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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15화> 젓가락

바다의기억 |2005.08.10 09:53
조회 14,929 |추천 0

바캉스에 지름신 강림이 겹치면서

 

이번 달은 긴축경제...

 

다음달도 긴축경제...

 

당분간 점심은 김밥일 듯.

 

정말로... 알뜰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 세상을 살다보면 지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난 보통 식사를 하건 화장실을 가건 혼자 가는 편이다.



간혹 ‘아싸냐?(아싸=아웃사이더)’ 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게 편할 뿐이다.


내가 타인의 시간에 관여하는 것도


내가 영향을 받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다.



그건 긴 시간동안 굳어진 습성이자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오늘도 난 변함없이 혼자 식당을 찾았다.


메뉴는 A열에 조기구이, B열에 순두부, C열에 돈가스.



조기구이는 발라먹기가 귀찮고


순두부는 뜨겁다.


그래서 난... 돈가스를 택했다.


점심밥이 될 그 이름.


바람의 돈가스.



........곧 개봉.



아무튼 스물 스물 움직이는 줄을 따라


바람처럼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생사를 논하던 중


바로 옆을 지나는 낯익은 얼굴이 번뜩 눈에 들어왔다.



기억 - 어?!


민아 - 앗, 안녕하세요?


기억 - 아, 네.



여자친구와 나란히 걸어가던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꾸벅 숙여보였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나의 아웃사이더 본능은 꼬리를 내렸고


‘저기... 식사하러 오신 거면 여기 같이 서시죠.’


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크라우칭스타트 포즈를 잡는 게 느껴졌다.


난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말하자, 밥 같이 먹자고!!



기억 - 저.....응?



하지만 이미 그녀는 친구와 함께


유유히 옆에 있는 조기구이 줄 끝에 서있었다.



대체.... 왜, 왜 돈가스가 아닌 조기구이를 택한 거야!!


저 부실해 보이는 조기의 모습을 보라고!


2가지 9연족의 뒷지느러미하며 20마디나 되는 척추가시!


발라보면 뼈 밖에 없을 걸?



그렇게 애꿎은 조기만 계속 헐뜯던 중


난 언제부턴가 돈가스 줄이 멈춰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배식원

- 돈가스가 다 떨어져서 지금 튀기고 있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됩니다~!!



학생들의 야유소리에도 불구하고


돈가스는 쉽게 채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설마... 이런 현상을 예측했던 걸까?



그렇게 한참을 서있고 나서야 난 급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식판을 들고 줄에서 나오는 순간



민아 - 어?!


기억 - 아, 안녕하세요.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친구 - 그런데 거기서 딱 마주친 거 있지?!


민아 - 어머나.. 그건 심했다



난 지금 그녀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비록 그녀의 친구도 함께 있긴 했지만


그녀와 마주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굉장한 일이었던 것이다.



오른손 나이프, 왼손 포크, 오른손 나이프, 왼손 포크....



난 식사를 하는 내내


중학교 3학년 2학기 가정시간


상차림과 식사예절에서 배웠던 내용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뇌며


깔끔한 식사를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민아 - 너네 lab은 어때? 들을 만해?


친구 - 아우, 그 얘긴 꺼내지도 마. 끔찍해 끔찍해.



그렇게 그녀가 친구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여유 있게 식사를 하는 동안


혼자 열심히 돈가스를 썰어먹다 보니


그녀가 반도 먹기 전에


내 그릇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 때 문득 눈에 띈 그녀의 조기.


살을 발라놨다고 하기 보다는


젓가락으로 후벼놨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그 처참한 몰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기억 - 잠깐만 젓가락 좀 줘보세요.


민아 - 예? 아 네.



조기에 정신이 팔린 나나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녀나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잠시 잊어버린 탓에


난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받아


생선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생선을 깨작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친구와 영어 강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아 - 우리 강사는 발음이 영국식이라 가끔 좀 웃겨.


친구 - 그래도 너넨 알아들을 만은 하잖아. 우린 진짜.....



먼저 등지느러미를 위쪽으로 뽑아내고


꼬리 쪽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살을 쭉 들어내면....



기억 - 다 발랐습니다.


민아 - 아, 네. 네?!



다시 젓가락을 받아 들고서야


내가 젓가락을 가져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 자신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친구 - .....어머나.


민아 - ..........



그 순간 찾아온 어색한 침묵.


난 재빨리 뭔가 설명할만한 말을 찾아 궁리했지만


뼈와 살이 분리된 조기는 말이 없었다.



기억 -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작전상 후퇴.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둘의 시선을 뒤로하고


난 잽싸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게 그녀와 나의 첫 번째 식사였다.



그날 이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중간고사 기간을 2주 정도 남겨놓고 있는 어느 날.


연습실이건 도서관이건 할 것 없이


‘Now studying. Please shut the FuXXer'


라는 메시지가 가득한 가운데


난 홀로 인구고령화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학기 초에 ‘Girl!’ 이라는 일념으로 교양만 왕창 신청했다가


하나 빼고 다 드롭한 상태.


