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캉스에 지름신 강림이 겹치면서
이번 달은 긴축경제...
다음달도 긴축경제...
당분간 점심은 김밥일 듯.
정말로... 알뜰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 세상을 살다보면 지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난 보통 식사를 하건 화장실을 가건 혼자 가는 편이다.
간혹 ‘아싸냐?(아싸=아웃사이더)’ 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그게 편할 뿐이다.
내가 타인의 시간에 관여하는 것도
내가 영향을 받는 것도 별로 달갑지 않다.
그건 긴 시간동안 굳어진 습성이자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오늘도 난 변함없이 혼자 식당을 찾았다.
메뉴는 A열에 조기구이, B열에 순두부, C열에 돈가스.
조기구이는 발라먹기가 귀찮고
순두부는 뜨겁다.
그래서 난... 돈가스를 택했다.
점심밥이 될 그 이름.
바람의 돈가스.
........곧 개봉.
아무튼 스물 스물 움직이는 줄을 따라
바람처럼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생사를 논하던 중
바로 옆을 지나는 낯익은 얼굴이 번뜩 눈에 들어왔다.
기억 - 어?!
민아 - 앗, 안녕하세요?
기억 - 아, 네.
여자친구와 나란히 걸어가던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꾸벅 숙여보였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에
나의 아웃사이더 본능은 꼬리를 내렸고
‘저기... 식사하러 오신 거면 여기 같이 서시죠.’
라는 말이 목구멍 바로 아래에서
크라우칭스타트 포즈를 잡는 게 느껴졌다.
난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말하자, 밥 같이 먹자고!!
기억 - 저.....응?
하지만 이미 그녀는 친구와 함께
유유히 옆에 있는 조기구이 줄 끝에 서있었다.
대체.... 왜, 왜 돈가스가 아닌 조기구이를 택한 거야!!
저 부실해 보이는 조기의 모습을 보라고!
2가지 9연족의 뒷지느러미하며 20마디나 되는 척추가시!
발라보면 뼈 밖에 없을 걸?
그렇게 애꿎은 조기만 계속 헐뜯던 중
난 언제부턴가 돈가스 줄이 멈춰 서있다는 걸 깨달았다.
배식원
- 돈가스가 다 떨어져서 지금 튀기고 있거든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됩니다~!!
학생들의 야유소리에도 불구하고
돈가스는 쉽게 채워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설마... 이런 현상을 예측했던 걸까?
그렇게 한참을 서있고 나서야 난 급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식판을 들고 줄에서 나오는 순간
민아 - 어?!
기억 - 아, 안녕하세요.
다시 그녀와 마주쳤다.
친구 - 그런데 거기서 딱 마주친 거 있지?!
민아 - 어머나.. 그건 심했다
난 지금 그녀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
비록 그녀의 친구도 함께 있긴 했지만
그녀와 마주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굉장한 일이었던 것이다.
오른손 나이프, 왼손 포크, 오른손 나이프, 왼손 포크....
난 식사를 하는 내내
중학교 3학년 2학기 가정시간
상차림과 식사예절에서 배웠던 내용을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뇌며
깔끔한 식사를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민아 - 너네 lab은 어때? 들을 만해?
친구 - 아우, 그 얘긴 꺼내지도 마. 끔찍해 끔찍해.
그렇게 그녀가 친구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여유 있게 식사를 하는 동안
혼자 열심히 돈가스를 썰어먹다 보니
그녀가 반도 먹기 전에
내 그릇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 때 문득 눈에 띈 그녀의 조기.
살을 발라놨다고 하기 보다는
젓가락으로 후벼놨다고 해야 맞을 것 같은 그 처참한 몰골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기억 - 잠깐만 젓가락 좀 줘보세요.
민아 - 예? 아 네.
조기에 정신이 팔린 나나
친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녀나
순간적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잠시 잊어버린 탓에
난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받아
생선을 발라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생선을 깨작거리고 있는 동안
그녀는 친구와 영어 강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아 - 우리 강사는 발음이 영국식이라 가끔 좀 웃겨.
친구 - 그래도 너넨 알아들을 만은 하잖아. 우린 진짜.....
먼저 등지느러미를 위쪽으로 뽑아내고
꼬리 쪽에서부터 척추를 따라 살을 쭉 들어내면....
기억 - 다 발랐습니다.
민아 - 아, 네. 네?!
다시 젓가락을 받아 들고서야
내가 젓가락을 가져갔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깜짝 놀라 자신의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친구 - .....어머나.
민아 - ..........
그 순간 찾아온 어색한 침묵.
난 재빨리 뭔가 설명할만한 말을 찾아 궁리했지만
뼈와 살이 분리된 조기는 말이 없었다.
기억 -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작전상 후퇴.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둘의 시선을 뒤로하고
난 잽싸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게 그녀와 나의 첫 번째 식사였다.
그날 이후 시간은 흐르고 흘러
중간고사 기간을 2주 정도 남겨놓고 있는 어느 날.
연습실이건 도서관이건 할 것 없이
‘Now studying. Please shut the FuXXer'
라는 메시지가 가득한 가운데
난 홀로 인구고령화에 따른 경제구조 변화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학기 초에 ‘Girl!’ 이라는 일념으로 교양만 왕창 신청했다가
하나 빼고 다 드롭한 상태.
