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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없는 이야기 -2-

상추캔디 |2004.09.08 11:40
조회 1,156 |추천 0

피구왕 통키가 나올듯한 햇살 찬란한 날씨에 몸이 녹아버릴 것 같지만 가게에서

가깝고 집에 가는 방향이라 차도 없이 일부러 뛰어갔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숨을 고르는 사이에 이윽고 14층에 멈추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한 발짝 앞으로 내딛으며 주소를 적어온 쪽지를 다시 한 번 보고

확인한 후 1403호라고 적힌 문 앞에 섰다.

벨을 누르려고 오른손을 뻗었다.

순간 문 손잡이 소리가 나는 듯 싶더니 문이 벌컥 열리고 한 손에 짜장면 그릇같은걸

든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에그머니나;;"

공교롭게도 이 해괴망측한 소리는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문을 열어서 날 깜짝 놀라게 한 장본인은

긴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올려서 머리집게로 고정하고 갈색 반바지에 하얀 반팔티를

아무렇게나 걸친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초반쯤?

이렇게 0.3초동안 탐색을 하고 있을때

에그머니나 소리가 우스웠는지 입에 엷은 미소-비웃음-를

띄운채로 그녀가 '집주인의 대사'를 읊었다.

"누구시죠?"

"아,예 컴퓨터 고장 났다고 전화주셨죠?"

저 아무렇게나 틀어올린 머리가 왠지 익숙하다 라고 생각하며 나도 '컴퓨터 수리기사의

대사'를 읊었고 그녀는 들고 있던 그릇들을 문 밖에 놔두고는(던져 놓고는 이라고

하는 쪽 이 맞지만)들어오라며 내 팔을 잡아끌고(!) 문을 닫았다.

신발을 벗는 동안 그녀는 성큼성큼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왼쪽에 보이는 문 앞에 서서

컴퓨터가 있는 방이라며 가리켰다.

그녀가 방문을 열어주자 내 눈앞에 보인건 일단 오솔길 이었다.

갖가지 물건들이 방바닥에 흐트려져 있었는데 그 물건들 사이로 길게 오솔길이

나있었다. 오솔길을 걸어서 컴퓨터에 '당도'한 후 컴퓨터 의자가 없기에 머뭇거리고 있으니

"의자는 원래 없어요. 그냥 침대에 앉아서 하세요"

라고 한다.

침대에 앉아서 컴퓨터를 둘러보았다. 전화를 받고 대충 짐작 했지만 바이러스 인 모양이다.

가지고 온 시디자켓에서 백신 시디를 빼서 시디롬에 넣고는 셋업파일을 실행했다.

그런데..이 여자는 왜 더운데 아까부터 이렇게 옆에 바짝 붙어서 내 얼굴을 빤히 보는걸까.

온갖 '다음'버튼과 동의 버튼을 누를때까지도 계속 쳐다보고있다.

괜시리 무안해진다. 뭔가 말 이라도 건네봐야겠다.

"저기..죄송한데 시원한 마실것 좀 없나요? 뛰어 왔더니 덥네요;;"

"없는데요"

..무안 곱하기 10이다.

"그럼 미지근한 물 이라도 있으면 '제발'좀 가져다 주실래요?"

"그러죠, 뭐"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하고 일어서서 예의 그 '오솔길'을 걸어 나갔다.

셋업 게이지가 12에서 29까지 차자 하얀 머그컵을 손에 들고 건넨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곤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는 다시 옆에 바짝 앉고는 무릎을 침대위로 올려서 상체에 바짝대곤

손으로 깍지를 껴서 다리를 감쌌다. 저러면 허리에 안 좋은데..

"아직 멀었나요?"

정말로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60넘어가는 게이지를 주시하고 있자 그녀가 물었다.

"아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아요. 한 10분이면 될껍니다"

"수리비는 얼마죠?"

"출장비 3만원만 주시면 되요"

비록 와서 한 일이라곤 백신 깔고 바이러스 없앤것 밖에 없지만-아마도-

여튼 출장비는 3만원이다.

