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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사랑 - 13. 오해

나비 |2004.12.02 22:30
조회 2,434 |추천 0

** 반칙사랑 - 13. 오해


“죄송합니다. 출시가 다음달로 연기됐어요. 대신 이번에 이강주 20% 할인 행사 때 판매 도우미 보내드릴게요. 비용은 저희 쪽에서 부담하고요. ······. 예. 사장님. 판매 잘하는 도우미로 보내드릴 거니까 매출 신장에도 도움 되실 거예요. ······. 죄송해요. 저 얼굴 봐서 한번만 참아주세요, 예? 새 제품 반응 좋으면 물건 꽉꽉 채워드릴게요. 죄송해요, 사장님! ·····. 내일 꼭 들릴게요. 예. 들어가세요.”


준지에게 배운 유들유들함은 엉뚱한 데서 발휘되고 있었다. 사랑했던 그가 아니라 업체 사장들 비위를 맞추기 위해 콧소리를 섞어냈으며 그것은 반응이 좋았는지 날 지목하는 매장도 많아졌다. 오전 업무가 대충 마무리 됐을 때는 반쯤 지친 상태였다. 몸은 지쳤지만 머리는 지나치게 예민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오늘 따라 유난히 그와 함께 일몰을 본 추억이 날 괴롭히고 있었다.


‘이러지 말자. 영기씨한테 전화나 해볼까?’


때마침 영기씨는 전화를 해주었고 난 퇴근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오전에 부지런히 일한 탓에 퇴근 무렵엔 바쁜 일이 없어서 조금 일찍 회사를 나섰다. 찬영씨는 외근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냉기가 도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팔을 문지르며 숫자들을 보고 있자니 곧 문이 열렸고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는 리듬이 없이 불규칙했다. 아무래도 근래 몸을 너무 혹사시킨 탓 같았다. 오늘은 좀 일찍 들어와야 겠다, 는 생각으로 차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차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했다. 약 30m 앞.


‘갑작스럽게 왜 기다리고 있대? 뒤돌아 나가버릴까? 아니야. 태연하게 차를 타자. 잡아도 할 말이 없다고 해야지.’


리듬감 없던 구두소리는 규칙적이고 힘 있게 바뀌었다. 말을 하지 않고 차에 올라타려고 했을 때 그가 차 문을 막아섰다.


“날 기다린 건가요? 할 말 있으면 다음에 하죠. 약속있어요.”

“어디 가는데?”

“알 거 없잖아요. 비켜주세요.”

“애, 애인 만나러 가니?”

“남 사생활에 궁금한 것도 많군요. 애인을 만나든 아니든 상관없잖아요.”

“키 줘. 가는데 까지 운전해줄게.”

“갑자기 생각이 바꿨어요? 애인 있는 여자의 마음 반쪽이라도 갖겠다는 건가요?”

“반쪽이든 뭐든 좋아. 너랑 얘기만 할 수 있으면 돼. 데려다만 줄게.”


그는 들고 있던 키를 뺏어들더니 운전석에 올랐다. 순간 망설이다가 나도 차에 올랐다. 그는 긴장한 듯 보였지만 운전만큼은 안정되게 하고 있었다.


“너, 그 남자 사랑하지 않지?”

“사랑이 별 건가요? 남자 여자 만나서 데이트하다 보면 감정 생기는 거고, 그게 사랑이죠. 없어도 만들 생각이에요.”

“네가 그 남자 사랑했다면 날 차에 태우지 않았을 거야.”

“그럼 당신은 애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왜 3년 만나니까 싫증이 났어요? 그래서 이 여자 저 여자 힐끔거렸던 거군요. 몰랐네요. 난 그 여자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너 데려다 주기만 할 거야. 싸우지도 않을 거고 소리치고 싶지도 않아.”

“왜 데려다 주는 건데요?”

“네 기분 이해하려고. 네 마음 얼마나 아팠을까 요즘 들어 알게 됐어. 네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보고.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널 보니 가슴이 너무 아프다. 가지 말라고도 하고 싶어. 하지만 너도 아팠겠지.”

“지금 이해해도 소용없어요. 난 마음 돌렸으니까.”

“나 아플 거야. 그래야 너한테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널 보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일주일 후에는 널 다시 찾아올 거야.”

“내가 당신한테 돌아갈 거 같아요? 웃기네요, 진짜.”


그는 정말로 잡을 생각이 없는지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미웠다. 날 나쁜 여자로 만드는 그가 미웠다.


‘뭐야, 이 찜찜한 기분은! 난 누구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야. 그가 보든 안 보든 상관없다는 거라고. 난 당당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그를 데려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너무나 더러운 기분이었기에.


