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시간의 단절 속에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하연은 물끄러미 민혁의 얼굴만 보고 서 있었다.
상현은 차 옆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민혁은 하연 앞에 태산(泰山)처럼 버티고 섰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흙먼지 냄새를 느끼며
하연은 재빨리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했지만
마음과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민혁씨, 조금 전에 했던 말…그게…무슨 소리에요?”
“이곳에 당신 어머니가 계시다고 그랬어.
못 알아들었나?
진하연의 생모(生母) 유정인이 이 곳에 있다고.
다시 설명해야 하나?”
유정인.
이젠 화석(化石)처럼 오랜 기억 속에 묻혀진 이름 석 자.
잊지 않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종이 위에 썼던 이름은
언젠가 만나리라는 희망이 퇴색됨에 따라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갔다.
이젠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는 그 이름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찾아와 닫아걸어 두었던 그리움들을
송두리째 뒤흔들 줄이야.
게다가 그 이름 석 자가 민혁의 입을 통해 흘러 나왔다는 사실에
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충격과 당혹감으로 인해 가쁜 숨을 몰아쉴 뿐.
별 하나에 그 이름을 담고
바람 한 점에 그 이름을 보듬고
물방울 하나에 그 이름을 실었다.
하지만 기다림이 강해질수록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만 갔고,
어린 하연은 절망했다.
기다림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시간들 속에
다시는 그 이름을 떠올리지 않겠노라 맹세 했었는데.
그랬는데.
목소리도 손길도 모습도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시간들 속에
슬픔을 붙잡았고 아픔을 붙들어 맸다.
아니야! 거짓말이야!
마음 속 깊이 웅크리고 있던 자아가 하연을 향해 고함치고 있었다.
그 이름 석 자로 인해 오래 전 묻어 두었던 아픔들이
고스란히 쓰라린 기억으로 재생되었다.
엄마 없는 아이! 버림 받은 아이!
그 쓰라린 기억들이 울부짖는 하연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깨어나고 있었다.
아니야! 도망쳐!
이미 만남의 희망 따위는 접어 버린 지 오래잖아!
이제 와서 바보처럼 뭘 어쩌겠다고! 소용없어! 소용없다고!
“…어딜 가려고?”
황급히 돌아서던 하연의 양 팔을 민혁이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그 힘에, 기세에 눌린 하연의 입에서 얄팍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그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려 봤지만
하연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점점 세게 조여지는 손가락을 느끼며
하연의 눈에서 굵고 따스한 물기가 똑똑 흘러내렸다.
민혁의 넓은 어깨가 어둑신한 그늘을 만들며 덮쳐왔다.
왜 그랬어요? 왜! 난 당신만 있으면 돼요!
당신의 그늘만으로도 충분해요!
발버둥치는 하연을 억지로 품 안에 넣은 민혁이 하연의 등을 쓸어내렸다.
하연이 온 힘을 다해 그의 품속을 벗어났을 때,
입술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도 민혁은 하연의 손목을 꽉 움켜 쥔 채 놓아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놔요! 놔 줘요! 왜 이래요? 도대체 왜!”
“도망치지 마!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괜찮다고!”
흐느낌을 삼키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하연의 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잘못한 걸까. 너무 성급했던 걸까.
날카로운 이성으로 빠르게 더듬어 나갔지만 오류는 느낄 수 없었다.
어차피 한 번 겪어야 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곱씹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눈이 아파왔다.
차라리 아픔에 익숙한 자신이 대신 겪어줄 수 있다면.
벌겋게 부어 오른 손목을 보면서도,
피 맺힌 입술을 보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것 외에는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민혁은 하연을 안아 세웠다.
휘청거리며 서 있을 힘조차 빼앗긴 하연을 온 몸으로 느끼며
모든 것이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민혁은 마른침만 삼켰다.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고통과 아픔 속에서 누군가를 건져내는 일이 이토록 힘들 줄이야!
하지만 자신에게 힘없이 기대 서 있는 여자는
혼자서 자기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이젠 내가 해 줄 차례인 것이다!
민혁의 눈동자에 결연한 각오의 빛이 어렸다.
그 눈빛을 본 하연의 몸이 더더욱 움츠러들었다.
잔뜩 겁을 집어 먹고 바들바들 떠는 어린 새처럼,
하연은 서 있는 것조차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다만 조금 늦은 것 뿐 이야! 약속했잖아! 도망치지 않기로!”
“이런 경우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어요!
만약 미리 알았다면 안 왔을 거예요! 놔줘요! 제발!”
