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wi - 03
“커엉. 크어엉.”
‘이 정도면 발로 차도 모를 것 같군.’
셋째 언니의 코고는 소리가 2단계에 이르렀음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3단계인 ‘크엉, 크엉, 커어엉’은 오히려 쉽게 잠을 깨기도 하기 때문에 빨리 처리를 해야 했다. 오늘따라 2, 3단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코고는 소리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든 척 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니 시간은 벌써 12시를 넘기고 있었고, 이러다가 나도 잠이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바심이 들었다.
“크엉, 크엉, 커어엉.”
‘3단계?’
다시 잽싸게 이불을 덮었다.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내가 아까 커피를 너무 진하게 탔나?’
잘못된 것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이런 반복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아예 용감하게 그냥 일어나 버릴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언니의 다리를 슬며시 건드려 보았다. 다행히 언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과민했어. 방안에서 춤추고 노래를 해도 깰 언니가 아닌데.’
이내 마음을 다시 다잡고는 몸을 일으켜 목표물을 포착, 잽싸게 몸을 날렸다. 목표물인 언니의 핸드폰은 넓은 언니를 건너 책상 위에 있었으므로 언니를 넘어갈 때는 빠른 몸놀림이 필요했다.
“으어엉.”
새로운 버전의 잠꼬대에 놀란 나는 혹시나 언니의 다리를 밟은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언니를 내려보았고, 순간 손안에 들려있던 핸드폰은 손안에서 주르르 미끄러져 나와 바닥으로 짧은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도 정확히 꿈꾸고 있는 셋째 언니의 관자놀이에 내리꽂혀 버렸다.
“아야.”
가늘게 그리고 짜증스럽게 뜬 셋째 언니의 눈이 나를 노려보았다. 내 눈에 미안함을 담아 그녀에게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어둠의 방해가 심했고, 무엇보다 그녀가 섬세한 눈빛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시 말이란 것이 이 상황에 나의 미안함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란 생각에 말을 꺼냈지만 언니의 눈빛이 빠르게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야밤에 본 살벌한 눈빛에 얼어버린 걸까?
“미, 미...”
“미친 년.”
그녀는 마치 꿈을 꾸듯 말했다. ‘미’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는 끝말잇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삼행시의 운을 띄워주는 것이라 생각을 했는지 나의 미안하다는 말을 잘라먹고, 저런 말을 하다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그렇고, ‘미’라고 시작하는 단어를 적절히 찾아낸 것도 그렇고 언니의 함축적 말에 열은 받으면서도 감동을 먹고 말았다.
‘연륜이라는 건 정말 무섭구나.’
한마디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언니는 관자놀이를 몇 번 문지르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잠을 청하는 듯했다. 얼어있던 나는 등 돌린 언니를 보고서야 몸이 움직였기에 곧 언니의 핸드폰을 손에 쥐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앉아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왜 그녀가 깊은 잠을 들 때까지 기다리는 미련을 떨었을까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니가 누운 후에 화장실에 가는 척 슬쩍 책상 위에 핸드폰을 가져나왔더라도 그녀는 알 길이 없었을 텐데.
작지만 분명 범죄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작은 범죄는 서루오빠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계획된 것이었다. 이후에 나의 눈은 계속 언니의 핸드폰을 쫓고 있었고, 저녁 시간 내내 긴장감 속에서 언니의 행동을 주시해왔었다. 완전 범죄를 위한 조심성이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묘향이옵니다]
언니의 핸드폰 액정에 새겨진 말에 픽하고 웃음이 나왔다.
‘누가 언니 묘향인 줄 모를까봐?’
셋째 언니의 이름은 묘향이었다. 강묘향. 자연스레 별명은 강모양이 되어 버렸다.
산에서 만난 엄마, 아빠는 그것을 기리기 위해서였을까 나를 제외한 모든 딸들의 이름을 산 이름으로 지으셨다.
큰 언니는 강매화. 작은 언니는 강청옥. 셋째 언니는 강묘향.