“좋은 일 있으셨어요? 웃으면서 들어오시네요.”


내 억지 웃음을 본 영기씨가 말했다.


“퇴근 후 데이트를 하는데 나쁠 리가 없잖아요.”

“대상이 저라서가 아니고요?”

“영기씨여서 더 좋은 거죠.”


그가 추천해준 메뉴들은 모두 다 괜찮았고 와인도 좋았다. 유난히 맑은 소리를 내는 와인잔도 좋았지만 그의 얘기만큼은 듣기에 지루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매너가 없어요. 그리고 늘 찌푸린 표정이요. 모두 찌들어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칙칙한 문화도 많고요. 홍주씨도 외국에 가보셔서 아시겠지만······.”

“전 외국에 나가본 일이 없는데요.”

“그래요?”


영기씨의 눈은 의외라는 듯 커졌다.


“외국은 꼭 한 번 나가보셔야 해요. 사람이 달라집니다. 보는 시각도 달라지고. 전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방학 때면 외국에 보내주셨죠. 암튼 문화 얘기를 하자면 아줌마들은 텔레비전 드라마 보는 것을 문화생활인 줄 알아요. 어린 애들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상을 배운다나. 그게 말이 됩니까? 맨날 울고 짜는 드라마 일색이잖아요. 요즘 케이블이 있다지만 다양성이 없어요, 다양성이······.”


그의 한국비판은 무려 30분이나 계속되었다. 옆 테이블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는 커플이 식사를 막 마치고 디저트를 주문했다. 그의 이야기를 더는 들어줄 수 없던 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왜 한국에서 사세요? 외국 나가서 사시면 좋잖아요?”

“그게 부모님 때문이기도 하고. 음. 아무래도 고향이니까요.”


고향이라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처음으로 가깝게 느껴졌다.


“익숙해져서가 아니고요?”

“맞죠. 익숙함. 태어나고 자란 곳이니 익숙하죠. 익숙함은 버리기 어려운 거죠.”


삶의 많은 것들은 반복적 형태를 지닌다. 잠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아침을 먹고 회사로 향하고 주말이면 같은 친구를 만나고 데이트를 한다. 남자가 바뀌어도 데이트를 한다는 사실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반복은 익숙함을 낳는다. 익숙함은 편안함과 이어진다. 익숙함에 굴복하여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외국에 나가서 살지 못하는 그의 나약함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요? 말을 끊어서 죄송해요. 하시던 말씀 계속 하세요.”


그의 모습에 동정심이 들자 지겨운 이야기를 30분은 더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외국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을 이런 형태로 풀고 있을지 모르니까. 나 자신의 마음속에서 인간애가 조금은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면서 난 귀민을 떠올리고 있었다. 지금 기분이라면 그녀와도 화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그녀의 적개심에 대해 물은 적이 없었다. 적개심에 완벽한 이유가 있다면 내가 먼저 사과를 해도 좋을 듯싶었다.


며칠 후. 직원들에게 내가 먼저 회식을 하자고 요청했다. 그들은 의외라는 표정이었고 그런 시선을 받는 것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부에서 조금씩 변화의 욕구가 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변하고 싶다. 지금과는 다르고 싶다.


“회식은 어디로 가나요?”


나보다 한 살 많은 여직원이 물었다.


“좋으실 대로 하세요. 근처 고깃집에 가죠. 그 다음은 나이트 어때요? 제가 쏠게요.”

“홍주씨, 진짜야? 웬일이야, 나이트면 질색하던 사람이. 좋아! 모두 정리하라고. 나가지.”


과장님도 내 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시는 듯 했다. 명주언니도 놀란 기색으로 내게 다가왔다.


“사람 갑자기 변하니까 좀 무섭다. 나이트라니? 가도 춤도 안 추는 네가.”

“춤 출 거야. 재미있을 거 같은데?”

“재미있다, 재미있어. 난 네가 가자고 했다는 걸로 충분해. 오늘 충격은 그만 주라고.”

“내가 이러는 게 그렇게 이상해?”

“이상하다마다. 사람들 표정도 못 봤니? 변화도 좋지만 난 네가 걱정이다. 설마 인생 뭐 있냐, 노는 게 남는 거지, 로 마음먹은 거야?”

“그게 뭐 어때서?”

“미친다, 진짜. 딱딱한 정홍주 얼마나 가는지 보자구.”


