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아...하아..."
초율이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차가운 공기 속에서 뿌옇게 또아리를 틀었다가 흩어졌다. 새벽부터 시작되었던 초율의 광기(狂氣)가 마침내 끝난 듯 보였다. 늪을 따라 흐르던 축축한 물길을 붉은 핏물이 대신하여 끈적하게 흐르고 있었다.
울창하게 들어선 나무의 장벽은 완고하여 햇빛 한 조각도 비쳐들지 못했고 혼계의 어둠은 한결같아서 낮인지, 밤인지, 아니면 또다시 새벽인지 시간의 흐름을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초율의 주변에 쌓인 혼계 생물들의 찢겨진 사체가 산의 높이로 무더기 져 있는 것으로 한참의 시간이 지났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초율의 살욕에는 영원히 만족이 없는 듯, 그의 눈은 여전히 먹이를 기다리는 야수의 빛을 발하며 어둠을 뚫고 있었으며 어깨는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짓누르던 악몽. 피로 얼룩진 하얀 드레스를 끌며 자장가를 부르던 한없이 두렵고 또한 그리웠던 그 여자, 소스라 쳐 잠을 깨보면 언제나 초율은 참기 힘든 외로움이 엄습하여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죽이거나 짓밟아야 다시 안정을 찾곤 했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그는 다시 그 여인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어머니었다. 초율 자신을 죽이려하였고 그리하여 초율이 그 배를 스스로 찢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 자신이 살기 위해 죽여야만 했던 그녀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기억이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던 악몽에 몸서리치는 것이 더 나았다. 초율은 머리가 터질 듯 아파왔다.
" 지옥이 따로 없을 광경이로군."
시체의 무덤 너머에서 목소리 하나가 불거져 나왔다. 초율은 반사적으로 달려나가 한 번에 땅을 차고 올라 시체의 산을 넘으며 목표물을 발견했다. 지옥의 불꽃같은 검붉은 머리카락을 풀허헤친 늘씬한 몸매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율은 망설임없이 달려들었다.
" 퍼억!"
하지만, 초율이 오른손을 내리 친 곳에서 유기체의 흔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애꿎은 땅만 깊게 파이면서 주변을 흐르던 핏물이 방향을 틀어 구덩이로 몰려들 뿐이었다. 그리고 힘의 반동에 땅이 흔들리자 시체 무더기 한 쪽이 우르르 무너지며 혼계의 죽은 생물들은 한데 뒤엉켜 바닥으로 굴러내렸다.
초율이 고개를 돌려 매섭게 노리는 곳은 거대한 나무 뒤였다. 나무 뒤로 그림자 하나가 어리어 있었고 사내는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스스로 나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혼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짙은 피의 냄새가 묻어있더군. 이 정도의 냄새라면....분명히 자네일거라고 생각했지. 오랜만에 보는군, 홍백면장(紅白面將)"
남자는 뒷짐을 진 채, 유유히 초율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초율은 그 남자의 정체가 파악이 된 뒤로 끝없이 치솟던 살기를 흩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적은 아니었다. 모든 천계인에게는 그럴지라도 적어도 초율에게만은 적이 아닌 남자였다. 그에게는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차분하고 냉정한 눈빛과 선비처럼 우아하게 잡힌 몸매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어떤 강인함이 있었다. 잘 가꾼 듯한 하얀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부드럽지만 독기가 서린 미소를 띤 입매.
초율의 시선은 남자의 이마 중앙에 새겨진 검은 문신에서 멈추었다. 규칙적이지 않은 검은 불꽃 형태의 문신은 그 자체로 살아있어 때로 형태를 스스로 바꾸고 있었다. 바로 마계 최고 계급인 정통 마황족만이 가지는 제 3의 눈, 영안(靈眼)이었다.
평소 사람마다 다른 기하학적인 무늬로 이마 중앙에 나타나 있는 영안은 평소에는 큰 의미를 가지지못했다. 하지만 필요시 영안은 그 형태를 버리고 세 번째 눈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그 눈이 뜨이면 가공할만한 위력적인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평소보다 수 배에서 수백 배에 이르기까지 힘이 증가하거나 어떤 새로운 형태의 기술이 발휘될 수도 있다.
초율의 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은 마령이었다. 차기 마황으로써의 계승자인 마황태자 마령이 바로 그였다. 마계는 천계와 계급 체계가 달랐다. 천계에서는 천제 아래 4대 왕이 서열 2위인 반면-황족들은 단지 명예로써 대우 받을 뿐이다.-마계에서는 마황 아래 서열 2위는 그의 아들들이었다. 그러니 마령은 서열 2위 황자들 중 황태자로써 절대적인 위치였던 것이다.
" 아무리 더러운 족속들이라지만 씨를 말릴 것까진 없지 않겠나?"
마령은 그 눈빛에 혐오를 실어 그 형체를 알수없을만치 훼손된 시체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초율에게 시선을 옮긴 그는 야릇한 미소를 띄며,
" 자네에게서 지금 느껴지는 기운이 얼마나 자극적인 줄 아는가? 나도 저 짐승들처럼 달려들고 싶을 정도야."
그는 분명히 초율의 혼란을 감지하고 있었다.
" 턱!"