"흐음-"

그녀는 컴 수리비가 3만원이구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듯한 콧소리를 내고

깍지를 풀곤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돈 뭉치에서 꼬깃꼬깃해진 세종대왕님 세 분을

세어서 나에게 건냈다.

나는 "감사합니다" 라며 돈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참 이상하다.

지갑에 돈을 넣으니 10분정도 잊어버리고 있던 첫사랑 생각이 다시 난다.

그러다가 메일을 보냈다 라는 곳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장이 왔을까..

괜시리 입이 말라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여기서 메일 확인을 해봐야겠는데 인터넷이

안 되는것 같다.

"여기 인터넷 안 되나..케엑"

인터넷 안 되냐고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리니까 좀 전 까지 앉아있던 사람이 옆에 없고

대신 내가 앉아 있는 침대에 누워서 '자고'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 외간남자가 방에 들어와 앉아있는데 도대체 출처가 어디인

정체불명의 배짱일까? 더군다나 나는 혈기 왕성한 20대청년 이란 말이지.

가만, 내가 지금 야설에 들어와 있나?

"띵동!"

잡스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바이러스 검사가 다 끝난 것 같다.

만져보니 아무 이상도 없는 것 같다. 할 일 다 했으면 이만 집에 가야지..

행여나 잠에서 깨울까 모니터 바로 옆에 명함을 놔두고 시디자켓을 챙겨서

조용히 집에서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시계를 보니 4시에 분침이 숫자 6을 약간 넘어가고 있었다.

낮잠 자기에도 늦은 시각이고 잠을 자기에는 이른 시각인데 밤이라도 셌나보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방금 탈출한 잠자는 공주가 있는 집 문밖에 집 지키는

개라도 되는 양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짜장면 그릇 두어개를 바라보는 동안

엘리베이터 문이 양쪽에서 닫혀왔다.

 

 

 

 

 

오후1시 17분..39,40,41초

같이 점심이나 먹으며 데이트나 즐겨볼까?라고 하는 경수형의 '데이트 요청'도 뿌리치고

점심도 안 먹은채 가게안에 혼자 앉아서 또 메일 체크를 하고있다.

어제 그 여자 집에서 나온 후 가게에 들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퇴근을 하고

샤워하고 저녁밥을 먹는 동안을 빼고는 줄곧 메일체크만 해서 지금까지 300만번 쯤 한것 같다.

어제 저녁부터 온 메일은 '휴지대신 세숫대야를 준비하세요' 라는 것 도 있었고

'저 임신인가 봐요' 라는 충격을 줄 듯한 제목의 것도,

'미국것은 절대로 팔지도, 보지도 않겠습니다.'라는 애국정신이 넘치는 제목의

성인 스팸메일도 있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혹시 메일이 잘 전송이 되지 않았나싶어 수신확인을 눌러 보았지만 사람찾기에서 검색해

보낸 메일은 수신확인이 불가능 한가보다.

후..그나저나 어제 저녁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확실히 배가 고프긴하다. 가게 옆의 김밥집에 가서 김밥이라도 몇 줄 사와야겠다.

'부르르르르'

일어난 순간 핸드폰이 책상위에서 지랄 댄스를 춘다.

"여보세요?"

"백창우씨 핸드폰 이죠?"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다. 누구더라..

"어제 컴퓨터 수리 받은 사람인데요. 미화아파트 103동 1403호요.."

아, 어제 그 아가씨다. 오랜만에 나를 당황하게 한 이상한 아가씨.

어제 놔두고 간 명함을 보고 전화를 했나보다.

 

 

 

 

 

 

 

 

 

 


어제 바이러스 없애고 5분정도 만져보니 아무 이상없는 것 같길래 그냥 왔는데

뭔가가 남은 모양이다...라고 생각하고 도착했지만


"이 동영상이 안 보여서 부르셨다구요?"

"예, 어제 친구가 빌려준 시디인데 안 나와서요. 여태까지 다른 시디들은 다

잘 나왔는데 이것만 안 나오길래 어제 덜 고치고 가신거 아닌가 해서요."

코덱깔아주러 출장 오기는 또 처음이다.

