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짝
몇 달이 지나자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학교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중학교의 바로 옆에 있는 한강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나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겨울방학은 지루하고 답답하였다. 가끔씩 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매일 그럴 수는 없었으며 한강아파트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나는 그저 방안에 처박혀서 컴퓨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중학교 1학년인 여동생은 나보다는 이곳 생활에 적응을 많이 한편이라서 친구도 몇 명 사귀어 같이 놀러 다니기도 하였고 친구들을 따라서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도 하였다. 얼마 전까지의 일은 없었다는 듯 동생은 나의 고민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고 난 집안에서도 공감자를 얻지 못하여 더욱 침울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이런 나에게 소일 거리가 생겼으니 아버지가 사주신 최신형 컴퓨터가 바로 그거였다. 예전부터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더 이상 말상대도 없고 무언가에 집중할 수도 없지만 시간은 넘치는 상황 속에서 컴퓨터 공부에 푹 빠지게 되었다. 도스의 사용법, 워드프로세서, 표 계산 프로그램 등의 기본적인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것도 많이 공부를 하였고 특히 컴퓨터 게임을 열광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했던 것은 삼국지 시리즈였으며 게임 덕분에 삼국지 소설책도 몇 번씩이나 정독을 하였다.
나는 보수적이 되었다.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상태가 지극히 불만스럽더라도 변화는 어쩌면 더욱 최악의 상황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였다. 나는 두더지처럼 나만의 굴을 파고 얼굴도 내밀지 않고 그곳에서 나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으며, 외부의 약간의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런 나에게 고등학교의 진학이라는 것은 위를 헐어버릴 정도로 심각한 자극이었으나 나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런 상황을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못하였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언제나 리더였고, 반장도 수없이 많이 해봤으며, 언제나 남들 보다 특출 났던 내가 이사 와서는 외톨이가 되어 적응을 못하고 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결국 난 나의 침울한 마음을 숨기고 억지로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반으로 향할 수 밖에는 없었다. 첫 등교가 있던 날, 그날의 하늘은 나의 기분과는 정반대로 청명하였고 그 점이 난 더욱 못 마땅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날씨는 어떤 징표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의 시작을 알리는 하늘의 징표.
또 외톨이가 된 채 낯선 사람들과 뒤섞이게 되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런 상황에 적응이 된 나는 한숨을 쉬며 교실 안에 들어섰다. 교실은 벌써 여러 부류의 아이들로 편이 갈라져 있는 상황이었다. 대부분이 같은 중학교에서 진학한 것이라서 서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았고 학원이나, 다른 모임을 통해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벌써 무리를 지은 것이다. 역시 나를 그 무리 속에 넣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난 교실 창가의 제일 뒤 자리에 앉았다. 난 잠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한쪽 팔로 턱을 괴고 가방에서 컴퓨터 게임 잡지를 꺼내서 읽고 있었다. 다행히도 혼자라는 상황이 나의 집중력을 높여주었고 책을 읽기에 집중하고 있으니까 내가 외롭다는 사실도 잊을 수가 있었다. 내가 머릿속에서 게임의 화면을 상상하며 딴 세계를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컴퓨터 게임 좋아하니?”
나는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본능적으로 움찔하면서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의 시선의 끝에는 김성현이 웃으며 있는 것이다.
“나도 좋아하는데…… 너하고는 이야기가 좀 통할 것 같은데.”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김성현과 한 반이 된 것도 놀라운데 그가 내게 먼저 말을 걸다니! 거기다가 내 옆자리에 않다니!
“훗, 뭘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냐? 아무튼 인사부터 하자. 난 김성현이라고 한다. 잘 부탁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나는 한강민이야.” 나는 떨리는 감정을 추스르며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였다.
“역시 게임은 삼국지가 최고야! 어때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물론이지. 난 겨울방학 내내 삼국지만 하고 지냈다고. 삼국지에 나오는 장수들의 데이터를 연구하느냐고 소설 삼국지도 몇 번이나 읽었는걸.” 삼국지 이야기가 나오자 나의 목소리는 커지기 시작하였다.
“너도냐? 나도 겨울방학 때 밤새도록 했다니까. 내 주변의 친구들은 이 게임이 너무 어려워서 싫다고 하고. 한심하게 오락실이나 가서 스트리트 파이터나 한다니까. 짜식들 시뮬레이션 게임의 심오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이야.”
“맞아! 컴퓨터 게임을 한다고 하면 시뮬레이션 게임을 해야지 제대로 하는 거지.”
성현의 허물없는 태도에 나는 금방 마음이 밝아졌고, 그와 의기투합을 하였다.
“어, 이게 새로 나온 게임인가 보네.”
그는 내 잡지의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응, 이번에 새로 나온 건데 해보지는 않았지만 사진만 봐도 별로 일 거라는 게 뻔히 보여.”
“그래, 그래픽은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픽은 좋은데 내용이 엉망이라고. 이거 한번 읽어 봐.”
난 책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하하! 이런 맙소사, 이건 완전히 전에 나온 게임을 이름만 바꿔서 출시한 거잖아.”
성현은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그렇다니까. 완전히 재탕, 삼탕이야.”
“넌 컴퓨터 사양이 어떻게 되냐?”
“CPU는 80286이고 하드는 42메가야.”
“42메가? 와! 꽤 사양이 좋은데. 돈 좀 들었겠다.”
“후후후, 그럼 아버지를 졸라서 하드용량 좀 늘려달라고 얼마나 부탁했는데.”
나와 성현이 이렇게 즐겁게 떠들고 있으니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성현의 주변에서는 무언가 놀랍고 즐거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는, 그의 추종자이자 친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