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생각에 잠기다.
핸드폰 알람이 쉴새 없이 울어대고 있지만 채원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치 딴나라 사람인냥 이불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 듣기 싫어. 저 알람 좀 꺼줘. 이렇게 소리를 치고 싶다. 벌써 아침이야? 1분만. 1분만 더 자자. 채원은 울어대는 핸드폰이 마치 사람인냥 애원하고 부탁한다. 도무지 들어먹질 않는 지독한 핸드폰 같으니라고.
“안일어나?”
텔레파시가 통했나? 늙은여우는 언제부터 내 핸드폰과 교감을 나누어 온거야? 채원은 끙하고 우는 소리를 했다. 물론 그것이 늙은 여우에게 통하지는 않겠지만..
“너 안일어나냐?”
발로 툭툭 아니 뻥뻥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채원은 몸을 뒤척 뒤척 하다가 눈을 떴다. 늙은 여우가 매섭게 채원을 노려보고 있다.
“안 일어 날거냐고?”
“일어나. 일어날거야...”
채원은 밍기적 거리며 몸을 세웠다. 늙은 여우는 그것까지 확인을 하고서 방을 나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넘었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회사에 나가야 한다. 귀찮다. 귀찮다. 채원은 아직까지 울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들어 알람을 해제해준다. 이젠 이 알람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니..원. 채원은 있는 힘껏 기지개를 편다.
“실연 당한지 이틀만에 정상으로 돌아온거야?”
먼저 밥을 먹던 지원이 채원이 씻고 나오는 모습을 보고 한 마디를 한다. 아침부터 벅벅 속을 긁어대는 이유가 뭐야? 채원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감고는 자리에 앉았다. 술마신 사람도 없는데 웬 콩나물 해장국? 채원은 시간이 많이 없는 터라 대충 국에 밥을 말아 후루룩 삼키듯 먹어치웠다.
“오늘같은 날은 술 마시지 말고 일찍 일찍 들어와.”
밥을 비우고 일어서는데 지원이 한 마디를 한다. 아직까지 밥을 깨작거리고 있는거야? 징그럽다. 아니 대단하다.
“나도 알아”
채원은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런 날 술마시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어린애야? 실연 당했다고 술마시고 질질 짤까봐. 생각할 수록 기분이 나쁘다. 나이도 어린게 꼭 꼭 언니노릇 할려고 맛먹는 지원이 못마땅하다. 채원은 화장도 대충하고 옷을 챙겨입었다. 누가 실연을 당하고 싶어서 당한거야? 누가 바람둥인줄 알았냐고. 가방을 집어들며 채원은 시계를 힐긋 쳐다보았다.
8시45분. 회사까지는 걸어서 고작 10분거리다. 9시까지 출근인데 오늘은 좀 늦은 편이다. 그래도 20분전까지는 들어가는 편인데. 채원은 그제야 밥을 먹고 있는 늙은 여우에게 회사 다녀오겠습니다 그런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도 선선하다. 얼마전까지는 몸서리치게 춥더니. 그래도 다행이다. 겨울이 아니여서. 봄이라서 다행이다. 채원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발을 떼었다. 집을 나서기 무섭게 머릿속에서 온통 지난 토요일의 악몽이 떠올랐다. 채원은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쓸데없는 기억이 아침부터 나는 이유가 뭐냐고. 사람 짜증나게. 그때 채원의 손에 들린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디야?”
은주가 앞 뒤 없이 어디냐고 물어왔다.
“어디긴, 회사 앞이지. 넌?”
“난 회사 들어왔지. 아직 니가 안왔길래 전화해봤어. 얼른와”
은주는 전화를 끊었다. 채원도 전화를 끊었다. 누가 보면 애인인줄 알겠다. 아침부터 어딘지 그렇게 서로의 위치가 궁금한게 얼마전까지 채원이 했던 일이다. 그 생각이 나자 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도대체 왜 한거야? 채원은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아침부터 그 인간 생각을 하는 자신이 더 짜증이 났다. 그 사이 채원은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먼저 왔다고 전화까지 친절히 해준 은주가 채원을 보자 손을 흔들었다. 아침부터 신났군,
“왜 이렇게 늦었어?”
