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이 #3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은색빛깔에 핑크색 라인이 들어간 토슈즈가 때로는 원을 때로는 나선형을 그려가며 움직이고 있다. 날렵하게 아름다울 정도로 라인이 빠진 곡선의 발, 그러나 아름다운 발의 전체적인 선과 달리 굵게 불거진 발가락의 뼈와 토슈즈위로 간간히 보이는 굳은살이 베긴 발등이 지금 이 발의 주인이 얼마나 수없이 많은 이와 같은 연습을 하여 왔는지를 대변해주고 있다.
이제 며칠 후면 열리게 될 발표회에서 지젤 역을 맡은 그녀는 이렇게 연습실의 나무 마룻바닥이 아닌 학교의 벤치 위에서도 사랑을 믿는 지젤의 감각을 발끝으로 유지하기 위해
틈만 나면 토슈즈를 신고 두 다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벤치 아래로 가지런히 놓인 굽이 낮은 분홍색 구두는 지금 20분 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턴”
그녀의 발이 이제 막 지젤의 1장 마지막 턴을 할 때 쯤 벤치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한 손을 그녀의 왼쪽 어깨에 올린 채 말을 건네었다.
방금 거기가 1장의 마지막 지젤이 약혼자 알프레히트의 배신을 깨닫고 광란에 빠져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죽는 장면이지?
어디보자? 그럼 내가 또 20분쯤 늦은 건가! 하하“
그는 최근에 자주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한 건지 그녀의 마지막 발레 동작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 또! 수현 오빠 정말 이러기야!”
은경은 시계를 가리키며 그에게 눈을 흘겼다.
그는 괜히 미안한지 머리를 한번 긁적이다. 이내 5살난 악동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에게 자판기에서 방금 뽑은 커피 한잔을 건네었다.
“자 이거 먹고 화 풀어. 니가 좋아하는 스타박스 커피야”
“머야 이게 무슨 스타박스야? 지금 학교 구내식당 자판기에서 뽑아온 100원짜리
자판기 커피로 나한테 사기 치는 거야. 죽을래?“
“아냐 잘봐! 여기 스타박스라고 적혀 있잖아. starbox"
은경은 받아든 종이컵을 손으로 돌려보다 그가 종이컵의 뒷면에 검은색 볼펜으로
꼬불꼬불 적어놓은 starbox라는 글자를 보곤 황당한 표정으로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참 starbucks도 아니고 starbox네. 그나저나 오늘은 또 왜 늦은 거야?”
“아 은경아 잠시만”
수현은 그제야 오른쪽 겨드랑이사이에 꼬옥 끼고 있던 그의 보물 노트북을
벤치에 내려놓는다.
노트북 가방에 분명 어깨끈이 있어 어깨에 걸고 다녀도 되건만
그는 늘 70년대 고등학생들이 그네들의 가방을 끼고 다닌 마냥 노트북을
언제나 소중히 오른쪽 겨드랑이사이에 끼운 채 들고 다니고 있었다.
노트북의 전원을 켜고 무언가 분주히 한참을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들긴 후 그는 노트북의 뒤편 usb단자에 꽂아둔 이상한 코드가 붙어있는 기구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기구는 헤어밴드 형태를 한 큰 것 하나와 마치 병원에서 중환자의 심박수와 기타 건강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온몸에 붙이는 의료 기구처럼 살색의 작은 원형을 띄고 있는 것 두 개, 총 세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은경아 잠시만 팔 좀 줘봐”
그는 컴퓨터의 usb단자로부터 가져온 살색의 작은 원형의 기구들을 은경의
양 팔뚝에 붙였다.
“뭐 하는 거야? 설마 전처럼 또 저 헤어밴드를 씌우려는 거야”
사실 벌써 몇 번째 수현은 은경의 머리에 노트북과 연결된 헤어밴드를 씌우곤
알 수 없는 프로그램을 실행한 후 한 참을 그녀에게 아무 문장이나 타이핑을 해보라고
시키곤 하였다.
“쪽팔리게 뭐야 싫어!”
“아냐! 오늘은 정말 틀려. 한번만 오빠를 믿어봐! 응 대신 내가 오늘 영화 쏠게 응?”
“그럼 진짜 스타벅스 커피도 한잔 사는 거야?”
“으응......, 그래.”
정말로 수현이 영화와 스타벅스의 커피를 사줄지 그녀는 믿지 않았지만 은경은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하고자하는 일이 결코 컴퓨터 전공대학생이 장난스럽게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보다 큰 의미의 열정과 따뜻한 마음이 담겨진 무엇인 것을.......,
“전처럼 이거 머리에 쓰면 되지? 이게 뭐야? 내가 이 밴드 색깔 핑크색으로 바꾸라고 했잖아. 쪽팔리게 살색이 머야”
은경은 수현에게 건네어 받은 헤어밴드형태의 그것을 그녀의 작지만 윤기 나는 머리에
쓰면서 투덜거렸다.
“자 그럼 전처럼 아무 문장이나 타이핑 하면 되는 거지?”
마치 무척 익숙한 듯 은경은 수현의 노트북의 자신에게 돌린 후
문장을 입력하기 위해 차가운 검은색 노트북의 자판위에 그녀의 희디흰 따뜻하고
긴 손가락들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아 잠시만 은경아 이것 좀 실행하고”
수현은 노트북에 꽂혀진 마우스를 움직여 바탕화면에 놓여있는 TEST라고 적혀진 작은 단축아이콘 하나를 더블 클릭하기 시작했다.
위이잉........, 노트북이 하드디스크를 읽기 위해 짧은 비명소리를 지르고
이윽고 모니터 화면에 TEST라고 적혀진 파란 색의 프로그램이 구동되기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의 화면은 중앙의 큰 창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위 아래로 구성된 작은 창을 가지고 있었다.
