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알타리한 이야기로 다시 찾아뵙는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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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이야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 잊혀졌는가 =======================
연극이 끝나고 곧바로 병원에 실려간 난
손등의 자상과 탈진을 이유로
하루 동안 입원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부터 이정도 부상은 비일비재했던 관계로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지만
=사고? 피해자는 없는 거지?= 라는 어머니의 첫마디는
여린 내 마음에 충분히 비수가 되었다.
집에 도착하고 3일 째.
난 마치 고치 상태에 들어간 애벌레처럼
꼼짝도 않고 누워있기만 했다.
끝도 없이 질퍽하고 나른하게 늘어지는 몸은
오직 휴식만을 갈구하고 있었고
마음 또한 지쳐있었다.
오직 하는 일이라고는
꿈을 꾸는 건지,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몽롱한 상태에서 지난 공연을 회상하는 일.
=숨이 막히고 눈이 뒤집혀서 죽을 것 같아!!=
당시엔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연기를 했지만
이제와 장면 장면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덜컥했다.
무대 위에 카랑카랑하게 울리던 외침과 격렬한 몸짓.
연습 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들...
때때론 지독한 이질감에 섬뜩함까지 느껴졌다.
=그건 정말 나였을까?= 하는....
그리고 무엇보다 믿을 수 없는 건
그녀와 키스했다는 사실.
혹시 내가 환각을 본 건 아닌지,
기절해서 꿈을 꾼 건 아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봤지만
그건 정말로 실재했던 일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 순간을 떠올릴 때 마다 가슴이 뛴다.
그 때 그녀의 몸이 떨리던 것처럼.
기억 - 하아.....
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 시키며
침대 위에서 나른한 기지개를 켰다.
지금 시간이 오후 4시.
생각해보니 아침에 화장실 다녀온 걸 빼곤
종일 침대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는 것 같다.
움직이질 않으니 배도 별로 안 고프고...
마냥 쉬고 싶다....... 마냥.....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할 때
방문이 반 쯤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머니 - 기억아, 밥 먹어야지?
기억 - 으.... 먹여줘요...
어머니 - 아이구~ 우리 이쁜 폐인...
극도의 귀차니즘적인 생활 끝에 내가 알아낸 것은
어머니 인내심의 한계였다.
어머니 - 맛이 어떠니?
기억 - 쿨럭..... 쿨럭.....
어머니 - 얘는 칠칠맞게 나이가 몇인데 흘리고 그러니.
..........
뭐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침대위에 눕혀져(?) 있을 때
1부 끝날 때까지 3번 울렸던 내 핸드폰이
2부 연재 1화만에 기염을 토했다.
=빠바바밤빠밤빠바~ 빠바바밤빠밤빠바~=
..... 설마 또 1화에서 한 번 울리고 30화까지 잊혀지는 건
기억 - 예.
?? = 여보세요?
기억 - ...... !!
그녀다. 틀림없는 민아의 목소리다.
?? = 음? 여보세요?
기억 - 아....아..... 응.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당황했는지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런 바보 녀석!
꼭 용건이 있을 때만 전화를 해야 한다는 것 같잖아!!
혹시 커플들 사이에만 주고받는다고 전해지는
닭살 대화의 표준, 염장질의 대표주자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었냐?
짧은 침묵의 시간 동안
그녀를 몰아세운 내 자신을 힐책하고 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저.... 기억씨 핸드폰 맞나요?
기억 - 응....나야. 잘 지냈어?
??
= 저...여긴....주식회사 푸르딩딩인데요,
고객님의 핸드폰 번호가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주최한
파맛 푸딩 증정 이벤트에 당첨되셔서.....
재세공과금 39800원만 납부하시면 70만원 상당의 파맛 푸딩을....
이런...........쒯.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데도 꿋꿋하게 행사내용을 읽어주는
직업정신 투철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 = 저....고객님?
기억 - 예.
?? = ....... 듣고 계세요?
기억 - 아무렴요.
?? = 수령 가능한 주소를 불러주시면 곧 그쪽으로 배송을...
기억 - 아뇨... 괜찮습니다.
?? = 아, 네...풋....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기억 - 예.....