그 때 민혁의 꿰뚫는 듯한 눈길이 하연에게 닿았다.
얼음처럼 차갑고 칼날처럼 섬뜩한 눈빛.
마치 깊숙이 숨겨진 속내까지 고스란히 쳐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에
하연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솜털 한 올 한 올을 곤두세우는 듯한 매서운 눈빛에
하연은 고개를 떨구고 발버둥치던 것을 멈췄다.
앙 다문 입술이 부르르 떨린다고 느낀 순간,
민혁은 거칠게 하연을 일으켜 세운 뒤 차가 멈춰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거칠었지만 결코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속절없이 이끌려 가는 하연이었다.
하연을 차체에 밀어 붙였을 때, 상현이 다가섰다.
“하연씨는 여자입니…!”
“참견하지 마! 내 여자야! 내가 이 여자를 다치게 할 것 같은가? 물러서!”
민혁의 단호한 말에 상현은 손가락 끝도 대보지 못한 채 한 발 물러섰다.
그래, 이번에는 주제넘은 참견이었다.
자질부족!
상현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많은 방법들 중에 하필이면 저런 방법을 써야 하는 지.
달래는 방법도 있을 테고,
능란한 말솜씨로 설득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며,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단도직입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방법을 선택하다니.
마치 한 두 해 정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찾아냈다고 말하듯
툭 하고 풀어 놓으면 상대방은 어떻게 받아들이라는 건지.
기나긴 이십오 년의 세월 속에 단절된 시간인 것을.
상현은 두 사람이 좀 더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기 위해
멀찌감치 물러섰다.
상황 개입 반경에 들어서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오가는 말들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위치.
“…말해 봐! 지금까지 단 하루라도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잊은 적 있나?”
“잊었어요!”
“거짓말! 잊었다고 믿고 싶은 거겠지!”
“아니에요!”
“그래서 실종신고를 하고 사람 찾는다는 전단지와 광고를 냈었나!”
“그, 그걸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에게조차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면서
낳아준 어머니를 버릴 수 있어? 대답해 봐!”
“어, 어차피 난 태어나면서부터 버림 받았어요!
이젠 내가 뿌리칠 거에요! 만나지 않아! 만나고 싶지 않다구요!”
“그러면서도 사진은 갖고 있는 당신의 이중성을 뭘로 성명하지?”
할 말이 없었다.
이 남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민혁이 했던 말은 모두 진실, 자신이 했던 말은 모두 거짓.
단 하루라도 언젠가는 만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결코 잊어버린 적이 없었고,
그리움에 몸부림칠 때마다
실종신고를 접수하고 사람 찾는다는 전단지를 돌렸다.
게다가 자신을 버린 사람이라며 매몰차게 밀쳐낼 수조차 없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상조차 없지만
결코 채워지지도 않고 해소되지도 않을 그리움에 목말라 있는 것을
이 남자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자신이 아무리 안간힘을 써 봐도 찾을 수 없었는데
어떻게 이토록 쉽게 찾아낼 수 있었던 걸까.
자신에게 머물렀던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어 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이것이 진실인 것일까.
“걸어가! 두려워 할 것도 없고, 도망칠 필요도 없어!
떳떳하게 걸어가면 되는 거야.”
“자신이…없어요. 만난다 해도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보고 싶어! 당신이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나도 한 번 고려해 보지.”
하연의 눈동자 속에서 희미했던 결심의 빛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던 자신을 이제 와서 받아줄까.
한 번 거부당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안간힘을 쓰며 움트는 희망.
두 갈래 길에서 되돌아가려던 하연을 붙잡아 준 건 민혁이었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보고 싶다는 사람.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에 하연의 결심은 보여주고 싶다는 방향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파란 실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긴장한 하연에게 순간 따스함이 스몄다.
크고 따뜻한 손.
그가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내 쓰라림까지도 감싸주려 하고 있구나.
눈빛과 온기에 은빛으로 빛나는 물결 같은 믿음을 주고 있구나.
불안하게 뛰던 심장박동은 어느 새 평온한 상태로 되돌아 와 있었다.
민혁이 하연의 손을 놓아 주었을 때,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외롭게 버티고 선 건물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요정의 은가루처럼,
귓가에 속살거리는 주문처럼,
부서지는 포말에 숨겨진 속삭임처럼
하연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스스로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시는 모습에 감격했습니다.”
상현은 어느 새 민혁의 곁에 다가와
지나치리만큼 깍듯한 몸짓과 표정으로 겸손한 칭찬의 말을 하고 있었다.
“난 누구에게나 관대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잊었나?
