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영은 당당하게 소리쳐 놓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공은 그녀의 들린 옷섶 사이로 목까지 발개진 것을 보았다.
" 내가 여복이 많긴 많아. 아화에다 이젠 이런 영계 색시까지 얻게 되었으니. 하하하"
제공은 화통하게 웃었다.
" 묘영아, 이젠 그만 내 얼굴을 봐 주거라."
묘영은 제공의 웃음 소리에 밝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마음을 연 제공과 묘영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묘영은 그 시간이 믿기지 않을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복은 아랫층에서 들리는 심상치 않은 소란과 함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아랫층에서부터 뭔가가 무자비하게 부서져 나가는 소리와 여자들의 비명 소리, 남자들이 뭐라 바쁘게 고함치는 소리가 섞여 제공과 묘영의 즐거운 시간을 침범하여 들어왔다. 소란이 계속되더니 이제는 윗층 복도에도 바쁜 발소리와 겨우 목소리를 눌러내는 소곤거림으로 평화가 깨어지기 시작했고, 제공의 호기심이 극에 달할 즈음 기녀 한 명이 허락도 고하지도 않고 불쑥 둘의 객실로 뛰어 들어왔다. 이제 소란은 완전히 윗층으로 넘어온 듯 부서지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기 시작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다급히 뛰어들어온 기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 전하, 고하지도 않고 들어선 소녀를 용서하시어요. 허나...묘영을 데리고 가야합니다. 허락해주세요."
정황을 보니 한치가 급한 게 분명한데도 제공은 여전히 여유를 부렸다.
" 이제 막 흥이 나려던 차인데, 그건 안되지."
제공의 지나친 여유에 기녀는 심하게 당황한 얼굴로 초조하게 다시 당부했다.
" 전하, 묘영이 위험한 일이옵니다. 보내주시어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다.
문짝 부서지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 했다. 순간 낯선 정적을 느낀 기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제공과 묘영을 바라보았다. 묘영과 제공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등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었고, 둘의 얼굴에 나타난 심각한 당혹감을 알아차린 기녀는 그제서야 서늘한 기운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지만, 의심많은 그녀의 육체는 눈으로 자신의 느낌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녀는 느낌이 정확하게 들어맞자,온 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박살 난 미닫이 문의 잔해를 밟고 모든 것을 압도하며 서 있는 거대한 존재를 보았다. 기녀는 그를 보며 성난 붉은 황소를 떠 올렸다. 이대로 돌진하여 그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어 버릴 듯 절대적인 강함을 지닌 남자가 거대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초율에게는 자신의 앞에서 퍼져있는 기녀나 이미 초율의 정체를 짐작하고 묘하게 즐거운 미소를 띄고 있는 제공 따위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초율은 얼어붙은 듯 꼼짝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묘영만을 직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새 묘영은 상당히 자라 있었다. 어릴 적의 그녀와는 너무나 변했지만 초율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초율의 눈 속에는 오직 묘영만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편, 단숨에 초율의 정체를 알아버린 묘영은 두려움과 심한 반발감으로 몸을 몹시도 떨었다. 그녀는 바닥에 퍼져있는 치맛자락을 움켜쥐며 떨림을 참아내려 했지만 쉽사리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자신과 묘영만을 두고 있던 초율은 묘영이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도 못한 채,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을 잡아내고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묘영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 분명 분노와 공포와 혐오의 감정이라는 것을 초율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초율이 자기가 사랑하던 여인과 그녀의 집을 찾을 때면 어린 묘영은 해맑게 웃으며 달려나와 초율의 목을 끌어 안고 무등을 타려했다. 다들 초율을 두려워했지만, 묘영만은 맘껏 초율에게 부대끼고 사랑을 표현하고 쉴 새 없이 종알대며 온전하게 그를 받아들이는 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랬던 묘영이 지금은 공포에 질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율은 그런 묘영의 태도가 당혹스러웠다. 그의 머리로 이런 변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노에 차서는 기루에 들이닥쳤고 객실의 모든 문을 부수며 묘영을 찾아 헤매던 초율의 난폭함은 묘영의 그러한 태도로 인해 한풀 꺾여 버렸다.
" 묘영, 너를 데리러 왔다."
초율은 다소 부드러운 말투로 자신의 목적을 전달했다. 그러자, 묘영은 더욱 심하게 몸을 떨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 가...가지 않겠어요!....난...난...가지..않아요!"
" 내 말은, 너를 데리고 가겠다는 뜻이다."
초율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자신의 뜻을 분명히 전달했다. 묘영은 미친 듯 고개를 내 저으며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악을 썼다.
" 난 가지 않아요! 여기서 날 죽인대도 절대 당신을 따라 가진 않아!"
묘영은 더 이상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심하게 떨며 초율의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콱 깨물었지만 이미 그녀의 눈물은 소리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둘 사이에 숨겨진 사연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하여 가만히 사태를 지켜보던 제공은 그 쯤에서 방관자 역할을 그만 두기로 하였다.
제공은 묘영을 향해 있는 초율의 시선을 막아서며 우아하게 상체를 굽혀 예를 올렸다. 상체를 일으키는 그의 얼굴은 쾌활한 웃음으로 가득했고, 일단 초율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리는 데 성공했다.
" 제 4황자께 남방성 증장천왕 제공이 인사 올리옵니다."
"..........."
제공이 예상한대로 초율은 침묵을 지켰다. 그의 시선은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 무미건조했다. 초율의 관심은 짧게 끝나버렸고, 그는 묘영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묘영은 그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라 제공 뒤로 뛰어가 숨어버렸고 그제서야 초율은 제공이 거슬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 비켜라."
제공은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내내 달고 있었다.
" 전하, 소인과 한 잔 하시겠습니까?"
대답대신 초율의 몸에서 살기가 치솟았다.
'성깔도 보통은 넘는군.'
제공은 순식간에 증폭하는 초율의 분노를 느끼고는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묘영은 제공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떨림이 소맷자락을 통해 고스란히 제공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제공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면서 팔짱을 꼈다.
" 이 연약한 아가씨가 마치 매에 쫓기는 어린 새처럼 떨고 있지 않습니까, 전하? 여자와 어린애는 부드럽게 다루어야 절로 품으로 달려드는 법이지요."
" 건방이 지나치군."
초율은 순식간에 제공의 목을 향에 손을 뻗었다.
=공개수업이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후련한 반면 약간 서운함도 남네요. 그 동안 글이 참 쓰고 싶었습니다. 꽤 지겨운 시간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