전공까지 통틀어 딸랑 세과목 듣는데다


일주일에 한 과목씩 치는 데 뭐가 급했겠는가?


이런 걸 최소이수학점의 삶이라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한가진 나날을 즐기며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난 겨울철 굴속에 박힌 토끼마냥


다닥다닥 붙어있는 부원들을 볼 수 있었다.



기억 - ...... 무슨 일 있어요?


연출 - 어! 기억이 너 잘 왔다. 와서 이것 좀 풀어봐라.



문제의 발단은 민아의 수학프린트.


그녀가 모르는 문제가 있어 회계에게 물어봤는데


그것이 연출에게, 김양에게, 안군에게 넘겨지면서


연극부 전체의 일로 커진 것이다.



회계

- 그러니까, 여기서 순열이 아니라 조합이 들어가니까


경우의 수가 256가지가 되는 거잖아.



연출 - 아니지, A랑 B랑 같은 거니까 128가지지.


회계 - 아 그건 이미 아까 계산 했잖아!


연출 - 숫자 자체가 줄어든 거니까 여기서 또 곱해줘야 하는 거 아냐?


회계 - 넌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똥 싸냐?



그렇게 각종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지난 학기까지 나의 여린 가슴을 유린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테일러급수를 활용하여 cos0.1의 값을 소수점 세 자리까지 근사하시오.



솔직히... 그건 계산기 누르면 나오는 거잖아.


공대생은 계산기가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코사인하이퍼볼릭(cosh)의 역함수의 미분을 구하시오.

-아크탄젠트하이퍼볼릭(arctanh)을 0의 부근에서 4차까지 테일러전개 하시오.



........그놈의 말 외우는 데만 3일 걸렸다.


cosh(코사인하이퍼볼릭)은 코쉬라고 읽는다 치고


sinh(사인하이퍼볼릭)은 뭐라고 읽냐! 다들 신흐라고 읽었다!



민아 - ....어때요? 알 것 같아요?


기억 - 아아아아, 네, 지금 볼게요.



한참동안 마음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분노에 주먹을 부르쥐고 있던 난


그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회계

- 128분의 1이 정답이라니까!


내가 경제학부 밥 먹은 게 몇 낀데 이걸 못 풀겠냐?



연출

- 허어, 지난번엔 술값 25700원 나왔는데


3만원에 300원 더 주고 오천 원 거슬러 달라고 우기던 놈이


이제 와서 경제학부 찾고 있네?



회계 - 그, 그땐 술이 워낙 취해서 그런 거지!!


연출 - 오, 노. 변명은 이제 그만. 256분의 1이 정답이다.



둘은 지난날의 과오까지 들춰가며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지만....


어디보자..... 다음의 경우 C구슬이 나올 확률 P를 구하시오.



..........64분의 1 이잖아.



결론은 ‘둘 다 틀리다’ 였다.




잠시 후


나의 풀이과정을 들은 사람들은


‘오...과연 공대생.... ’


이라며 경악했다.



회계

- 이런 놈들이 경상수학을 같이 들으니까


우리가 학점이 안 나오는 거 아냐!!!



연출 - 내가 듣기론 학점 따로 매긴다던데?


회계

- 그래도! 응?! 생각을 해봐.


200점 만점에 얘들은 평균이 180이 나오는데


우린 80점 나온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비교가 안 되겠어?


A+ 줄 거 A0 주고, B+ 줄 거 C+ 주고.


그러니까 내가 경상수학을 세 번 듣고 D가 나오지!!



아무래도 수학에 맺힌 한이 컸던 듯


회계는 한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삼 수강에 D라니....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악을 켠다는 데...



난 은근슬쩍 올라가는 입 꼬리를


손으로 꾹 눌러 진정시키며


유유히 돌아섰다.


‘봤냐? 공대생의 파워를...’


이라고 과시하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민아 - 저, 저기요!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그녀의 애타는 목소리.


역시 뭔가 빠졌지 싶었다.



‘저 아직 모르는 문제가 남았는데 조금만 더 도와주시겠어요?’



그렇게 또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관계는 일취월장!!


그렇지, 이래야 이야기가 되는 거지.



민아 - 연필 두고 가셨어요.


기억 - ...... 아, 네.



제길, 제길, 제길!!!


그렇게 그녀의 손에서 몽땅한 연필을 받아 들고


환상과 현실의 부조리한 괴리에 가슴 시리게 울면서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선 순간


나에겐 다시금 5월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민아 - 아.... 그리고....


기억 - 네?


민아

- 저.... 이제 서로 말 놓기로 하는 게 어때요?


나이도 같은데 좀 어색하잖아요.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건 나에게 몹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서슴없이


‘민아야 안녕?’


을 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서면 남자가 아니다!!



기억 - 아, 네.... 그러죠.


민아 - ....예. 그래요.


기억 - 예, 예.


민아 - 예, 그럼......



....... 아무래도 그녀와 말을 놓고 지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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