"어제는 드래그도 안 되고 파일 복사도 안 되고 cpu점유율이 괜히 100%가 되기도

했지만 그건 바이러스 문제였어요. 지금 이거랑은 별개의 문제에요."

cpu점유율 부분을 얘기할 때 표정을 살피니 아원자 입자의 양전자증류법의 설명을

듣는 초등학생의-사실 나도 똑같겠지만-표정이다.

"뭐 어쨌든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니까 금방 될꺼에요."

코덱이나 잡다한 유틸이 들어있는 시디를 찾아서 시디자켓을 뒤적였다.

"돈은 얼마 드려야 하나요?"

"어제의 연장 수리라는 셈 치고 공짜로 해드릴께요. 별달리 하는 것 도 없거든요."

사실 일단 왔으면 출장비 3만원을 받아야 하지만 어제도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하면서

또 돈을 받는다는게 좀 그런 것 같아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와..고맙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정말로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웃는 모습은 처음 보지만 자세히 보니 제법 예쁘게 생긴 아가씨다.

"시원한 거 갖다 드릴께요"

하더니 일어나서 약간 신이 난듯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방을 나갔다.

돈을 안 받는다고 하니 미소를 지으며 자진해서 음료를 내온다.

아가씨의 탈을 쓴 아줌마이지 싶다.

코덱을 다 깔고 그녀가 빌려왔다는 시디를 집어넣고 탐색기로 열었다.

그녀가 건네주는 정말 '시원한'사이다를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신후 CF1.avi 라는 파일을

열고 미디어 플레이어가 뜨는걸 보며 물어봤다.

"이거 무슨 영화에요?"

"영화는 아니구요, 그냥 친구들끼리 돌려가면서 보는건데..

까지 말했을때 순간 화면을 가득 매운 영상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그녀대신 대답을 마무리 해줬다.

저건 아무리 순도100%새빨간 거짓부랑을 보태도

'사람의 본성을 일깨워주는 성인 영상매체'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게다가 자막!! 까지 나온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시디 빌려달라고 해볼까..라는 생각이 떠오른것은

내가 미쳤기 때문일까..

그 영상이 나오기 시작한지 그러니까 내가 당황하기 시작한지 5초가 지난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내년 여름까지 갈 충격을 집어먹었다.

"이번껀 꽤 재밌게 보이네.."

그것도 자뭇 진지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물론 내가 놀란 건 여자가 이런 영상을 본다는 거 때문이 아니다.

남자를, 그것도 두 번째 보는 분명한 '외간남자'를 30Cm 사이에 두고서

플레이 되어버린 성인영상매체를 보고 하는 말이

'친구가 시디를 이상한 걸 줬네' 도 아니고

'지금 뭘 틀으신거죠?'라고 하며 나에게 덤탱이 씌우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던듯 순수한 비평가의 눈빛과 더불어

"이번껀 꽤 재밌게 보이네.."라는 '프로'의 대사라니.

어제 내 옆에서 잠을 자버렸을때부터 생각해본 거지만

처음 보는 남자를 방안에 놔두고 잠을 자거나 두번째 볼때는 방안에 놔두고

포르노를 같이 감상하다니..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여자인지 싶다.

아, 분명히 오늘은 진짜로 야설에 들어와 있나보다.

"띵동"

어제와 똑같은 전개인듯 싶지만 이번 것은 초인종 소리다.

"저기요"

"네?!!"

갑자기 말을 걸어서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내 대답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거, 짜장면 값인데요. 이것 좀 저 대신 주고 올래요?

저 배달부 맨날 올때마다 제 몸을 훑어본다구요.

성질 같아서는 가랑이를 걷어차주고 싶지만 저 짜장면집이 꽤 맛있어서

그럴 수 가 없어요"

라고 하며 주머니에서 세종대왕님 한 분을 꺼내서 내밀었다.

묘하고 어색한 상황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나를 구해준 구세주는 왠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릇들을 하나 둘 씩 꺼내놓고는 내가 내미는

만원짜리를 천원짜리 네 장으로 바꿔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철가방을 손에 들고 왠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 하고 사라졌다.


                        -3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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