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서 간단한 몇 가지만 챙겨 나와라.”
갑작스러운 동준의 말에 진서의 눈이 대답대신 의문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말이에요?”
“내일 짐 다 옮길 거다. 일단 너 필요한 몇 가지만 가지고 나와.”
“갑자기....왜...?”
큰 눈에 다른 걱정이 모이고 있는 진서를 알아 동준이 빙긋이 웃었다.
“니가 나한테 덤비기 전까진 너한테 절대 무슨 짓 안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뚱맞은 표정 하지마라. 그냥 여기보다 집이 낳을 것 같아서....”
택시 속에서 두 사람모두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동준이 내심 그날 자신의 집에서 지윤과 마주섰던 그 일이 걸려 농담을 해놓고도 편치 않았다. 그런 동준을 느낀 진서 또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을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을 붙잡고 있던 동준이 옆에 놓인 진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동준이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탈 때 까지 진서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무 곳에도 시선을 두지 못하고 있던 진서가 엘리베이터 천정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 동준이 슬쩍 장난을 걸었다.
“사람 덮쳐서 입까지 맞추던 용기는 다 어디가고 윤진서 너무 부끄러워하는 거 아냐.”
천정에 두든 시신을 내려 거울에 비친 동준의 시선과 맞춘 진서의 입 꼬리가 엷게 올라갔다.
“언제라도 그럴 수 있으니.....몸조심해요.”
“나한테 그럴 수 있는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편한 웃음이 입가에 걸린 두 사람이 내려섰다. 그러나 길지 않은 그 평화가 오피스텔 앞에 서 있는 지윤을 발견해 흙먼지처럼 흩어졌다. 두 사람이 동시에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진서가 본능적으로 동준이 붙잡고 있던 손을 빼내려 하자 동준이 잡은 손에 더욱 주어 놓지 않았다.
초조한 기다림 뒤에 두 사람을 발견한 지윤의 눈빛이 퍼런 기세를 세우며 금방이라도 독을 뿜어낼 듯 했다. 지윤의 시선이 동준의 얼굴에서 천천히 진서에게로 옮겨졌다 다시 또 동준이 힘주어 붙잡고 있는 그 손에 멈추었다.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지금...이거 뭐야?”
불편함이 심장까지 번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진서를 더 보기 힘들었던 동준이 진서를 오피스텔로 먼저 들여보내려 했다. 잡고 있던 손을 풀어 그 손에 열쇠를 쥐어 주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진서가 말없이 몇 발짝을 움직여 지윤의 곁을 지나 문 앞으로 다가섰다. 지윤이 온몸이 떨려오는 분노를 더 참지 못하고 동준의 뺨을 후려갈겼다. 열쇠를 꽂으려든 진서가 놀라 몸을 돌리며 격앙된 목소리를 들어냈다.
“무슨 짓이에요.”
지윤이 몸을 휙 돌려 핏발이 선 눈으로 진서를 노려보았다.
“입 닥쳐. 니깐 계집애들 지금까지 몇 박스는 돼. 하룻밤 놀리감에 지나지 않는 그걸 뭐 대단한.....”
동준이 지윤의 말을 중간에 걷어내며 이글거리는 감정을 인내로 버티고 있었다.
“그만해요. 진서 너 먼저 들어가라.”
“싫어요. 같이 들어가요.”
“말 들어. 먼저 들어가 있어.”
이미 그 마음이 한 가지를 택해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잠시 지윤에게 가졌던 두려운 그것을 밀어내고 당당하게 의지를 담은 시선으로 동준을 보고 있었다. 그 깊이가 너무도 선명하게 동준에게 전해져 흔들리든 그 마음마저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이제부턴....하기 싫은 거, 불편한 거 하지 말아요. 가고 싶지 않은 자리잖아요. 그럼....가지 말아요.”
지윤이 당돌하기 그지없는 진서의 말에 그 화기가 치솟아 이성이 마비되고 있었다. 몸을 돌려 진서에게로 몇 발짝 다가서 순싯간에 그 손이 지윤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은 채 날아드는 진윤의 팔목을 잡은 진서가 지윤이 휘청거릴 만큼 격하게 그 팔목을 밀어냈다.
“저 사람한테 함부로 손찌검 하지 말아요. 저 사람 당신 거 아니에요. 당신이 이렇게 함부로 할 만큼 쉬운 사람 아니에요.”
