 현수는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드디어 현수의 본색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의 난처함을 즐기는 면이 있지 않았던가.
"글세..."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쳐요..."
현수가 전혀 추측하지 못하는 중국 팀장에게 대답했다.
"제가요. 하도 중국 팀장님이 사람을 찾길래 길거리 가다가 중국인 하고 비슷한 남자에게 말을 걸어서 데리고 왔어요."
나는 현수와 한편이 되어 중국 팀장을 놀리고 있었다.
"아휴...진짜 뭐야? 궁금해 죽겠다."
"아..친구의 선배에요."
내가 얼른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중국 팀장의 집요함이 시작되면 피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미리 잘라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구나..."
중국 팀장은 그래도 논리적인 대답이라고 생각되었는지 믿는 눈치였다.
한정식이라 여러 코스가 나오는데 중간 쯤 되어 정훈에게 문자가 왔다.
'나 햄버거 다 먹었다. 맥도날드 유리창에서 너희 회사가 보인다.'
정훈은 정감 있는 문자를 보냈다. 빨리 오라는 것도 아니고...
나는 슬쩍 핸드폰의 폴더를 열어 문자를 보고는 닫았다.
"요새 강팀장 연애하는 거 아냐? 전화도 자주 오고, 약속도 많은 거 같고, 게다가 지난 번에 아침에 어떤 남자의 차에서 내리는 것도 봤다던데?"
중국 팀장은 나와 현수의 관계에서 집요함은 사라졌지만 나의 요즘 변화에 대해선 집요함이 발휘되는 듯했다.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가며 파헤치고 있었다.
"이 나이엔 오히려 그런 소문이 없으면 우울한 거 아닐까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중국 팀장은
"하긴 그래. 내가 어느 모임에 나갔다가 결혼했냐고 묻길래 하도 짜증이 나서...숨겨 놓은 애가 있다고 했더니 믿는 눈치인 거야. 속으로는 이 나이에 차라리 숨겨 놓은 애라도 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라면서 맞장구를 쳤다.
"정말 숨겨 놓은 애 없어요?"
현수는 노처녀들의 수다에 끼어 그렇게 물었다.
"현수씨도 믿는 거에요?"
"하하하..그건 아니고 팀장님이 저 보다 한 두살 정도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얘기를 하시니까.."
현수는 의외로 여자가 기분 좋아하는 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들에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십대 중반 이후로 매일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는 칭찬이었다.
"이런...이래뵈도 낼 모레면 마흔이야..."
중국 팀장은 현수의 말에 기분이 좋았는지 슬쩍 자신의 나이를 밝혔다.
"역시 이대리 뽑길 잘했어. 분위기가 너무 좋아지는데..."
나는 어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정훈을 만나러 가야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국 팀장은 분위기 좋다고 했지만 나는 다소 디저트가 늦어지자 짜증이 났다.
보통 점심시간과 다르게 한 시간 동안의 식사를 마치고 나는 커피 한잔 사오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 맥도날드로 갔다.
"많이 기다렸어?"
"응. 한 만년쯤..."
나는 피식 웃었다. 진짜 정훈은 달라져 있었다. 이런 애교 있는 농담은 전에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용케 살아남았네..만년 동안..."
"아냐...이미 다리는 의자에 굳었고 이젠 팔이 반쯤 굳어가고 있어."
"내가 커피 살까?"
나는 사과의 뜻으로 커피를 두 잔 사왔다.
"주말에 꽃지 해수욕장 가려고, 안면도에 있는 건데 일몰이 진짜 멋있어. 마침 회사 콘도도 거기 있고..."
요즘 정훈은 머리 속에 나만 들어 있는 사람 같았다. 시간도 나에제 맞춰주고 나와 무엇을 할까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부인한테도 이렇게 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사람의 역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인지 그냥 마음 편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커피를 마시고 일어서려는데 정훈의 전화가 울렸다. 정훈은 받지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전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왠지 다그치는 것 같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연애란 뭘까?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고 주말 여행을 가고 그러는 게 전부는 아닐텐데...
왠지 지금 우리는 그것 외에는 할 수 없는 연인처럼 느껴졌다.
"현아 기억하지?"
"당연하지...그 때 대학교 1학년이었던가? 내 친구들이 소개시켜달라고도 했었는데..."
"응. 민석이도 기억하고?"
"맞어..민석이...그 녀석 잘 있나?"
"둘이 결혼한데.."
"정말?"
"임신까지 했는데 우리 집에서는 내가 먼저 안하면 걔네들 결혼 안시킨다고 난리야."
나는 분명히 의도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정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부모님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출산 전에는 결혼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
정훈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정훈...왜 말을 못하는 거야? 그 때까지는 결혼할 수 있다고 대답해줘야 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아니면 왜 나에게 반지를 건네준 거지?
차마 입으로 나오지 않는 말들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얼른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고 이따가 전화하자."
정훈은 그렇게 마지막 말을 건네고는 사라졌다.
나는 약간 가라앉은 기분으로 사무실에 돌아왔다.
내 자리로 가기 위해 중국 팀장과 현수의 자리를 지나오며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대리 중국 비자 있어?"
"아뇨."
"그럼 얼른 내. 다음 주나 다다음주 쯤에 중국 한번 들어가야할 거야."
"네. 그리고 그 때 저랑 같이 들어갈 학생이 5명이죠?"
벌써 중국 팀장과 이대리는 호흡이 척척 맞는 듯한 대화를 하며서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현수의 생기 발랄한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이젠 레종을 잊은 걸까? 의문이 잠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