아니면 이제 모든 게 귀찮아져서 오랜 휴식 기간을 갖고 싶은 건가?”
“…잠깐 잊었습니다. 회장님 고집은 하연씨도 이길 수가 없나 봅니다.”
“자네는 아직 멀었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냐!
서로를 향한 배려와 수용일 뿐.
그런 것도 모르면서 내게 충고 따윌 하는 건가? 가소롭군.”
완벽한 참패! 게다가 역공으로 한 방 먹기까지 했다.
다시 일어나 공격을 할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
인정사정없이 날린 한 방에 상현은 깔끔하게 승복했다.
양쪽 어깨를 으쓱하며 선글라스를 고쳐 쓰던 상현을 향해
민혁은 확인사살까지 날렸다.
“아, 자네가 지금까지 여자와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상대가 없다는 사실을 잊었군.
일단 내게 충고하기 전에 상대부터 찾아보는 게 어떤가.
내 진심이 담긴 충고지.”
이럴 수가!
진심어린 충고를 빙자한 공격에 상현은 입을 벌린 채 할 말조차 찾지 못했다.
상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가로젓고 있을 때,
민혁은 이미 저만치 당당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것.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할 줄 알았던 민혁은
이미 배려와 수용이라는 차선책을 찾아낸 것이 분명했다.
때로는 우선을 능가하는 차선도 있는 법!
상현은 재빨리 민혁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하연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자신을 닮은 눈썹, 자신을 닮은 콧날,
자신을 닮은 도톰한 입술과 부드러운 턱선.
애처로울 만큼이나 야윈 목까지 더듬어 내려갔을 때,
투둑 하며 눈물 방울들이 부서져 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몇 번이고 자신이 걸어온 복도를 바라보며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더랬다.
절대 미소 짓지 말자.
절대 눈물 흘리지도 말자.
절대 그리워했던 표시를 내서는 안 된다.
만약 손을 붙잡으려 한다면 매몰차게 뿌리치리라.
말 한 마디에 원망 서 말을 담아 똑똑히 물어봐야지.
왜 자기를 버렸냐고.
그렇게 버리고 떠나서 행복했냐고.
절대로 엄마라는 소리는 하지 않으리라.
무수히 많은 망설임을 안고 문을 열자마자
하연은 모든 결심들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침대에 힘없이 앉아 있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단 한 마디 때문에.
“…진…하…연…?”
왈칵 쏟아지던 눈물과 함께 문 앞에서 했던 결심들은 모조리 씻어 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그리워했던 건 엄마가 불러주는 자신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이런 거구나.
엄마가 불러준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걷잡을 수 없이 벅차오르는 감격과 흘러내리던 눈물들.
이토록 사무치게 따스할 줄이야.
이십 오 년 간 쌓아왔던 그리움들이
한꺼번에 채워지는 듯한 느낌에
하연은 여자의 품속에서 오래도록 울었다.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멈춘 뒤, 정적만이 감도는 방 안에서
하연과 여자는 오래도록 서로를 더듬었다.
차마 말로 못다한 수많은 상념들이 오고 갔다.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여자의 손길을 느끼며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생각을 고쳤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는
절대로 그리움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으로 전해지는 그리움은
자신이 지녔던 그것보다 몇 배나 컸다.
눈물로 구슬을 꿰어도 그 설움과 아픔을 다할 수는 없으리라.
“…어…엄…마…. 엄마! 엄마!”
그까짓 결심 따위로 하연의 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가슴이 느끼고 마음이 시켜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소리.
거짓말처럼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엄마 소리에
여자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분명히 사진 속에 있던 엄마는 훨씬 아름답고 젊었는데.
흰머리는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눈 가에 깊이 패인 주름은 또 언제 생겨 버린 거야.
어떻게 채워 넣어야만 할까.
그 변하는 모습들을 모두 눈에 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만 하나.
“미안하다. 미안하다, 하연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반드시 만나게 되면 직접 사과를 듣고 말리라 결심했었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가 비수로 화(化)해 가슴속에 박혔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나면 후련해질 줄 알았는데.
먹먹해진 가슴을 붙잡고 하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슬픔의 폭풍이 휘몰아친 뒤,
잠잠한 파도가 주는 포근함이 찾아왔다.
“행복해야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데?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았어야지!”
“널 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늘 죄 값을 치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어.
예쁘게 컸구나, 하연아. 정말이지, 예쁘고 착하게….”
텔레비전에서 오랫동안 헤어져 있다가 만난 사람들이
왜 저렇게 울기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하연도
엄마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을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도무지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사실 정인은 하연보다 몇 배나 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만나야 하나, 만나지 말아야 하나.