“...니가......니깟게 뭘 안다고 함부로 지꺼려. 니가 저놈에 대해서 뭘 알아..."
진서의 내려깔린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려 지윤의 심장을 서늘하게 했다. 두려움 없이 자신에게 맞서는 그 눈 속에 지윤이 예상치 못했던 뜨거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당신이 뭘 아는진 모르겠지만.....당신이 하고 있는 모든 게 저 사람한테는 불편한 짐이되고 있다는 거 당신은 왜 모르나요.”
“...뭐......너.....”
동준이 문 앞으로 다가와 진서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들어가라...제발.....진서야!”
동준이 차갑게 지윤을 돌아보며 시린 말을 뱉어냈다. 그 눈에 원망과 화기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내려가요. 내려가서 얘기해요.”
자신이 그렇게 지윤과 나가는 것이 진서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시간이 될지 알고 있었다. 이제 겨우 그 마음을 열어 보이며 손을 내밀고 있는 가슴이 또 다시 물러서며 움추릴까 두려워 지윤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염증을 가져오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온 동준이 참았던 열기를 토해내며 지윤을 노려보았다.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결국 저 계집에도 이렇게 됐니?”
“할말만 해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아서 예전 애들하고는 다른 맛이 있니. 그래서 집에까지 데려왔니?”
“말.......함부로 하지 말아요.”
진서를 두고 가지는 동준의 침착함이 지윤을 더 시궁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느끼고 있어 불안했던 것이리라! 그 도도하고 당당한 눈빛속에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어 지윤이 처음 보았던 그날부터 계속 마음에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그 원흉이 결국 그렇게 눈앞에 들어나고 있었다.
“올라가서 돌려보내.”
동준이 한순간 꿈틀거리던 감정을 재우고 차가운 이성을 불러내 지윤의 눈 속을 깊숙이 응시하며 그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잘 들어요. 이제.....나 찾지 말아요. 다시는 당신 안는 일도 무릎 꿇는 일도 하지 않을 거니까 더 이상 다른 걸로 나 옳아 맬 생각 하지 말아요.”
지윤의 심장에 붉은 피가 고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없는 여자들을 보아오면서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두려움이었다. 분명 그 눈속에 숨길 수 없는 진심이 보이고 있었고 동준이 그곳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 내 손에 죽는다.”
“죽여도.....당신은......나 못 가져.”
“.........”
“돌아가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동준이 부들부들 떨며 감정을 삭히고 있는 지윤을 그대로 두고 급하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윤과 있는 잠시 동안 조차도 진서의 그 불편할 마음이 걱정돼 가슴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는 발걸음이 조급하게 옮겨져 문을 열고 들어서는 호흡이 떨리고 있었다.
오피스텔에 들어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진서가 동준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그 얼굴에 안도의 빛을 찾았다. 길지 않은 그 시간 속에 수만가지 생각들이 뒤엉켜 동준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몸이 경직되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서 있는 동준의 그 마음이 안쓰러웠다.
“미안하다....진서야!....미안하다.”
동준이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진서에게서 눈을 때지 않고 있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로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진서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아있는 동준에게로 다가와 그 머리를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않았다. 그 손끝이 동준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끌어않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뇨. 미안해하지 말아요. 이미 당신이 힘들었는데......그것만으로도 아픈데....나한테 미안해하기까지하면.....당신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러니까.......나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이제부터는 하지 말아요. 당신 싫은거 힘든거....불편한거.....하지 말아요. 정말 나한테 미안한건 그거에요.”
세상을 향해 이를 갈아데며 품었던 퇴색된 화석처럼 겹겹히 쌓여있던 서러움들이 스르르 동준의 가슴에서 녹아내리고 있었다. 감은 눈 아래로 뜨거운 서러움들이 주채 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너무도 따뜻하고 가슴 벅찬 그 환희가 동준의 얼어있던 심장을 녹여 그 한기들을 빼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어린아이처럼 서러웠던 아픔들을 그렇게 모두 흘려내고 있었다.
“이제부턴 누구도 당신 아프게 못해요. 내가......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너......왜 나한텐 화를 안내니. 내가 보인 것 전부가 너한텐 불덩어리였을텐데.....어째서.....웃기만 하고.....화낼 줄 모르니?”
진서가 허리를 굽혀 동준과 같은 높이로 눈을 맞추었다. 밤의 고요와 영혼의 안식이 그 속에 들이차 있었다.
