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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칙사랑 - 22. 그녀의 웃음

나비 |2005.01.04 05:42
조회 2,999 |추천 0

 

 

 

 


** 반칙사랑 - 22. 그녀의 웃음


“으, 으. 홍주야, 미안해. 휴지 없니?”


‘지금 내가 네 휴지를 챙겨줄 때가 아니라고. 네가 친구 맞니, 진짜?’

뒤를 돌아볼까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홍주야!”


설마 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오빠의 음성이었다. 여름이 오는 길목. 등 뒤가 갑자기 시원해지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어, 오빠?”


그를 향해 몸을 돌렸지만 곧 다시 동욱이쪽을 바라보아야 했다. 동욱이의 손이 내 허리춤에 올라와 내 바지를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욱-.”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소리와 함께 마주 선 우리는 한참 어색하게 서 있었다. 드디어 동욱이가 정신을 좀 차렸는지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 동욱이. 초등학교 친구야. 얼마 전에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고 해서 술 마셨는데 데려다 준다고 하잖아. 그러다 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속이 안 좋았나봐.”

“너 아까 집이라고 했잖아.”

“여기가 집이지 뭐야? 바로 집 앞이잖아.”


우길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런 상황을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바람만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홍주 동창이에요.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싸우시게 됐네요. 홍주 아무 잘 못 없어요.”

“집이 어디세요?”

“가깝습니다. 조그만 걸어가면 되요.”

“타세요.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휴우. 생각보다는 쉽게 상황이 정리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던 참이었다.


“홍주도 타.”

“나도? 바로 집 앞인데 그냥 집에 들어갈게.”

“너도 타라고! 같이 데려다 주고 우리 대화 좀 하자.”


오빠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먼저 차를 타버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잘못은 내가 한 거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동욱이도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차에 올랐다.


‘성동욱! 완전 도망가고 싶다는 표정이잖아. 나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지금 도망가면 넌 진짜 친구도 아니다!’


“친구분 집이 어느 쪽이죠? 일단 직진하면 됩니까?”


오빠의 그 말을 시작으로 길을 묻고 답하는 말 외에는 대화가 없었다. 차라리 동욱이 집이 멀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10분도 안 되서 동욱이 집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동욱이가 인사를 하고 내린 후에도 오빠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당연히 우리 집 쪽으로 가겠지 했던 차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오빠, 어디 가?”

“우리 집.”

“오빠 집에 왜?”

“내가 널 서울에 두고 일할 수 있겠니? 잠시 틈을 준 사이에 남자랑 술 먹고 거짓말하고! 마음 같아서는 다시 보지 말까, 하면서도 그건 내가 힘들 것 같아서 이제는 안 떨어지려고 한다! 출장 같이 가. 원래는 내일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우리집에서 옷만 챙겨서 바로 출발하자.”

“오빠!”

“······.”

“오빠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도 내일 출근해야 한다고. 이 새벽에 출장을 같이 가자니!”

“그럼 네 행동은 말이 되는 거야? 그 까짓 일이 뭐라고! 일에 지장 있는 건 안 되고, 내 마음에 지장을 주는 건 괜찮다는 거야!”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토록 화를 내다니. 지금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집에서 옷을 챙길 때 부드럽게 얘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친구를 잘 못 둔 덕에 출근 전 잠을 반납해야 할 상황이었다. 오빠의 집에 들어서자 적막감이 돌았지만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느낌이 들었다. 급하게 짐을 챙기고 나갔는지 옷들과 여러 물품들이 널려 있었다.


“일단 좀 씻고 올게. 기다려.”