가족들이 둘러앉아 아빠가 딸들의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기생집에 온 듯한 풍경이다. ‘매화야, 청옥아, 묘향아’ 아빠가 이름을 부를 때면 꼭 가야금 연주가 어디서 흘러나올 듯한 착각이 든다. 셋째 언니도 마치 자신이 조선시대 사람인양 [묘향이옵니다]라고 써놓은 문구가 픽하고 웃음을 짓게 만든 것이다.
‘어디 보자.’
다행히 오늘 온 전화는 서루 오빠의 전화뿐이었다. 언니는 서루오빠에게는 무심한지 저장도 해놓지 않았다. 다른 번호들이 많았다면 헷갈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핸드폰에 번호를 입력하고 저장까지 완벽하게 마치고서 핸드폰을 닫으려 하는데 통화버튼이 시선을 잡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미래의 남편과 통화를 할 수 있다는 유혹은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강력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버튼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짧은 순간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것이 걸리긴 했지만 손가락은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있었다.
‘가만, 전화해서 뭐라고 한다.’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늦은 밤 전화를 해서 할 적당한 말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 눈에 들어온 것이 언니의 핸드폰이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내일 들어가고 지금은 서루오빠의 목소리만 듣는 것으로 만족하자. 받자마자 끊어야지.’
언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건다면 다시 전화를 걸어와도 ‘죄송해요. 버튼을 잘못 눌렀어요.’하면 그만인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내 운명의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와 통화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과외를 받으며 얼굴을 본 적이 있었지만 통화를 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운명의 남자에게 전화를 처음 거는 장소가 화장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것도 지금 전화기를 내려놓을 이유가 되지 않았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컬러링도 되어 있지 않은 그냥 신호음이 갔다. 별 일도 아닌데 왠지 여자친구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어, 누나?”
잠시 후 전화기 건너편에서 잠에서 막 깬 듯한 서루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톤이 낮은 그리고 메어 있는 듯한 음색. 내 운명에 한 걸음 가까이 갔다는 생각에 전화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가슴은 반대로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끊어야 하나? 한마디만 더 듣고 끊자.’
너무도 달콤한 오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전화기에 귀를 바짝 가져갔다.
“누구야? 밤늦게.”
하지만 귀에 들어온 것은 짜증이 섞인 듯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kiwi - 04
“그냥 학교 선배야.”
수화기를 멀리하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서루 오빠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오빠는 여자를 그냥이라는 말로 달래고 있었다.
그냥 아는 사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냥 걸려온 전화. 오빠는 밤늦게 걸려온 전화를 설명해야하는 여자와 야심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어, 누나! 밤늦게 무슨 일이에요?”
조심스럽게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편의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에게 자상하게 굴다니. 이번에는 밤늦게라는 말에 신경이 거슬려서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밤늦게 볼 일은 없었다. 나는 서루 오빠가 이 시간에 누구랑 같이 있든 아직은 상관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잠시 후 언니의 핸드폰이 짧게 몇 번 울렸지만 받을까 고민하는 사이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난 이미 서루오빠에게 미친 게 분명했다. 대체 한 달 동안 나를 가르쳤던 과외선생에게 무얼 바라고 있는 건지 나조차 알 수 없었지만 묘한 억울함이 들었고, 목소리조차 처음 듣는 여자에게 알 수 없는 질투에 사로잡혀서는 화장실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랑이에게 전화나 해볼까?’
그냥 방으로 들어가자니 왠지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젓가락을 뺏겨버린 기분이었다. 젓가락이 없다면 나뭇가지라도 꺾어야지. 그 때 떠오르는 것이 동창 기랑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결혼한 녀석에게 전화를 걸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일어서는데 언니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손은 어느새 접혀있던 핸드폰을 열고 있었다.
“누나! 전화 했었지? 말도 안하고 왜 끊어?”
“서루 오빠?”
“누구...세요?”
“저 묘향언니 동생 혜림이에요.”
“아!”
‘아’라는 감탄사에서 나를 잊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해내면서 뱉는 말이었다.
“어, 잘 있었니?”
“예. 선생님 내일 시간 있어요?”
안부를 묻는 절차를 과감히 무시해버린 질문에 오빠는 잠시 주춤하고 있었다. 이런 절차 무시는 순전히 옆에 있던 그 여자 때문이었다. 짜증스러운 그녀의 목소리가 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내일이라. 약속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물어서 기억이 안 나네.”