- 당신 많이 힘들었던 삶....
그것만으로도 내 심장이 떨리게 아파요.
동준이 허리를 굽혀 자신의 눈을 응시하고 있는 진서를 무릎에 앉혔다. 작은 몸 어디에서 그토록 뜨겁고 강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존재 하나가 온 공간을 채우고 동준의 심장을 채워가고 있었다.
- 깊은 떨림
진서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그렇게 멈춰있던 동준이 조심스럽게 몸을 때어 냈다. 사람으로 인해 그토록 평온하고 가슴 떨릴 수 있다는 것에 여전히 심장이 제 호흡을 찾지 못하고 있던 동준이 두 손으로 진서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살짝 가져다댄 입술이 잠시 멈추었다 다시 깊고 진하게 서로의 호흡을 나누었다. 진서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동준의 손끝이 천천히 그 허리로 옮겨와 작은 몸을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당겨 앉혔다. 푸르르 떨리는 몸짓이 동준의 심장까지 전해와 소리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진서의 입술을 가졌던 동준의 입술이 뜨거운 숨소리를 가슴으로 삼키며 조심스럽게 턱을 타고 내려왔다. 그 코끝으로 진서의 귓불을 스쳐 길고 하얀 목 줄기에 멈추었다. 목뒤를 어루만지든 손을 깁게 패인 진서의 쇄골 뼈로 가져와 손가락으로 선을 따라 그으며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짧은 머리 때문인지 선이 부드러운 목이 더 길어 보여 동준이 클럽에 있을 때도 유난히 들어나 보이는 진서의 쇄골 뼈를 유심히 보았었다. 온종일 팔이 없는 트레이닝 민 소매 셔츠차림으로 사무실과 클럽을 오가는 진서를 보고 있으면서 동준이 문득문득 그 쇄골 뼈를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미 여인으로 가슴 떨리든 심장을 잊은 지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던 그에게 이상하리만치 깊은 떨림으로 동준을 자극하고 있었다.
“너 아니?”
동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진서가 고개를 들어 그 눈을 마주했다. 또 다시 늘 하던 습관처럼 눈으로 묻고 있었다.
“......?”
“너.....얼굴보다 이게 내 눈에 먼저 들어왔다는 거...”
동준이 여전히 엄지손가락으로 쇄골의 선을 따라 그으며 빙긋이 웃었다. 진서가 가만히 그 미소를 담아보고 있다 그 새벽처럼 동준의 아랫입술에 입술을 가져갔다.
-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없다.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온 몸의 모든 세포들이 하나하나 너를 품어 가지려 깨어나고 있는 지금을...
어떻게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니.
그 눈을 통해 영혼까지 내게 주려하는 그 마음이 보이는데....
내 삶속에 그런 너를 둘 곳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니.
이 환희 속에 붉은 두려움이 있다.
너를 가져도 되는지 심장이 달아오르는 지금도 내게 묻게 된다.
내가 너를 가져도 되는 거니...?
세상이 정지된 듯 오직 한사람의 느낌만이 영혼 속에 채워지고 있었다. 작은 몸이 동준을 받아들여 날개를 접어 앉은 새처럼 가늘게 떨렸다. 동준이 자신의 남성을 받아들인 진서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감을 눈을 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가만히 몸을 정지시키고 눈을 떠 그 얼굴을 보았다.
이미 자신을 보고 있는 진서의 열린 눈에 동준이 놀라 멈칫거렸다. 여자를 않으며 눈을 떠 그 얼굴을 마주한적 없었던 동준이 자신이 왜 그 눈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몸이 자신을 받아들였듯 그 눈 속에도 자신이 있음을 알았다.
육체의 교합이외는 아무것도 느껴본 적이 없었든 그 속에 그토록 수많은 느낌과 빛깔이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런 가슴속으로 밀려오는 희열과 그 존재의 사랑스러움에 심장이 뭉클거렸다. 동준이 진서의 어깨를 힘껏 안아 올려 모든 세상의 움직임을 정지시키고 그 떨림 하나에 자신을 맡겼다.
길고 깊은 전율이 멈추지 않을 듯 두 사람을 휘감아 진서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동준이 감았던 몸을 풀어주자 베개를 않고 힘없이 웅크렸다. 동준이 이불을 올려주려다 하얀 시트위로 물든 붉은 선혈에 한순간 가슴이 뜨끔거리며 저려왔다.