고깃집에서부터 사람들에게 잔을 많이 받아서 나이트에 갈 때쯤엔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다. 취해선지 귀를 찢을 것 같이 시끄럽던 음악도 흥겹게만 들렸다. 나이트에 들어서자마자 난 명주언니한테 스테이지로 나자가고 했다. 흔들어지지 않는 몸을 되는대로 움직였다. 언니는 우습다며 웃어댔다.


“어쩜 그렇게 뻣뻣하냐? 팔다리 말고 허리도 좀 움직여봐.”

“이렇게?”


언니를 따라 춤을 췄다. 조금씩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흥겨웠다.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기고 흔들어댔다. 비틀거리는 것도 같았고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상관없었다. 그저 난 어제와는 다른 날 원할 뿐이니까. 그 때 내 손목을 강하게 잡아 끈 것은 찬영씨였다.


“왜 이래?”

“이리 좀 와봐.”


그는 완력으로 스테이지에서 날 끌어냈다.


“너 왜 이래? 나 때문에 이러는 거야? 사람들 앞에서 술 취한 모습 보인 적 없었잖아. 오늘은 대체 뭐야? 사람들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마시고.”

“변하고 싶어.”

“변해도 꼭 이렇게 변해야 하니?”

“당신 때문이잖아!”

“·····.”

“당신이 나한테 오지 못한 이유들에 대해 생각했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몰라. 지금은 당신 때문이 아니야. 그저 변하고 싶을 뿐이야. 남들처럼 살고 싶어. 딱딱하게 살기 싫어졌어.”

“이러지 마. 난 지금 그대로의 네가 좋아.”

“착각하지 마! 이젠 내가 당신이 싫어! 변하고 보니 욕심이 생겼어. 우리 아빠 회사나 다니는 사람 싫어. 더 멋진 사람 만날 거야.”


‘한 번 날 버렸던 당신한테는 가지 않을 거야! 마음을 나눠주는 당신한테 갈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믿을 수가 없어! 나를 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만날 수가 있겠어. 싫어, 당신이.’


“우리 사이엔 오해가 많아. 다 내 책임이야. 얘기 할게. 다 얘기 할 게. 나가서 얘기 좀 하자.”

“싫어, 이거 놔!”


날 잡는 그를 뿌리치고 있을 때 명주언니가 다가왔다.


“홍주야!”

“응. 언니. 들어갈 거야. 얘기 다 끝났어.”


그를 버려두고 언니와 함께 스테이지로 돌아가 미친 듯이 춤을 췄다. 조금은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으며 조금은 외로웠다. 아니,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언니, 나 화장실 좀.”

“그래. 이따 룸으로 와.”

“응. 알았어.”


화장실에 갔을 때 귀민과 마주쳤다. 그녀는 날 비웃는 듯 보였다.


“춤을 잘 추더라고요.”

“예. 고마워요.”

“이런다고 직원들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미안하지만 귀민씨랑 싸울 생각 없거든요. 싸우고 싶어도 좀 참아요.”

“싸우는 것도 좋지만 할 얘기가 있어요. 찬영씨한테 꼬리 좀 그만 칠래요?”

“누가 꼬리를 쳐요? 관심 없어요, 그 사람한테.”

“그럼 만나는 데 다시 방해는 안하겠죠?”

“방해를 하다뇨?”

“우리 잘 만나고 있었어요. 당신이 중간에 방해를 한 거지. 몸으로 덤비는데 안 넘어갈 남자 흔치 않죠. 그도 그랬을 테고. 이젠 몸으로 덤비는 거 그만둘 건가요? 요즘은 다른 남자한테 덤비는 것 같던데 잘 되가요?”

“진짜 귀민씨랑은 얘기 못 하겠다. 당신이 봤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하죠?”

“창고에서 있던 일 알고 있어요. 아는 사람은 다 알죠.”


‘소문이 돌고 있었단 말이야?’


“그 전까지 그 사람이랑 문제없었어요. 창고에 갇혔던 그 다음날부터 대리님한테 정신 나간 것처럼 굴었지만. 미리 얘기 하지만 이번엔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지저분한 플레이 다시 하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요.”

“방해할 생각 손톱만큼도 없어요. 잘 해보세요.”


난 화장실을 나오다가 뒤를 돌며 말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 사람한테 애인 있는 거? 애인 있는 남자한테 귀민씨처럼 목매는 거 좀 보기 그렇네요. 같은 여자로서 충고하는 데 다른 사람 찾아보는 게 어때요?”

“많이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죽은 애인이었다는 건 몰랐나보죠? 그 사람이 그것도 말 안 해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나봐요.”

“죽어요? 누가? 찬영씨 애인이 죽은 사람이었단 말이에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난 대꾸도 하지 않고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황급히 찬영씨를 찾았지만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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