가방에서 새 면도크림을 꺼내든 그가 발을 나가버리자 그를 향했던 팽팽한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들었다. 침대에 기대 다리를 뻗었다. 오빠가 씻고 온 후에 천천히 얘길 해보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설명을 자세히 하면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할 거야. 방바닥은 먼지조차 없을 정도로 깨끗하진 않았지만 기분이 좋을 정도로 미끄러웠다. 다리를 폈다 구부렸다 종아리로 미끄러움을 느끼다가 자연스레 책장에 시선이 갔다. 무슨 책을 읽는지 볼까? 책장엔 옛 소설들과 술에 관한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눈에 띤 책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란 책이었다.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책을 발견하고 꺼내든 시간은 단 5초. 아무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발견된 한 장의 사진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무형이지만 거대하고 두꺼운 벽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긴 생머리의 여자가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가을쯤에 찍은 것으로 보였다. 나와 그가 함께 갔던 공원의 어느 가을 날 그녀는 그곳에서 웃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감이 베어 나오는 그 두 눈을 한참 응시하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마치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그를 반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부릅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먼저 눈을 감을 수 없음을 알아버렸다.


‘내 눈만 아플 뿐이야. 그녀를 질투해도 내 마음만 아플 뿐이라고.’


굴복해버린 후에도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사진이었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든 건 순간이었다. 당신, 그를 보고 싶어도 이제 볼 수 없는 거죠?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여자였다.

욕실에서 흘러나오던 물소리가 멈추자 황급히 사진을 내 가방에 넣었다. 그가 사진을 못 보게 할 속셈은 아니었다. 너무나 순간적인 행동이었고, 그가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그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오빠 피곤한데 운전 할 수 있겠어?”

“어떻게든 갈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럼 당장 출발하자. 빨리 옷 입어. 난 나가서 집에 전화할게.”


사진 한 장으로 그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든 나는 밖으로 나와 집에 전화를 걸어서 화를 내시는 어머니에게 집에 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순히 차에 오르는 내 모습에 그는 오히려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미안, 조금 잘 게. 술을 마셔서 피곤하네. 한 시간 있다가 깨워.”


일부러 가져온 그의 외투를 길게 덮고는 의자에 몸을 눕혔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눈을 감아도 그 여자의 웃음이 머릿속을 맴 돌았다. 바로 내 옆에서 숨소리를 내며 운전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을 그녀의 웃음이 신경을 자극해 소리를 치고 싶을 정도로 답답해져 왔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창문을 열고 머리까지 외투를 덮는 일뿐이었다. 6월의 바람은 차갑지 않았지만 거세게 들어와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추운 거야? 창문을 닫아.”

“그런 거 아니야. 답답해서 그래.”

“어이가 없다. 왜 네가 짜증을 내는 건데?”


퉁명스러운 내 말투가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모양이었다.


“짜증내는 거 아니야. 그냥 답답해서 그런대두.”


내속에 그녀의 웃음이, 그와 함께 했던 그녀의 죽어버린 추억이 울렁거림을 만들고 있음을 모르는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앞만을 응시했다. 꽉 끼는 옷을 덧입은 듯 더욱 답답해져 오는 가슴.


‘그녀라면 어땠을까? 사진 속 같은 웃음을 지으면서 화를 풀어주었을까? 아니, 나처럼 바보 같은 일을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행여 지금 이 순간 나와 그녀를 견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날 괴롭혔다. 생각해보면 그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이는? 그리고 뭘 하는 사람이었을까? 머릿속이 순식간에 그녀에 대한 추측으로 가득 차 버렸다.


“오빠, 그 여자, 오빠가 나 만나기 전에 만났다는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었어?”

“지금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물어보면 안 되는 말이었나?”

“아니, 내 말은 지금인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야! 지금은 네가 불리하니까 그런 말 꺼내는 것으로밖에 안 보여. 이런 기분으로 말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야.”


마치 더러운 손을 비단 보자기를 향해 뻗었다가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찰싹. 귀한 것에 감히 손을 댔다가 혼쭐이 난 무안한 기분. 괜스레 손등을 매만지면서 차안을 감도는 차가운 기운을 애써 덥혔다. 그의 옆모습, 나를 향하지 않은 앞만을 보고 있는 그의 시선에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기어에 얹어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은 차가웠다. 그의 눈빛처럼.


“미안해, 오빠. 아까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가 당장이라도 떠나버릴 것 같아 절박한 마음으로 사과를 하는 나.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붙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바로 그의 옆에 있어도 외로운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그와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간절함에 휩싸인 채 그의 냉담한 시선을 피해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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