집요한 설득의 말 대신
=풋....=하는 웃음만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그녀.
오히려 그쪽이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지금쯤 그녀는 배를 잡고 웃고 있겠지....
텔레마케터양과의 통화 내용을 처음부터 정리해보며
다시금 궁극의 쪽팔림을 느끼고 있을 때
매정한 핸드폰이 다시 나를 불렀다.
=빠바밤빠밤빠바~ 풋.... 빠바바밤빠밤빠바=
하아...... 너까지.... 날 비웃냐.
기억 - ......예.
?? = 여보세요?
어라. 이 목소리....
방금 전에 그 이상한 회산가?
기억 - .......... 예.
?? = 아, 네..... 여긴 주식회사 푸르딩딩인데요.
까딱했으면 또 망신당할 뻔 했군.
기억 - 방금 통화했었습니다만...
?? = 예, 사실은 아까 중요한 내용을 하나 빠트려서요.
기억 - .... 하아..... 개인적으로 푸딩은 안 좋아합니다만. 게다가 파맛이라니....
??
= 아뇨, 그런 내용이 아니라...
지난 번 공연 때 다치신 곳은 좀 괜찮으신가요?
.......?!
기묘한 섬칫함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들이 들렸다.
민아 = 나야 나~ 쿡쿡쿡...잠깐만~
연출
= 어이, 나 연출이다.
몸살 났다더니 잘 살아있냐?
애들하고 병문안이나 가려는데
어디로 가면 되냐?
기억 - 잠깐만요. 아직 상황 정리가....
자, 자, 자, 자.... 어디 한 번 봅시다....
그러니까 아까 그 이상한 푸딩 판매 전화가.....
....장난전화?!
연출 - 어이 어이, 충격 먹고 뻗었냐? 푸하하핫...!!
내가 강렬한 절망감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연출은 핸드폰이 흔들릴 만큼 떠나가라 웃으며
뒤에 있는 사람들과 작전성공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이대로 문병을 오라고 하면
결과는 안 봐도 5.1채널 홈씨어터다.
기억 - ..... 내일 나갈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쇼.
연출
- 그러냐? 그럼 푹 쉬고 내일 보자고.
아 잠깐만, 회계가 바꿔달란다.
회계
- 여~ 안녕하십니까, 주식회사 푸르딩딩의 경리입니다.
이번에 저희 회사에서.... 크핫핫...
........
다음날.
아직 며칠 더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어제 연출과 했던 말이 있는 만큼
학교에 가보기로 결정했다.
오늘도 안 가면 그들이 온다.
조금 느즈막히 도착한 학교.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고치생활의 후유증으로
난 마지막 수업을 출석 체크만 하고 나와
연극부 연습실로 찾아갔다.
잠시 후 연습실 문 앞에 도착한 난
어색하고 낯선 기분에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나?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조용하기만한 연습실.
예전의 시끌벅적 분주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새벽녘 풀밭처럼 잔잔한 고요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떠들썩한 축제가 끝난 뒤의 거리처럼
쓸쓸함이 짙게 묻어나는 평온.
이런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내가 꿈을 꾼 것만 같다는 허무함이 앞섰다.
터벅 터벅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한 번 빙 둘러보고 있을 때
창가에 있는 책상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사..사람이 있었어?
책상 위에 노트와 쪽지 같은 걸 잔뜩 늘어놓은 채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고 있는 여성.
세련되게 다듬은 단발머리와 보이시한 패션이
고등학생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간에 고등학생이 이곳에 있을 리 만무했다.
아무튼, 그녀의 정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난
헛기침을 두어 번 해서 그녀의 주위를 돌리려 했다.
기억 - 큼, 크흠.
하지만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 듯
나의 헛기침 소리를 AT필드로 중화시켜버리고
꿋꿋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혹시 음압이 거리 제곱에 반비례해서 감소하는 바람에
청각신경의 역치를 넘기지 못한 건가?
상당히 무안해진 난 쭈삣쭈빗 근처로 다가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기억 - 실례합니다...
?? - 화들짝?!
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듯 펜을 떨어트리는 그녀.
....... 방금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한 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