채원이 자리에 앉기도 무섭게 옆자리 은주가 은자를 당겨와 물었다. 채원은 그런 은주의 호의가 조금 귀찮았다. 너에게 뭐라고 토요일의 일을 설명한다니.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였다. 은주는 채원의 행동을 가만 지켜만 보고 있다.
“너 무슨일 있니?”
눈치하고는. 채원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회사 오는게 두려웠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였다. 나 이제 당당한 솔로요. 이렇게 소리쳐야 하는 현실이 싫었다. 누가 솔로가 화려하다고 했던가? 누가 싱글은 당당하다고 했던가. 그건 다 거짓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애인 있는 것들이 더 화려하고 당당하다. 그러니 이제 솔로신세가 되어버린 채원은 하나도 화려하지도 않고 당당하지도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남자친구란 놈이 바람을 피워서 헤어졌다.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냔 말이다. 채원은 의자를 돌려 은주를 바라보았다. 채원의 눈의 두배는 되어 보이는 왕눈을 가진 은주가 그 큰 눈을 더욱 더 동그랗게 떴다.
“나 민준이랑 헤어졌어”
이왕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게 낫다고 하지 않는가. 채원은 민준이라는 이름을 자신의 입으로 꺼내기 싫었는데 결국 민준이라는 이름을 또박 또박 말하고 있다. 은주는 눈이 더 커진 듯 했다. 왜냐고 묻고 싶은거겠지. 무슨 일이냐고. 그렇게 묻고 싶은 거겠지. 너의 눈이 이마 나에게 말을 하고 있단다. 도대
체 어떻게 말을 하니. 뭐라고 말을 해야겠니. 채원은 물끄러미 아니 조금은 가엾게 바라보는 은주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갑자기 왜?”
거봐. 그렇게 묻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 갑자기라니. 갑자기는 아니지. 채원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렀다. 갑자기 명치끝이 아파왔다. 눈물샘도 자극을 받은 모양인지 연신 방망이질이다. 이러다 망신살 뻗게 와락 눈물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상상만으로도 챙피하다.채원은 애써 헛기침을 해댔다.
“정말 헤어진거냐구?”
몇 번을 말해줘야 하는건지. 대충 듣고 넘어가주면 고맙잖아.
“응”
채원은 작게 대답했다. 은주는 연신 ‘어머’를 반복하고 있다. 나도 그 자식앞에서 그렇게 입을 동그랗게 말아서 ‘어머’ 이렇게 말할걸 그랬나보다. 채원은 은주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난 아무렇지도 않아. 왜 호들갑이니. 이렇게 말을 해주고 싶은데 그게 거짓말이라서 그냥 그렇게 알아봐 달라고 씩 웃어보였다.
“너 괜찮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은주. 그래도 고맙다. 왜 헤어졌냐고 꼬치 꼬치 캐묻기 전에 내 걱정을 다 해주고. 채원은 그렇게 묻는 은주에게 살짝 웃어보였다. 괜찮을 리가 있니. 바람이 났는데. 보기좋게 당하고 왔는데. 유치한 드라마 한편을 찍고 왔는데 괜찮겠니. 사랑이 떠나갔는데 괜찮을까.
“괜찮지 그럼. 남자가 세상 하나도 아니잖아.”
“그래도. 너 민준씨 많이 좋아한거 아니였어?”
민준. 민준이라고 이젠 남이 되어버린 사람을, 남의 남자가 되어 버린 사람의 이름을 들으니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그래. 이젠 내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야. 민준이라는 이름. 이젠 나의 것이 아니야. 내가 많이 좋아했다고. 그래 좋아했지. 아니 지금도 좋아하는건 아닌지 그게 걱정이 되는걸. 어쩌니
“좋아하긴. 아니다 좋아하긴 했지. 근데 지금은 아니야. 정떨어졌어”
채원은 애써 냉랭하게 말했다. 정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을까?