“왜.....말하지 않았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불편했던 짐이었을 뿐인데......이제 편해요...”
“내가..너한테....”
“아!......피곤하다....자고 싶다.....”
동준이 그것으로 무거워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진서가 그 말을 가볍게 잘라냈다. 동준이 핫팬츠를 걸치고 거실로 나가 빛이 낮은 조명등으로 바꿔 켰다. 그리고 그 빛이 욕실 안으로 세어들도록 문을 열어둔 후 침실로 들어와 진서를 안아 올려 욕실로 향했다.
잠시 당황해 하며 무슨 말을 하려든 진서가 말을 삼키고 동준을 그대로 두었다. 동준이 밝지 않은 욕실에 진서를 세우고 뜨거운 물을 틀어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그 몸을 씻어 주었다. 조금도 낯설거나 불편하지 하지 않은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만큼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진서의 젖은 몸을 닦아 자신의 헐렁한 셔츠를 입히고는 그 코끝을 툭 치며 묘하게 가라앉고 있는 분위기를 애써 바꾸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라. 시트 갈고 올께.”
진서를 소파에 앉힌 동준이 몸을 일으키다 다시 물었다.
“뭐 좀 마실래?”
“내가 가져올게요.”
“그럴래. 나는 맥주.”
동준이 침실로 들어와 시트를 벗겨내다 그 붉은 선혈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 문득 그것을 떠올렸다. 하얀 비단 도포위로 붉게 물들어 번지든 그 선홍색의 아픔이 불현듯 동준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며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지윤이 집으로 돌아와 거실과 침실을 뒤엎어 아수라를 만들었다. 가정부가 놀라 부들부들 떨며 한필중에게 전화를 했다. 제자리를 잃은 물건들이 온통 난장이 된 그 속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던 지윤이 들어서는 한필중에게 조소석인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빨리도 오셨네. 이제 이런 거 놀랄 때는 지났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달려와 주는 사람..당신뿐 이네.” “무슨 일이야? 아프다면서 이럴 힘은 남아 있었어?”
한필중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눈동자가 풀려버린 지윤을 보고 있는 것이 그에게도 세상에 없는 고문이었다.
“그 놈은.....아픈 것조차 잊고 이렇게 할 만큼 힘을 생기게 하는 모양이지.”
“그래요. 그 애만 보면 금방 끊어질 것 같은 숨도 쉬어져요....당신이 시작한 일인데...왜요. 이제 와서 후회돼요.”
한필중이 5년 전 사고로 남성을 상실했다. 부도가 나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는 했지만 지윤이 한필중과는 다른 삶으로 키워진 여자였다. 무엇하나 부족함 없이 자라 음지의 쾌쾌한 그것과는 평생 옷깃조차 스칠 일이 없을 것 같든 여자였다.
부도직전의 회사를 붙잡기 위한 방편으로 한필중의 여자가 된 그날부터 그녀의 삶이 송두리째 변했다. 말을 잃어갔고 웃음을 잃어갔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아낸 그녀의 얼굴엔 예전의 어떤 모습도 남아있지 않았다. 병원과 약이 없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그 삶이 동준으로 인해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다.
한필중이 사고가 나기 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동준을 집으로 불렀다. 김조환(태수아버지)을 몰락시키기 위한 분노로 혈안이 돼있던 동준이 그때는 다른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그것에만 칼을 갈고 있었다. 한필중이 부리는 주먹들과는 사뭇 다른 동준의 느낌에 지윤이 자신 속에서 다시 여인을 살려내고 있었다.
동준이 집으로 오는 날이면 집안 분위기나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한필중이 어느 순간 조금씩 느껴가고 있었다. 그러다 동준을 보는 지윤의 시선속에 다른 것이 있음을 짐작해 그 가슴이 분노로 휩싸였었다. 처음부터 자신에게 마음을 준적이 없는 여자였으나 다른 사람을 꿈꾸고 있는 그 눈이 한필중의 이성을 무너지게 했다. 하지만 동준의 존재자체에서 느껴지는 그 알 수 없는 믿음이 그를 함부로 할 수 없게 했다. 그 자신도 누구보다 동준을 믿고 있었고 잃고 싶지 않은 욕심을 가지고 있어 애써 그 짐작을 묵고하고 있었다.