조비서에게서 건네받은 사진 속 하연의 모습은
자신이 오랫동안 그려왔던 모습과 쏙 닮아 있었다.
딸의 생일날 마다 혼자서 케이크에 촛불을 켜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더랬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왜 그 어린 것을 떼어놓고서 등을 돌려야만 했을까.
아무리 질문 해봐도 얻어지는 대답은 후회 뿐 이었다.
만약 자신을 만나지 않고 거부한다 해도
고스란히 그 거부를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손가락질을 한다면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며,
욕을 한다면 고스란히 그 욕들을 보듬을 것이라고.
만약 뺨이라도 후려친다면 기꺼이 반대쪽 뺨을 내어주리라.
기다리는 시간동안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엄마라고 불러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만, 단 한 번만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훌쩍 커버린 딸을 품속에 안은 정인의 뺨 위로
회한의 눈물이 타고 흘렀다.
그들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민혁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이미 정인도 조비서에게서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민혁의 모습을 발견한 하연이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내가 훼방꾼이 아니길 바래.”
“…고마워요. 정말 뭐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요.”
하연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
정인은 직감적으로 그가 하연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식을 가진 어미의 날카로운 본능은
벌써 그의 사람 됨됨이까지 읽어냈다.
결코 낯간지러운 말투나
잠깐 동안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행동으로 포장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대신 확고한 믿음과 정확한 추진력으로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외로운 아이 곁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
정인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수 백 번의 사랑한다는 말 보다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곳에 틀어박혀 있는 자신을 찾아내고
만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분명 드넓은 배려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리라.
“시간은 앞으로도 많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튼튼한 팔로 깡마른 정인의 몸을 부축하며 정중하게 대하는 민혁을 보며
하연은 가슴 속에 차오르는 행복감을 만끽했다.
곁에 있는 조비서를 시킬 수도 있었지만,
민혁은 그녀가 단지 하연을 낳아 주신 분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공손히 대하는 것이었다.
민혁씨, 이거 알아요?
당신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거.
도무지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쳐다 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다는 거.
오직 당신만 바라보게 만든다는 거.
부축을 받고 있는 정인도 완전히 민혁에게 몸을 맡겼다.
이미 두 사람의 마음이 전해 졌기에.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연은
눈에서 흐른 물기를 살짝 닦아낸 뒤 걸음을 재촉했다.
“엄마를 모시고…어디로 갈 건가요? 집?”
“아니. 병원.”
병원이라는 단어만으로도 하연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깔렸다.
단순히 야위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걸까.
차 뒷좌석에 정인이 무사히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던 민혁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어디가 아프신 건가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면, 간호쯤은 내가 할 수 있어요!
내 손으로 해드리고 싶어요!”
하연의 말을 얼핏 들은 정인은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 채
진심으로 감사했다.
인연의 끈을 연결해 준 하늘에 감사했고
만남의 시간을 빚어 준 민혁에게 감사했으며
자신을 용서해 준 착한 딸에게 감사했다.
어쨌든 민혁은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돌아서며 단호하게 잘랐다.
“안 돼! 당신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안 돼!
아직 병원 치료가 필요하고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으니까.
대신 약속하지!
간병인만큼은 당신의 실력을 능가할 사람으로 고를테니, 조금만 참아!”
실망이 가득 담긴 하연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민혁의 마음이 잠깐 흔들렸지만 다시금 흔들리던 마음을 꽉 움켜쥐었다.
굳이 그녀를 힘들게 할 필요는 없었기에.
눈빛을 나누기에도 아까운 시간을
간병을 하며 힘겹게 보내도록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속 가득 밀려드는 실망을 누른 채 하연은 민혁의 뜻을 읽었다.
그녀의 판단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민혁이 앞좌석에 오르며 말했다.
“대신 곁에 머무르는 건 허락하지.
하지만 나에게 나눠줄 시간은 언제나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 그게 조건이야.”
“…알았어요. 그럴게요. 저…민혁씨?”
“더 할 말 남았나?”
“고마워요. 정말이지 무엇으로 이 고마움을 갚아야 할지….”
“그럼 갚아! 당신이 고마워 한 만큼 나에게 갚아.
어떤 방법인지는 더 잘 알고 있겠지.”
순간순간 표면 위로 떠오르는 그의 표정을 발견하는 일은
그리 빈번한 일이 아니었다.
하연은 굉장히 희박하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환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 민혁의 표정을
운 좋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 밝음이 하연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전해져
커다란 울림을 만들어 놓았다.
고마움을 갚을 수 있는 단 한가지의 방법!