무슨 포스트 잇도 아니고.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게 말처럼 쉬우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 때문에 아파하진 않겠지. 그럼 아마 수많은 노래와 영화와 시와 소설이 아마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걸. 웃긴게 대중가요 대부분이 사랑. 이별 뭐 이런걸로 되어있잖아. 채원은 은주를 가만 바라보았다.
“웃겼어. 조금. 그 자식 바람났더라. 사랑이 그런거지 뭐. 안그래?”
바람 났다고 굳이 먼저 이야기 하는건 그러면 정떨어진게 이해될까봐. 아니 그렇게 이해해 주길 바래서이다. 은주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채원을 바라본다. 뭘 그렇게 보니. 불쌍하고 안쓰럽고 가엾고. 지금 니가 날 보는 표정, 바로 그런 표정이야. 그러지마. 난 아무렇지도 않다구. 사랑하다 헤어진 여자가 동정 받아야 하니? 사랑하다 버림받은 여자는 다 그렇게 안쓰럽고 가여운거야? 아니야. 세상의 반이 남자야. 난 한 시간에 한 사람씩 바꿔치기 해도 죽을 때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남자를 다 만나볼 수도 없다구. 그 많고 많은 사람중에 한 사람이 내가 싫다고 떠나간게 그렇게 동정받을 일이니? 제발 그렇게 보지마. 채원은 또 한번 은주를 향해 씩 웃어보였다.
“두 사람 잡담 그만하고 일 시작 하는게 좋을 것 같은데..”
능구렁이 같은 최팀장이 은주와 채원을 향해 경고를 준다. 언제쯤 저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채원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짙은 속눈썹까지 부치고 출근한 최팀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언제봐도 정이 안가는 그런 여자다. 여기가 무슨 무도회장인지. 원. 여름되면 아주 가슴을 다 들어내고 다닐지도 모른다. 비키니를 입고 출근하진 않을지. 아마 진급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노력해서 된 결과물인지도 모른다고 채원은 속으로 비웃었다. 가볍고 싼티나는 여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런 부류의 여자다. 최팀장은 그 조건을 아주 만족스럽게 갖추고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채원과 은주는 말없이 자신의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채원은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어제부터 울리지 않는 전화기. 뻔한 건데도 아직 적응이 안된다. 채원은 시간을 확인한다. 지금 이 시간쯤엔 항상 문자가 왔다. 출근 잘했냐고. 아침부터 니가 보고싶다고 그런 닭살스런 문자였다. 그 문자를 확인할 떄마다 채원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된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닭살스런 문자가 올 일은 없다. 왜 진작 눈치채지 못했을까. 채원은 자신의 둔한 감각이 몸서리치게 원망스러웠다. 여우같은 기집애. 어디서 꼬리를 친걸까. 도대체 어떻게 꼬리를 친거길래 그 놈이 그렇게 휘릭 하고 넘어갔냐는 말이야. 채원은 토요일밤이 떠올랐다. 그것은 악몽이다. 차라리 그런 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아니 그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석하게도 그것은 지독한 현실이였다.
민준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5시였다. 그 날은 채원과 민준이 만난지 200일이 되는 아주 엄청난 날이였다. 적어도 채원에게는 그랬다. 남들은 200일가지고 호들갑이냐고 채원에게 야유를 보냈지만 채원은 아침부터 긴장을 했다.
솔직히 지원이 한 말이 은근슬쩍 신경이 쓰인 탓도 있다. 만난지 100일 조금 지나 민준을 지원이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런데 지원이 민준을 보고 바람둥이네. 여자 많이 울렸을거네. 그렇게 말을 해댔다. 그럴리 없다고 지원에게 화를 냈지만 사실 그 말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한동안 민준을 의심의 눈초리로 주의해서 지켜보았다. 괜히 떠보기도 하고 어느날은 민준의 핸드폰을 검사도 하고 그렇게 민준을 옭아메었다. 물론 지원이 말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채원은 그것이 감사했다. 한달정도 바싹 긴장을 했는데 아무일도 없었고 민준의 태도도 달라진게 없었다.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맞는 200일이였다. 이정도면 이젠 지원에게 콧방귀를 날릴 차례가 된거다. 200일 축하 파티를 하고 나면 지원에게 강한 펀치를 날려 줄려고 마음먹었다. 거봐, 니가 잘못본거야. 괜한 사람 잡고 그래? 이렇게 비웃어 줄려고 했다. 그런데. 그 200일째 되는 날 보기좋게 당했다. 지원에게 한 마디도 못했는데 보기좋게 당하고 만거다.
