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한국의 가을 하늘이 푸르게 펼쳐져있었다.
구름이 딱 한점 외로이 떠가는 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시려웠다.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은 하늘탓이었다.
빌어먹을 날씨는 우라지게 좋아가지고는...
걷고 싶지 않은 길을 난 정말 천천히 걸었다.
구두의 끝으로 보도블럭의 선을 하나씩 맞춰가면서 나는 시간을 먼저 보냈다.
하지만, 오고 싶지 않아도 갈 수 밖에 없었던 곳에 내 발은 날 이끌고 왔다.
카페 베아트리체...
[ 늦었네.]
이미 주스를 반이상 비워버린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있었다.
약속시간에서 40분이나 늦었다는 것을 난 이미 알고있었다.
[ 어, 차가 좀 많이 밀려서... 전철 탈 것을 괜히 버스를 탔나봐.]
걸어오는 길은 가을이었지만, 그녀는 벌써 겨울이었다.
싸늘한 기운이 그녀 주변에서 감돌고 있었다.
[ 그냥 커피주세요. ]
난 종업원이 들고온 메뉴판을 펴보지도 않고 말했다.
한가롭게 메뉴판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알싸한 침묵이 그녀와 내 사이에서 흘렀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밖의 길거리에서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않고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젊은 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때의 치기(稚氣)...
난 애꿎게 커피가 나올때까지 물만 마셔댔다.
기다리고 있었다...
[ 우리... ]
종업원이 내게 커피를 가져다주자 그녀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말해보라는 듯이 난 태연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설탕을 넣고 커피를 젓는 스푼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오빠, 나 결혼해. ]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지도... 안타깝게 날 바라보지도 않았다.
[ 어... 그래... ]
난 계속 태연함을 가장했다.
또 다시 어색함 침묵이 흘렀다.
난 커피를 한모금 입으로 가져갔다.
사약처럼 쓰다. 쓰디 쓴 커피다...
[ 언제 하니? ]
[ 다음달. ]
간단한 질문과 명료한 대답이었다.
4년간의 세월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내 귀에 비명처럼 들려왔다.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 그녀가 말해주기 전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오고 싶지가 않았다.
[ 누구랑 하냐고... 안 물어봐...? ]
[ 아아... ]
표성륜... 그 땅딸막고 배나온 대머리 아저씨...
직업이 회계사라고 했었지...
그녀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이미 오래전부터 기만하고 있었다.
몇달 전... 그녀가 선을 봤다는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 행복해라... ]
결국 난 자리에서 먼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좀 전에 주문한 커피가 아직 뜨거운 김을 선명하게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었다.
[ 어... 오빠도... ]
일상적인 인사처럼 그녀도 내게 그렇게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난 그녀와의 차값을 지불하고 카페를 나와버렸다.
5분...
정확히 이 카페문을 열고 닫는데 5분이라는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4년간의 우리의 이야기를 지워버리는데 5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난 서둘러 술집을 찾았다.
맨 정신으로 오늘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 그래... 잘 살아라... 나쁜년... ]
혼자 꼼장어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귀신들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계속되는 사법고시 인원축소...
유망한 대학의 법학과를 졸업해서 판사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시작한
사법고시는 정부의 여러가지 정책에 밀려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 요새 6급 공무원도 괜찮다던데... ]
작년에 그녀가 나에게 살짝 흘리던 그 말에 날 무시하는 발언이라고 그렇게
광분한 사람처럼 화를 냈었던 것인지...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녀는 어떻게든 빨리 나와 안정적인 삶을 꾸리고 싶었을 뿐인데...
그깟.... 쪼잔한 자존심 때문에...
[ 계속적인 불황에 백화점도 예외는 아닙니다. 서울 롯데 백화점 관계자에 따르면
작년 9월의 매출과 비교했을 때, 올해... ]
듣고 싶지 않은 뉴스...
IMF 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울부짖으면서 한탄할 때,
기업 운영자들의 책임이라고 술안주거리 삼아서 이런 저런 소리도 많이 했었다.
벌써 몇년째... 나라가 불황이란 단어를 계속 얘기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 아주마, 여기 소주 한병 더주세요.]
술병이 비었다...
[ 예~ ]
그러고보니 술집도 썰렁하다...
젠장...
네온사인들은 아직도 휘향찬란하기만하다...
술에 취한 내 비틀거리는 걸음을 따라서 가로등의 불빛들도 휘청거렸다.
경제가 어렵다면서 한강다리들은 조명등으로 더욱 번쩍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위한 세상인가...
대학이란 곳에 가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어른들이... 선생님들이 그래왔으니까... 대학만 가면... 대학만 가면...
대학에 오니, 사법고시라는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사법고시만 붙으면 집열쇠, 차열쇠 가진 여자들이 줄을 서고... ]
훗... 그 말도 안되는 허풍을 진짜로 믿었다.
내가 서있는 한강다리 아래로 시꺼면 강물이 내려다보였다.
어째서 저 시꺼면 강물이 저토록 평온해보이는 걸까...
도로위의 차들은 뭐가 그리 바쁜지 쌩쌩거리며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는데...
저 강물은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고요하다.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물은 매혹적이다.
"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컴퓨터의 에러메시지가 불현듯 머리에 떠오른다.
내 인생의 에러...
그래... 이건 에러야.... 치명적인 오류...
" 다시 시작하시겠습니까? "
시꺼먼 강물위로 컴퓨터 화면이 겹쳐져서 보였다.
재부팅... 재부팅을 하고 싶어.
" 예... "
더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
풀쩍... 난 그렇게 다리 난간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 이제 모니터의 전원을 끄셔도 좋습니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