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차는 윤섭씨 건가봐요?”
채련이 운전 중인 윤섭씨에게 물었다.
“예.”
흰색 렉스턴은 윤섭씨에게 곧 잘 어울리는 차였다.
“덥다. 옷 좀 벗어야겠어.”
채련이 빛나는 청색 점퍼를 벗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는 연한 보라색 브이넥 반팔 니트를 입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섹시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실내에서 사진 좀 찍으려구 입고 왔지.”
그녀는 살포시 웃었다. 하지만 내 안면 근육은 혼자 겨울인지 얼어붙어서는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채련의 가슴이 예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외할머니인가 더 먼 친척이 인도인이라는 소문이 맞는 듯 했다. 심하지 않게 살짝 파인 옷이었을 뿐이었는데도 그녀의 양 가슴 사이의 골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한국인 체형이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나라면 지금 채련 정도의 섹시함을 내기 위해서는 특수 속옷이 필요했고, 어깨가 보인다던지 아니면 등이 훤히 보인다던지 하는 특수 의상도 필요했다. 누구는 싸구려 티 쪼가리를 걸쳐도 섹시하다니 이건 불공평한 일이었다. 첫인상을 지어줄 옷차림에서 나는 완전히 K.O 패를 당한 셈이었다.
채련이 갑자기 내 손을 꼭 쥐었다. 마치 자신을 주시하라는 듯한 신호였다.
“덥지 않아요?”
채련은 시선은 백미러를 향해 있었다. 윤섭씨는 불편함을 살펴주려는 듯 백미러를 보았고, 채련과 눈이 마주쳤다. 채련은 윤섭씨에게 살짝 윙크를 해 보였다. 윤섭씨는 쑥스러운 듯 곧 시선을 피했지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었다. 이게,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내 속을 모르는 왕여시는 붉은 입술로 내게 속삭였다.
“봤니? 벌써 끝났지?”
“뭐라고 안 들려. 크게 말해봐!”
홧김에 말했지만 그것은 복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쩌지. 저 왕여시를 어쩌냐 말이야.
“나 멀미 하나봐. 속이 울렁거려.”
“괜찮아요? 문희씨?”
용준씨가 몸을 돌려 안부를 물었다.
“심하진 않은데 창문을 좀 열어야겠어요. 너 괜찮겠어? 창문 열면 추울 테니 옷 입어야 겠다.”
“괜찮아. 활짝 열 것도 아닌데. 안 그래도 더운 참이었는데 잘 됐다.”
여기서 물러 설 수 없다는 비장한 얼굴이었다.
“창문 열어 줄게요.”
윤섭씨는 네 개의 창문을 조금씩 열어주었다. 차안의 더운 공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추운 것은 싫었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채련이는 여전히 도도한 자세를 유지했지만 팔에 잔뜩 돋은 닭살만은 통제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닭살이 우스워 나는 몰래 웃음을 지었다.
“차가 많이 막히네요.”
채련의 목소리는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주말에 이정도면 양호한 편인데요.”
용준씨가 대답했다.
“그래도 오늘 중에 돌아오려면 시간이 빠듯하겠어요.”
“오늘이요? 일박 일정인 것 모르셨어요?”
역시 용준씨.
“예?”
채련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문희야, 나한테 일박이라고 말 안했잖아. 나 외박 못하는 거 몰랐어?”
난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좋아. 입고 잘 편한 옷도 없단 말이야.”
“잘 때 입을 옷이라면 제 티를 드릴게요. 크긴 해도 입고 자기엔 괜찮을 거예요.”
윤섭씨의 친절에도 기가 막혔다. 채련이가 윤섭씨의 옷을 입고 자다니. 안 될 말이었다.
“내 옷 입으면 되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 옷 여벌 있으니 내 옷 입으면 될 거야.”
“옷 문제가 아니라 난 일박인지 몰랐단 말이야. 알았으면 안 왔지.”
그녀의 뜬금없는 내숭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내가 틀림없이 전달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겨봤자 나만 손해인 상황이었다.
“문희야! 니가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줘라. 나 너희 집에서 잔다고. 원래 외박은 안 되지만 그래야 엄마가 안심을 하실 것 같아.”
“그래. 전화는 해줄게. 근데 너 혼자 살잖아. 엄마가 매일 검사하러 오시니?”
채련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바뀌었다. 손발도 못 맞추냐는 듯한. 미안하다. 친구야. 하지만 네 꼴은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사실 친구를 남자들 앞에서 대놓고 뭉갤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남녀 두 명씩 좋은 여행이 되길 빌었고, 채련이 여행에 동참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그녀가 가져가는 것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눈치를 못 챌 채련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태를 조금 더 지켜보겠다는 듯 이후에는 별 말이 없었고, 그 침묵이 내겐 너무 부담스러웠다.
“휴게실에 들렸다 가죠. 음료수랑 먹을 것 좀 사가지고 가요.”