****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커피숍에서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안을 휘도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 무슨 일을 할까 곰곰이 생각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영화를 한편보고 같이 술을 한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얼마전에 받은 월급으로 민준의 선물도 하나 준비해둔 터라 벌써 기분이 좋았다. 잠시후 민준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야. 손을 흔드려는 순간. 민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또각 또각 그녀의 구두소리가 채원의 귀에 가느랗게 찔러 들어왔다. 민준은 갈팡질팡 못하는 마치 오줌이라도 마려운 듯한 모습으로 그렇게 채원을 향해 다가왔다. 채원은 반쯤 올린 손을 내렸다, 누구야. 저 여자 누구야. 민준의 누나? 누나가 있다는 소리는 듣질 못했는데. 누구지?
“안녕하세요?”
그 사이 그 여자는 채원에게 다가와 아주 형식적인 그러면서 아주 냉랭한 인사를 건냈다. 인사는 왜 하는거야? 내가 왜 인사를 받아야하지? 그런 생각도 잠시 그 여자는 멀쭘하게 서 있는 민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앚혔다. 채원은 민준을 바라보았다. 민준은 채원의 시선을 피했다. 채원의 시선은 허공을 떠돌다 그대로 되돌아왔다.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말해줘.
“저 민준이 여자친구예요”
순간 채원은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했다. 무슨소리 하는거야? 여자친구라고? 이봐요. 당신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민준이 여자친군 나라구요.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야. 아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구.
“민준씨 여자친구였죠?”
여자친구였죠? 이봐요. 듣고 있으려니 웃기네요. 여자친구였다니요. 전 엄연한 이 남자. 강민준씨 여자친구라구요. 당신이 뭔데 나보고 여지친구였죠? 이런 과거형을 붙이냐구요.
채원은 자신의 두 손과 두 다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민준은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채원을 외면하고 있었다. 채원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가 이 상황을 정리해서 채원에게 말해주길 바랄 뿐이였다. 바보. 멍청이.
“자꾸 민준씨에게 만나달라고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나왔어요. 민준씨 그쪽 다 잊었고 아시겠지만 지금은 내 남자친구예요.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달라느니. 그런 전화도 하지 말고 그런 문자도 보내지 마세요”
그녀는 눈빛하나 흔들리지 않고 채원을 바라보며 또박 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때마다 채원의 심장에 날카로운 바늘 자국이 하나씩 새겨지는 듯 했다.
“민준씨 성격에 이런 말 못할거라는 거 누구보다 잘알아요. 그래서 실례인지 알지만 이렇게 한번 뵙고자 나왔어요. 민준씨와 어떤 사이였는지 얼마동안 만났는지 이야기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엄연한 남이잖아요. 앞으로 민준씨와 제 사이에 더는 채원씨 때문에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내 이름을 왜 저 여자 입에서 들어야 하는거지. 우리 엄마가 배아파 날 낳아 며칠밤 지새워가며 지어준 이 이름이 고작 저런 여자 입에서 듣기위해 그런거였나? 뭐야? 지금 뭐라고 하는거야? 뭘 다 알고 있다는 거지.
채원은 머릿속이 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숨이 막혀오는 듯 했다. 커피숍 안 모든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 모두가 나를 불쌍하게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거다. 이건 말도 안돼.
“오늘 이후로 이런 일은 다신 없었으면 해요. 같은 여자로서 저도 이런 말씀 드리기 쉬운건 아니네요. 하지만 헤어진 남자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거. 같은 여자로서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이봐요. 집착이라뇨. 이게 무슨 소리예요? 주객이 전도가 되어도 너무 되었다는 느낌 못받았어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되요? 내가 지금 옛 남자 다리 붙잡으로 나온 그런 여자처럼 보였어요? 난 오늘 우리의 200일을 기대하며 나왔어요. 당신. 정말 모르겠어요?