“응? 전에 보던 것과 조금 틀리네? 이제 그럼 아무 문장이나 치면 돼?”
“응 그래! 은경아. 그런데 이번엔 문장 다 칠 필요 없이 니가 입력하고자 하는 문장의
첫 단어만 쳐봐“
“첫 단어만?”
은경은 노트북의 자판에 짜증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은경으로부터 짜증이라는 단어를 입력받은 노트북의 프로그램은
중앙의 창에 짜증과 관련된 문장들을 수없이 출력하기 시작하였고
오른쪽의 상단과 하단의 작은 창들은 알 수 없는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몇 초간의 시간이 흐르고 오른쪽 상하단의 창에 그려지던 그래프가 멈춘 후
이윽고 프로그램은 중앙의 창에
‘짜증나는 이 수현! 꺼져라’라는 완성된 문장을 출력하였다.
“어?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쓰려는 문장이 그대로 나왔네?”
“하하! 어때? 신기하지? 그동안 니가 도와준 덕분에 드디어 성공했어.”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오빠?”
은경은 수현이 약속시간에 늦은 것에 대한 작은 삐침 따위는 온전히 잊어버린 채
지금 이 작은 기계덩어리가 어떻게 단순한 단어 하나로 자신의 마음을 훔쳐내어
정확히 출력을 하였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여기봐! 오른쪽 위에 위치한 작은 창에 나타나는 그래프가 바로
은경이 너의 뇌파야. 그리고 아래쪽의 창에 나타나는 이 녹색 그래프는 너의 맥박이고......“
수현은 마우스를 움직여 하얀색의 커서로 각 각의 창을 가리키며 그래프가 나타내는
의미를 은경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간 니가 입력한 모든 문장들은 이렇게 프로그램에 데이터베이스로 쌓여있어.”
“데이터베이스? 그게 머야? 콘트라베이스 같은 악기 이름이야?”
“하하 데이터베이스는 그러니까 데이터들의 집합이야. 흠! 보자 쉽게 말해서
은경이 니 휴대폰에 니가 각각 입력한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있지? “
“응”
“그런 전화번호를 모아서 휴대폰에 전화번호부로 있는 것들이 바로
말하자면 데이터베이스인거지“
수현의 손이 다시금 은경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아하!”
은경은 이래서 그가 좋다. 늘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알려주는 그가.......,
컴퓨터의 전문용어에서부터 가끔은 일반인들이 아는 상식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오직 발레밖에 모르는 자신에게
수현은 단 한 번도 짜증을 내거나 무안을 준적 없이 그저 따뜻한 손길로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다정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마치 그것은 은경의 발레동작을 맞추어주는 느리지만 가슴을 울리는 경음악처럼 천천히 안단테하게 스며왔다.
“봐 여기에 그동안 니가 적어놓은 문장들과 그 문장을 적을 때의 너의 뇌파와 맥박이 데이터로 저장이 되어있는 거지. 그걸 토대로 니가 단지 어떤 문장의 첫 단어만 입력하면
그 단어가 포함되었던 문장 중에 현재의 너의 뇌파와 맥박상태와 가장 유사한 문장을 선택해서 자동으로 출력을 해주는 거야“
“이야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오빠! 오빠가 지금 이 프로그램 만드는 이유가 전에 몸이 불편하신 분들도 편하게 온라인에서 만큼이라도 일반인들처럼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응 그랬지”
“그런데 이거 조금은 불편하다. 키보드 자판이 자음과 모음이 따로 떨어져있으니까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비록 문장이 아니라 단어를 하나 입력한다고 해도 자음과 모음자판을 순서대로 입력하기가 불편할 텐데......”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수현이 뜬금없이 유행가의 한 소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현은 이래서 그녀가 좋다.
비록 자신과의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하고 공부하는 그녀지만 컴퓨터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컴맹에 가까운 그녀지만 그녀는 늘 수현이 생각하고 수현이 만들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구상하고 수현의 머릿속에 있는 의견들을 존중하고 말없이 따라주었다.
그는 잔뜩 얼굴의 근육을 당겨 그녀가 좋아하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은경의 어깨를 감싸던 손에 더욱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어 그녀를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궁! 어쩜 이렇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지.......,
은경아! 지금 거기에 니가 만들고자하는 문장의 자음만 한번 쳐봐“
“자음만?”
은경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그녀가 만들고 싶은 문장의 자음을 하나하나 입력하기
시작했다.
“ㅅ ㅌ ㅂ ㅅ ㅋ ㅍ ㅅ ㅈ!”
그녀가 마지막 ‘ㅈ’자를 타이핑을 끝냈을 때 프로그램은 다시금 그녀의 뇌와 손목으로부터
뇌파와 맥박을 전송받아 마치 물결치듯 그래프를 그려내기 시작했고
노트북의 하드디스크는 그녀의 두터운 비밀 금고 안에 감추어진 마음을 훔쳐 내기 위해 더욱 큰 소리로 ‘윙윙’거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마치 발레의 일 막이 끝났을 때처럼 그렇게 짧은 몇 초간의 소음과 정적이 흐른 뒤
은경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노트북의 모니터 화면을 쳐다보았다.
파란색 모니터 그리고 당당하게 전 화면을 차지하고 있는 프로그램 그리고
그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앙 창에서 드디어 무언가가 출력되기 시작하였다.
너무도 선명하고 또박하게 완전한 문장을 갖추어 출력된 그것을 쳐다보던 은경은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었다.
프로그램은 분명 은경의 마음속의 그것을 카피라도 한 것처럼 완전하게 출력하고 있었다.
“스타벅스 커피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