눈 깜짝할 새 초율의 손이 마령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 나에게 널 죽이지 않아도 될 이유따위는 없다."
하지만 마령은 초율이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을 확신이라도 하는 듯, 그 능글맞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 아아, 알지. 알다마다. 그 손에서 살아남을 자가 없다는 홍백면장 아니신가? 나같은 건 상대할 인사(認士)가 아니시지."
그의 말투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이 애매했다. 하지만 초율은 그를 놓아주었다.
마령은 목을 좌우로 흔들며 경직된 근육을 풀며 화제를 바꾸었다.
" 자네가 명성높은 여섯 전사들을 너무 지루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군. 움직이고 싶어 안달일텐데 그렇게만 묶어두다니 말이야. 뭐..물론 그렇다고 녹 쓸 실력들은 아니지만."
초율의 눈빛이 불쾌함에 번뜩였다.
"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닐텐데."
그러자, 마령은 쓸데없는 소리는 거두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 마족 최정예 부대를 이끄는 제 12대 전사 중 여섯이 소리소문없이 잠적해버렸는데 의문을 갖지 않을 사람은 없지. 마계에서 그들은 그만큼 인기인이란 말이야. 점차 그들의 행적에 대해 말들이 많아지고 있어."
초율은 딱 잘라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 잊었나? 지난 대전(大戰)에서 먼저 거래를 제안한 것은 너였다. 난 내가 받을 몫을 취했을 뿐이지. 마계의 일은 내 알 바가 아니다.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건가?"
마령은 짐작한 반응인 듯 씩 웃었다.
" 아버님께서도 소문을 들으신 모양이다. 내게 제 12대 전사들을 호출하라 명하셨다. 기한은 내일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거래가 드러나면 좋을 것은 피차 없지 않겠나?"
초율은 마령을 쳐다보았다. 다시 한 번 그의 영안은 불꽃의 모양을 바꾸며 꿈틀거렸다. 마령의 얼굴에서 거짓을 읽을 수는 없었다.
제 2차 마계대전에서 홍백면장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마계가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승패를 가늠할 수없는 상황이었고 그 때 마황의 제 3황비가 납치되었다. 전장에 직접 출전한 마황을 위로하고자 그가 가장 총애하던 제 3황비가 행차하는 길목에서 홍백면장(초율)은 그녀를 납치했고 볼모로 삼고 있었다. 이에 마황은 결전을 결심했고 그 시기는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초율은 하나의 서신을 전해 받았다. 마황의 둘째 아들 " 마령" 에게서 온 편지였다.
그 날 밤, 초율은 마령과 대면했다. 마령은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당시의 마황태자이며 마령의 형인 '마애'를 제거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형이 제거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자리는 자신의 것이 될 게 뻔했다. 그리고 명목도 확실했다.
초율은 그 요구에 대해 질문도 대답도 없었다. 그는 거침없이 자기 대가만을 통보했다.
" 이후에 마족 제 12대 전사 중 여섯을 내가 데리고 가겠다. 그 여섯은 내가 직접 고를 것이며, 내가 선택한 후에 그들과 그들의 군대는 내가 통솔한다. 물론 처형권도 내가 가진다. 때가 되면 돌려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간섭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마령은 초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과연 그는 명장이었다. 거래는 성립된 것이다. 초율이 왜 하필 전사 여섯을 요구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마족 제 12대 전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열 두명 전사가 그들이었다. 각기 독특하고 강한 군대를 이끄는 장수들이겄고, 다루기 힘든 성미들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평소 서로에게 어떤 간섭도 허용치 않는 독자적인 전사들이었는데 아주 가끔 그들끼리의 충돌이 생길 때면 마계는 긴장했다. 누구도 그들의 전투를 말릴 수는 없었고 어느 한 부대의 전멸이 있기 전에 그 전투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투 당사자들이 아니면 나머지 전사들은 그들의 전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개별적인 전사들이 제 12대 전사들이었지만 그들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들을 한데 뭉치게 하는데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수장이 바로 마령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고 11명 전사들의 공식적인 우두머리였다. 물론 자존심이 강한 제 12대 전사들이 무작정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시한폭탄같아 예측은 늘 어긋나기 일수였다. 하지만 마령은 확신이 들었다. 그들도 분명 이 홍백면장을 직접 만나보면 결코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초율은 분명히 아주 강했으니까.
전쟁의 끝에서 마애는 죽었다. 그리고 전쟁의 종결 후, 마령은 마황태자에 등극했고 마계의 12대 전사 중 여섯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들이 제황성 황자궁의 북궁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 4황자의 거처에서 때때로 들려오는 형체없는 목소리와 그림자, 그 음산한 유령의 실체가 마계 최정예 여섯 전사라는 것을 아는 이는 없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이제 초율만을 절대적으로 섬기는 수족이 되어있다는 것도. 심지어 마령보다 그들의 가슴 속에 초율이 더 큰 지도자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마령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초율은 돌아서며 마령에게 말했다.
" 마계로 그들을 보내주겠다. 그들이 마계에 머물 시간은 단 열흘. 시간이 지켜지지 않으면 강제 소환하겠다."
==또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번 글은 쓰면서도 제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제 2차 마계대전에서 이루어진 마황태자와 초율간의 모종의 거래 내막이 밝혀졌네요. 초율은 비밀리에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셈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