채원은 심장이 쿵쿵거려서 도무지 그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우릴 수가 없었다. 여자는 아무런 흐트러짐도 채원에게 보이지 않은채 외려 당당하고 멋있게 채원에게 강한 펀치를 날려주었다. 그리고 여자는 마지막까지 채원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해주었다. 여자는 자신이 할 말이 다 끝나자 민준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민준씨. 나 급한 일 있어서 먼저 가봐야해. 얘기 잘해. 이따 전화해.”
“알았어.”
그 여자는 민준의 볼에 채원이 보란 듯이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채원을 향해 가벼운 목인사를 건내고 또각 또각 유유히 사라졌다. 민준은 그녀가 나가자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벌컥 벌컥 물을 마셔댔다. 채원은 아직도 얼이 반쯤 나간 사람마냥 아무런 동요없이 그저 흐리멍텅한 눈으로 민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사실..”
그래. 이 자식아 말해봐, 뭐야. 지금 니들 뭐하는 짓거리야. 어서 말해봐. 니가 하는 말이 하나도 이해가 안되면 넌 오늘 여기서 죽어. 장난해? 나랑 지금 장난하냐구. 민준이 입을 열자 채원은 마른 침을 삼켰다
“만난지 한달 정도 됐어. 미안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그런데..”
한달? 너 지금 고작 한달이라고 그랬니? 한달된 여자 앞에서 날 바보로 만들고 그러니까 좋아? 그래. 이쁘더라 아주 이뻐. 나랑은 비교할 수 없게 이뻐. 가방도 명품이더라. 난 짝퉁도 겨우 들고 다니는데. 잘사는집 딸인가봐. 이쁘고 돈많고. 혹시 머리가 빈건 아니니. 아니면 술버릇이 개같던가, 성질머리가 더럽던가.
“진주.. 부잣집 딸이야. 너 사랑하지 않는거 아니야. 웃기게 둘 다 사랑해. 웃어. 마음껏, 비웃어도 좋아, 근데 난 너나 진주나 둘다 똑같이 사랑해. 정말이야. 그런데, 진주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일 밀어주겠대. 너 내가 영화배우 하고 싶어 하는거 알지? 진주가 기획사도 알아봐 주고 다 해주겠대. 진주 나 사랑해. 걘 나없으면 죽어. 넌 아니잖아. 속인건 미안해.”
영화배우? 미쳤니. 야. 니가 영화배우하면 지나가는 똥개도 족보 달겠다. 요즘 관객 천만 시대인거 몰라? 니가 영화배우를 하면 내가 영부인이야. 사랑해? 니 없으면 죽는다고? 야 무슨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니?
“ 나도 너 없으면.. 안되는거 알잖아...”
채원은 어느새 눈물이 그렁 맺혔다. 고개를 숙이자 굵은 눈물이 채원의 손등으로 뚝하고 떨어졌다. 민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채원에게 손수건을 건냈다. 채원은 민준의 체취가 묻어나는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이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채원아. 이러지마.”
“그러는 넌.. 넌 왜 그러는데.. ”
기껏 공들여 하고 나온 화장이 다 번져 채원의 얼굴에 얼룩 무늬를 만들어냈다.
뭐야. 이런 삼류 영화는. 나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이니. 뭐야. 남자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돈많은 여자를 선택해. 둘은 너무나 행복해 하지.돈이 많은 그 여자는 남자에게 모든걸 해주고 그 남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가 높아져가. 그런데 웃긴건 결말이야, 언제나 인과응보거든 주는 대로 받는다. 권선징악. 착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 뭐 이런거지. 결국 남자는 그 여자의 도움을 받아 해나가던 사업이 쫄딱 망해버리고 결국 그 여자는 그 남자를 떠나가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남자가 거리를 배회하다 옛 여인을 만나게 되는거야. 그런데 그 옛 애인은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는거야.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보지만 이미 끝, 엔드라구. 너도 그럴거라구. 바보야
“진주를 포기 할 수가 없어. 미안하다. 날 욕해, 니가 하고 싶은대로 욕해.”