전공까지 통틀어 딸랑 세과목 듣는데다
일주일에 한 과목씩 치는 데 뭐가 급했겠는가?
이런 걸 최소이수학점의 삶이라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한가진 나날을 즐기며
연습실에 들어섰을 때
난 겨울철 굴속에 박힌 토끼마냥
다닥다닥 붙어있는 부원들을 볼 수 있었다.
기억 - ...... 무슨 일 있어요?
연출 - 어! 기억이 너 잘 왔다. 와서 이것 좀 풀어봐라.
문제의 발단은 민아의 수학프린트.
그녀가 모르는 문제가 있어 회계에게 물어봤는데
그것이 연출에게, 김양에게, 안군에게 넘겨지면서
연극부 전체의 일로 커진 것이다.
회계
- 그러니까, 여기서 순열이 아니라 조합이 들어가니까
경우의 수가 256가지가 되는 거잖아.
연출 - 아니지, A랑 B랑 같은 거니까 128가지지.
회계 - 아 그건 이미 아까 계산 했잖아!
연출 - 숫자 자체가 줄어든 거니까 여기서 또 곱해줘야 하는 거 아냐?
회계 - 넌 한 숟가락 먹을 때마다 똥 싸냐?
그렇게 각종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지난 학기까지 나의 여린 가슴을 유린했던
수많은 문제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테일러급수를 활용하여 cos0.1의 값을 소수점 세 자리까지 근사하시오.
솔직히... 그건 계산기 누르면 나오는 거잖아.
공대생은 계산기가 있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코사인하이퍼볼릭(cosh)의 역함수의 미분을 구하시오.
-아크탄젠트하이퍼볼릭(arctanh)을 0의 부근에서 4차까지 테일러전개 하시오.
........그놈의 말 외우는 데만 3일 걸렸다.
cosh(코사인하이퍼볼릭)은 코쉬라고 읽는다 치고
sinh(사인하이퍼볼릭)은 뭐라고 읽냐! 다들 신흐라고 읽었다!
민아 - ....어때요? 알 것 같아요?
기억 - 아아아아, 네, 지금 볼게요.
한참동안 마음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분노에 주먹을 부르쥐고 있던 난
그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회계
- 128분의 1이 정답이라니까!
내가 경제학부 밥 먹은 게 몇 낀데 이걸 못 풀겠냐?
연출
- 허어, 지난번엔 술값 25700원 나왔는데
3만원에 300원 더 주고 오천 원 거슬러 달라고 우기던 놈이
이제 와서 경제학부 찾고 있네?
회계 - 그, 그땐 술이 워낙 취해서 그런 거지!!
연출 - 오, 노. 변명은 이제 그만. 256분의 1이 정답이다.
둘은 지난날의 과오까지 들춰가며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지만....
어디보자..... 다음의 경우 C구슬이 나올 확률 P를 구하시오.
..........64분의 1 이잖아.
결론은 ‘둘 다 틀리다’ 였다.
잠시 후
나의 풀이과정을 들은 사람들은
‘오...과연 공대생.... ’
이라며 경악했다.
회계
- 이런 놈들이 경상수학을 같이 들으니까
우리가 학점이 안 나오는 거 아냐!!!
연출 - 내가 듣기론 학점 따로 매긴다던데?
회계
- 그래도! 응?! 생각을 해봐.
200점 만점에 얘들은 평균이 180이 나오는데
우린 80점 나온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비교가 안 되겠어?
A+ 줄 거 A0 주고, B+ 줄 거 C+ 주고.
그러니까 내가 경상수학을 세 번 듣고 D가 나오지!!
아무래도 수학에 맺힌 한이 컸던 듯
회계는 한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삼 수강에 D라니....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악을 켠다는 데...
난 은근슬쩍 올라가는 입 꼬리를
손으로 꾹 눌러 진정시키며
유유히 돌아섰다.
‘봤냐? 공대생의 파워를...’
이라고 과시하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민아 - 저, 저기요!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그녀의 애타는 목소리.
역시 뭔가 빠졌지 싶었다.
‘저 아직 모르는 문제가 남았는데 조금만 더 도와주시겠어요?’
그렇게 또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관계는 일취월장!!
그렇지, 이래야 이야기가 되는 거지.
민아 - 연필 두고 가셨어요.
기억 - ...... 아, 네.
제길, 제길, 제길!!!
그렇게 그녀의 손에서 몽땅한 연필을 받아 들고
환상과 현실의 부조리한 괴리에 가슴 시리게 울면서
풀죽은 모습으로 돌아선 순간
나에겐 다시금 5월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민아 - 아.... 그리고....
기억 - 네?
민아
- 저.... 이제 서로 말 놓기로 하는 게 어때요?
나이도 같은데 좀 어색하잖아요.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건 나에게 몹시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과연 내가 서슴없이
‘민아야 안녕?’
을 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여기서 물러서면 남자가 아니다!!
기억 - 아, 네.... 그러죠.
민아 - ....예. 그래요.
기억 - 예, 예.
민아 - 예, 그럼......
....... 아무래도 그녀와 말을 놓고 지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