하연이 민혁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건 진실된 마음과 사랑.
그 두 가지 뿐이었고
그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마음 뿐 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하연이었다.
☆★☆
피곤한 몸과 평온한 마음을 이끌고 도착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집이었다.
날카로운 것에 사정없이 찢겨진 듯
너덜너덜한 몰골이 되어 버린 소파와 깨져버린 그릇들,
방마다 폭풍우가 휩쓸고 간 듯 널브러진 물건들.
어지럽게 금이 간 거울과 이미 날카로운 조각으로 변해버린 유리창.
밝음 아래 드러난 혼란들을 본 하연은
다리에 힘을 잃고 풀썩 주저앉았고
민혁은 말없는 분노를 피워 올리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하연이 더듬거렸다.
“도, 도둑이 드, 들었나봐요. 시, 신고 해야겠죠?”
“아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이런 상황에서조차…쓸데없는 짓이라는 비난이 나오나요?
이걸 봐요! 민혁씨 눈에도 보이잖아요! 이건 정말이지…!”
“단순한 도둑이 아냐.”
“그, 그럼요? 도둑이 아니라면 누가 대체 이런 짓을!”
덜덜 떨리며 흘러나오는 하연의 어조가 고르지 않았다.
반면 민혁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침착한 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나야! 시작 됐어. 정신 바짝 차려. 아직까지 아무 일도 없었겠지?”
〔네. 아직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가 댁으로 갈까요?〕
“그럴 필요 없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해.”
민혁의 예민한 후각에 흥분이 남기고 간 잔향이 느껴졌다.
아직도 곳곳에 묻어 있는 후끈한 열기가
머지않은 시각에 난동을 부리고 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상처 입은 자존심을 견디지 못하고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발작을 일으킨 거로군.
문득 민혁의 눈길이 깨져버린 거실 탁자 유리에 닿았다.
몇 방울의 붉은 피!
손가락으로 느껴본 피에서 독기(毒氣)가 뿜어져 나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닥치는 대로 물어뜯고 할퀴다가
제 스스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하연은 민혁의 등 뒤에서 은근히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분노에 또 한 번 놀랐다.
고요한 분노는 뼛속 까지 스미는 법.
자신에게 화를 내던 모습과 너무나 대조적인 남자의 모습에
하연은 흐려지던 정신을 애써 모았다.
이것이 진정한 그의 분노였구나.
팽팽하게 당겨진 시간을 가르며 전화벨이 울렸다.
날렵한 몸놀림으로 민혁은 수화기를 손에 들었다.
〔…어디 있어?”〕
역시!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듯 불규칙적으로 새나오고 있었다.
반면 민혁의 표정은 전혀 서두를 게 없다는 듯
여유로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변했다.
다만, 절대 냉랭함은 거두지 않았다.
주변의 공기를 모두 얼려버릴 만큼 섬뜩한 냉기에 하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있어? 어디 있냔 말이야! 어디다 숨겼어?〕
“뭘 찾는지 모르겠군. 분명히 말하지만 내 손에는 없어!”
민혁은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숨소리 하나에도 긴장이 어려 있는 것을 느끼며
하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누구…예요? 이런 짓을 한 사람이…?”
“당신이 용서하라고 했던 사람! 독사 같은 여자!
이제 알겠어? 내가 왜 용서 할 수 없다고 했는지.
악랄함은 파괴를 부르지. 이렇게.”
하연의 머릿속에 파괴자의 모습이 점점 선명한 형상을 띄어 갔을 때
문득 귓가에 위험을 가득 담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따스한 공간일수록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소리가 다시금 되살아났을 때,
하연의 몸이 와들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절대로 악랄함에 사정을 두지는 않는다!
민혁이 하연의 몸을 가만히 끌어안았을 때,
잠시 후 그녀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면서 찾아온 잠이었다.
그래, 감당할 수 없었을 테지.
힘들었을 테지.
민혁은 그렇게 팔과 몸으로 튼튼한 성벽을 만들어 하연을 안아 주었다.
************************************************************************************
어젯밤에 올리려다가 다듬기와 편집이 늦어져서 오늘 아침에서야 올립니다. ^^
오늘은 길~게 올렸습니다.
타인의 상처를 알아보고 보듬어 줄 수 있었던 하연에게도
남모를 상처가 있었던 거예요...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좀 더 세심했어야 할 부분들에서 한계를 느꼈습니다..
제가 너무 쉽게 모녀의 재회를 그린 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오늘 하루도 힘차게 시작하세요~! (목요일 밤에 찾아뵐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