김조환이 영도일대를 손아귀에 넣어 동준이 그곳을 떠나올 때보다 더 크게 사세를 확장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걸로도 그를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이미 단단한 성속에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부둣가에서 싸늘하게 식어간 이홍필(동준의아버지)의 한을 가슴에 담아있던 동준에겐 그 단단한 성이 한층 더 깨부수기 좋은 목표물이었다.
물러설 줄 모르고 성공의 가두에 발을 들여놓은 김조환이 더 좋은 먹이감을 물기위해 늘 그 안테나를 세우고 있어 동준이 미끼를 던지기엔 안성마춤이었다. 한필중이 정계에 끈을 두고 있어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부산시가지의 계획을 한발 앞서 입수한 동준이 그 정보를 영도일대의 투기꾼들에게 흘렸다.
발 빠른 업자들과 투기꾼들이 조심스럽게 그 움직임을 보이자 김조환이 그것에 확신을 싫어 모든 자금을 끓어 모아 땅을 사기 시작했다. 그 확신에 더 큰 쇠기를 박아주듯 자연스럽게 부산 출신의 국회위원 문지수와의 자리를 갖게 된 김조환이 다음 날로 진행 중인 건설자금까지 모두 회수해 무리한 땅 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고 공식적으로 시가지계획이 발표되던 날 김조환이 사무실에서 정신을 놓고 쓰러졌다. 이미 자금줄이 중단된 건설회사의 어음이 몰려 들어오고 있었고 자신이 사들이 땅이 그저 변두리의 논밭으로 버려지게 될 것을 그제서야 알게 돼 눈앞의 모든 성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김조환이 반정신을 놓은 채 병원 침대에서 자신의 삶이 허물어져 가는 것을 처절하게 토해내고 있던 그때 병실 문을 열고 동준이 들어왔다.
“니....니 놈은....”
“그동안 잘 사셨습니까?”
“니가 여게는 우짠 일이고?”
동준의 얼굴에 싸늘하게 퍼지는 조소 속에서 김조환이 섬뜩한 것을 보았다. 그때서야 그 모든 일속에 동준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마땅히 제가 와봐야 할 자립니다. 꼭......확인해야 할 일이 있으니...”
“...설마......니 놈이.....”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더 두려울 수 있다고....너무 방심하고 사셨습니다. 분명 편하게 살지 말라고 ...늘 등뒤에 제가 있을거라고 말씀드렸는데..”
김조환의 눈에 붉은 핏대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한줌 먼지만도 못했던 그 존재 하나가 그토록 큰 화기를 담은 원흉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뼈에 사무치는 한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태수 애미가 몸이 마니 안좋다. 내 하나 이리 보내는 걸로 만족하고 식구들 살길은 그대로 둘 수는 없것나.”
“그때.....저도 똑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나 하나 그렇게 들어가 있는 건 아무렇지 않게 버텨낼 수 있다고.....당신이 아버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오늘 이런 자리는 없었을 겁니다. 당신이 자처한 일입니다.”
“동준아! 태수는 니 친구 아이가.”
“여기까짐니다. 남은 건 이미 제 손을 떠난 화실입니다.”
한필중이 무리한 위험을 감수하며 동준의 그 계획에 모든 힘을 싫어주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그를 지윤의 곁에 있게 했다.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던 그 일이 긴 세월동안 동준을 누르고 가두어 지금의 무게를 만들고 있었다. 한필중이 지윤을 놓아주는 대신 그 손에 동준을 쥐어주었고 지윤이 자신을 전혀 가슴에 담지 않는 동준에게 중독되고 있었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든 정재가 무엇에 홀린 듯 정신없이 집을 나와 클럽으로 차를 몰았다. 저녁에 동준에게 느꼈던 그 묘한 기분이 밤새 떠나지 않고 정재를 괴롭히고 있었다. 불안함이 밀려왔다. 조금씩 천천히 마음을 가져올 것이라 다짐하고 있었지만 동준을 본 그 순간 그 마음이 조급함으로 떨려오고 있었다.
클럽을 들어서 자신이 지내던 방에 진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정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방문 앞에 그대로 서 있던 그가 안으로 들어서 벽에 기대져 있던 목검을 풀었다.
- 놓을 수 없다.
이미 너를 알아본 내 가슴이다.
다시는 너를 폭풍우 속에 세우지 않을 것이다.
내 심장을 파내서 네 주검을 덮었던 나다.
다시는......
그런 고통 속에 너를 잊게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너를 지켜보는 나를 참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