“너... 이런 사람 이였어?.. 이런 남자였어?..”
채원은 문득 지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거 다 이미 오래전 짜여진 그런 각본 아니니? 스토리 짜놓고 나 물먹이는거. 사랑하는 척 온갖 수작을 부리고서는 보기좋게 발로 뻥 걷어차는거. 거기다 더욱 비참하게 극적인 요소로 잘난 여자 출연시켜 할 말 없게 만드는거. 이거 니가 미리 써둔 시나리오니.
채원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아냈다. 마음속으로는 개자식, 나쁜 놈 죽일 놈 욕을 퍼붓는데 정작 이렇게 꼴사나운 눈물만 쏟아지고 있다. 그런 자신이 너무 가증스러워 채원은 구역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오늘 너와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내가 산 이 티가 너랑 잘 어울리는지 확인도 해봐야 하는데, 어쩌지.
“나 먼저 갈께. 앞으로 연락하는 일 없었으면해.”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피엔딩을 원한거라고. 난 이런 비극적인 결만 별로 안좋아해. 만화책을 봐도 영화를 봐도 난 해피엔딩이 좋아. 근데 이게 뭐야? 지금 이런 날 혼자 남겨두고 가겠다고 일어서는 거니. 말도안돼.
“날 사랑하긴 한거니.”
채원이 물었다, 민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양손 깍지를 끼고 테이블위에 팔을 올렸다. 채원은 민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따뜻한 손, 잡아보고 싶어..
“채원아.”
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채원의 이름을 불렀다. 얼어버린 가슴이 모두 스륵 녹아 내릴 것만 같은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 채원은 민준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 예쁜 입으로 지금처럼 내 이름만 불러줘.
“널 사랑했어. 하지만 그런게 중요하지는 않아. 알겠니?”
중요하지가 않다니? 넌 영화도 안봤어. 버림받은 여자가 항상 하는 마지막 질문은, 언제나 날 사랑했어요? 이거였어. 그거 보면서 내가 얼마나 비웃었는지 알아? 맘떠난 남자한테 사랑했냐고 물어보는 바보가 어딨어. 그게 왜 중요해? 근데 중요해.. 그게 너무 중요해.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아. 니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면 지난 시간마저 버려야 하잖아, 그게 너무 가슴이 아파. 날 사랑했다고 말해줘. 정말 날 사랑하는데 떠나는 거라면 그렇다고 다시 한번 말해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어. 내가 살 수가 없어.
채원은 자신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는 사실이 놀라웠다, 심장이 멎지 않은게 다행이다. 건강하니까 이런건 좋구나. 너무 충격을 받아서 이대로 쓰러졌을지도 몰라. 그런데 다행이다. 그런 유치한 장면까지 연출하지 않아도 된다는게.
“좋은 사람 만나. 너만 사랑해줄 남자로.”
민준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테이블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랬듯 채원만 남겨둔채 유유히 가게를 빠져 나갔다. 채원은 민준이 두고 간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반지였다. 둘의 커플링. 그래 아까 니 손 봤을때 뭔지 모르게 허전하다고 생각했어. 이거였어. 채원은 반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손에 들린 것과 똑같은 반지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쁜 놈.”
***
채원은 가슴이 시렸다. 악몽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게 너무 힘든 일이다. 쳇. 그때 은주가 채원의 등을 툭하고 쳤다.
“채원아. 오늘 술한잔 할래?”
위로주? 위로주를 사겠다 이말이니?
“아냐. 무슨 좋은 일이라구 술을 마시니. 됐어”
아침부터 지원이 쐐기를 박아두었다. 술 마시지 말라고 했으니 마시지 않는게 낫다. 아마 이 기분으로 술을 마시면 엉엉 울면서 그 자식에게 전화할 지도 모르니까. 채원은 은주를 보며 다음에 라고 입을 뻥긋 거렸다. 은주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채원은 어서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양푼 가득 밥이라도 비벼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