열을 식히고 싶었다. 속이 긴장감으로 타고 있었다. 꿈꿔왔던 남자의 뒤통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겐 꽤 긴장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요. 저 커피 마시고 싶어요.”
흔쾌히 동의하는 채련이 어딘가 수상쩍었다. 잠시 후 휴게실에 도착하기 전까지 용준씨는 일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왔는지 내내 핸드폰에 매달려 있었다.
“용준씨는 무슨 일 하니?”
“모바일 게임 회사 다닌다고 하던데. 친구 회사래.”
“그래?”
성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 대기업에 다닌 이후로 채련의 눈은 더 높아져 있었다.
휴게실에 가까이 갈수록 내 기분은 나아지고 있었다. 2라운드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채련에게 자신 있는 것은 조금 큰 키였다. 나란히 서면 채련에 비해서는 늘씬한 느낌을 주는 몸매였던 것이다. 그리고 추운 날씨이니만큼 외투를 입지 않을 수 없으니 볼륨감 있는 채련의 몸을 가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휴게실에 먼저 가 계세요. 통화 마치고 따라갈게요.”
용준씨는 여전히 핸드폰을 놓을 줄 몰랐다.
“예.”
채련과 나는 화장실부터 가기로 했다.
“아까 봤니? 윤섭씨 계속 내 몸 쳐다보느라고 운전도 제대로 못하더라. 안보는 척 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있지. 너무 귀엽던데.”
“그랬어? 난 못 봤는데.”
“멀미는 좀 괜찮아?”
“응.”
“넌 촌스럽게 멀미가 뭐니?”
너 때문에 멀미가 나더라, 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 윤섭씨 마음에 들었어. 니가 나한테 도움 되는 일도 있구나.”
손을 씻은 채련은 몸을 돌려 손에 묻은 물을 털었다. 그 물이 내 얼굴에 닿았다. 마치 고의로 한 행동 같았다.
“어머, 미안.”
“괜찮아.”
“괜찮긴 여기 묻었는데.”
그녀는 물기 있는 손으로 내 턱 밑을 마치 강아지 쓰다듬듯 만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괜찮대두!”
“미안하다는데 왜 화를 내니?”
그 말은 앞으로 자신을 방해하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 같았다. 우린 서로에게 1차 경고를 한 셈이었다.
채련과 나는 원두커피를 사러 갔다.
“네 잔이요.”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고 채련은 계산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이런 건 사야 하는 거 아니니? 매너는 좀 후지다.”
“내가 낼게.”
“그렇게 해. 니가 오자고 한 여행이었으니까.”
늘 얻어먹는데 익숙한 그녀와 빈대의 차이점이 구분되지 않았다. 커피는 얻어 마셔야 맛있나 부지. 그렇게 가방 속에서 지갑을 찾았는데 지갑이 없었다.
“어, 이상하다. 지갑이 없어.”
“아까 차에 두고 온 것 없나 봤을 때 아무것도 없던데.”
“그럴 리가. 차에 있겠지. 미안한데 니가 계산 좀 해라.”
“얻어먹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우리는 계산한 커피를 들고 차로 왔다. 남자들은 표정이 심각한 채로 멀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없어! 없다구!”
“진짜 없어?”
“책상 위에 있는 걸 봤는데 그냥 두고 나왔나봐.”
“뭐 어떠니? 남자들이 돈 내겠지.”
“그래도 너무 불편하잖아. 어쩌지?”
참 난처한 일이었다. 윤섭씨 혼자 있는 기회를 봐서 커피라도 한잔 들고 나타날 수도 없다는 뜻이었고, 졸지에 얻어먹다 가는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람들이 날 뭘로 보겠어? 빈대? 왕빈대 불여시?
“문희야! 집에 두고 온 것은 맞아?”
“그런 것 같아. 책상 위에 두고.”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너 대신 돈 낼게.”
“고마워. 서울 가서 꼭 갚을게.”
“아니. 갚을 필요 없어. 대신 윤섭씨랑 잘 되게 도와줘. 알았지?”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알았다고 하고 용준씨에게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내 심각했던 남자들이 차에 올랐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저, 문희씨.”
용준씨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예?”
“저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아요.”
“회사에요?”
“놀라지는 마시구요. 일단 저 빼고 세분이서 먼저 출발하세요. 저는 밤에 제 차를 가지고 따라갈게요.”
“아니에요. 바쁘시면 같이 서울로 돌아가요.”
“그 정도 일은 아니에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구요.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가 계세요. 꼭 올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괜찮다고 한 것은 채련이었다. 용준씨는 곧 미리 불러둔 콜택시타고 서울로 올라가버렸고, 차안에는 한 남자와 한 남자를 두고 싸우는 두 여자만 남게 되었다.
‘차라리 잘 됐어. 용준씨 눈치 보는 일도 힘들었는데. 돌아오기 전에 끝을 내 버리는 거야.’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절대지지 않겠다고 다시 다짐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