“그냥 보려는 거예요. 언니에게 오빠가 전화를 했었다는 말을 듣고 그냥 안본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그럼 그럴까? 근데 어떻게 연락을 하지?”
곤란해 하던 오빠는 그냥이라는 말에 부담을 없어진 모양이었다.
“제가 내일 전화 드릴게요.”
“내일 보자. 잘 자라.”
쉽게 나오겠다고 한 오빠의 행동이 의외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잠결에 실수를 하는군. 그래. 내일 보자구.’
***
큰 언니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둘째 언니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가 몇 번씩 들락거리며 거실에 옷을 죄다 꺼내놓고 있었다. 분주한 나를 물끄러미 보던 언니들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모처럼 쉴 수 있는 날인데도 할 일 없는 쑥덕새 자매들은 갈 곳도 없는 모양이었다. 원래는 우리 모두 부모님이 하는 찜질방에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내부 공사로 찜질방 문을 닫아 놓은 상태라 며칠 휴가를 얻게 된 것이다. 365일 돌아가는 곳이라 며칠 쉬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건만 피 같은 휴가를 집에서 보내다니 불쌍한 노릇이다.
“너 지금 뭐하니?”
큰 언니가 말했다.
“나가려고 옷 고르잖아. 참, 언니들아! 그러지 말고 큰언니랑 둘째 언니 방이랑 합쳐라. 그리고 옷 방 하나 만들자. 그럼 편할 것 같지 않아? 서로 옷도 맘대로 바꿔 입고.”
“그래. 만들어서 넌 그 방에서 살아라. 옷 속에 파묻혀서 살면 좋겠네.”
셋째 언니는 늘 저런 식이다. 말 꺼낸 내가 잘못이지 생각하며 거울 앞에서 이 옷 저 옷을 대보고 있는데 셋째 언니가 또 말을 건네 왔다.
“너 이상하다. 어떻게 하루 만에 그렇게 생생해졌어?”
“딱지 여러 번 맞으면 아무는 시간도 빠르잖아. 너도 잘 알면서.”
내가 답할 말에 둘째 언니가 답을 하더니 좋다고 웃는다.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눈 째진 애한테 빌러 가나봐. 야! 키위 내 말 맞지?”
셋째 언니의 반복되는 짜증나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엄선한 옷 두벌을 들고 언니들에게 물어보았다.
“이게 나아, 이게 나아?”
모두 신통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 언니는 옷을 골라줄 생각이 들었는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결혼용이야, 연애용이야?”
“당연 결혼용이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이야.”
“나이는?”
“스물, 음, 스물다섯.”
“뭐하는 앤데?”
“대학생.”
“그럼 저거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들이 만장일치로 가리킨 옷은 멜방 청치마와 떡볶이 단추가 달린 베이지색 후드 코트였다. 이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성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정장풍 옷만 고르던 나의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컨셉이었다.
“이거? 결혼용 만날 거라니까.”
“그럼 웨딩드레스 입고 나가지 그러냐? 당장 결혼하게.”
셋째 언니가 또 비아냥 거렸다.
“그래두 좀 성숙하게 보였으면 좋겠는데.”
“걔 군대 제대했지?”
“아마도 그랬겠지.”
“남자는 군대 다녀오면 영계를 밝혀. 어려보일수록 좋은 거야. 나이 어린 애를 만나면 주위에서 능력 있다고 생각하거든.”
“맞아. 연상 만나는 남자들 생각해봐. 뭐 얻어먹을 거 없나하고 만나는 것처럼 보이잖아.”
셋째 언니의 말을 둘째 언니가 도왔다.
“그런가?”
여자 넷이 모이면 한 사람은 꼭 바보가 되어버리는 우리 집 가풍에 따라 또 바보가 된 기분이 들면서도 왠지 멜방 청치마가 입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막상 입어보니 서루오빠가 좋아할만한 스타일이라는 확신이 조금씩 들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아.’
언니들의 조언대로 아이쉐도우와 립스틱을 휴지로 약간 지워낸 후 오빠와 약속한 장소로 걸어 나갔다. 운명을 향한 발걸음은 조급함에 자꾸 빨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