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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my guitar gently weeps (22)

온단테 |2005.12.14 20:49
조회 209 |추천 0

22. 부치지 못한 편지

 

“친구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우정을 약속해 주길 바라며,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곳으로 찾아와줘.

-성현으로부터“

 

나는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 납득되지 않는 사건에, 문맥을 알 수 없는 이 이야기에 하얗게 질려버렸다. 왜? 어째서? 지금에서야 성현이의 엽서를 받아보게 된 것일까?

 

“으으윽”

 

내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서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지 몰라하고 있었다. 단지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두고 그가 보내온 엽서를 읽고, 또 읽었다. 

 

분한 마음에 눈에 눈물이 고여왔다. 모든 것을 이제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성현이를 찾으려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겨우 모든 문제를 봉합해 버리고 상처가 아물었다고 자위하고 있었는데, 그토록 찾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단서가 이렇게 허무하게 나타나다니……

 

“이건 말도 안돼.”

 

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감정 속으로 침잠되어 갔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와 헤어진 지 12년이 지났고 난 한강아파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1996년 1월 내가 신병훈련소에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였다. 몇 주 동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당시 가장 알고 싶은 것이 ‘가요톱10’ 1위곡이었을 만큼 세상과 고립되어 있을 즈음이었다. 어느 교육시간에 한 중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지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지?”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합창하였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뉴스는 말이야. ‘한보철강부도’사건이야.”

 

“네?”

 

모두들 의아해 하였다. 어떻게 대기업이 부도가 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기아자동차가 부도나고, 환율이 급등하고,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나라가 점점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하지만 힘든 군대 생활을 하는 당시로써 그런 것은 큰 관심거리도 안되었고, 아마 사회에 있었다고 해도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997년 겨울, 뜻밖에 행운으로 포상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족들을 놀래 켜 주기 위해 아무런 말도 없이 난 한강아파트를 찾아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어머니 저 왔어요!”

 

난 큰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름 모를 사람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주소가 적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그곳은 내가 태어난 동네였고, 가족들은 그곳의 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다. 몇 달 전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났고,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아파트를 팔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 상황이 이렇게 어렵게 되었지만 군대에 있는 아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부모님과 동생은 그 사실을 숨기고 매달 꼬박꼬박 용돈을 보내주셨다. 난 여윈 어머니의 얼굴과 초췌한 아버지의 모습에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서야 IMF란 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실감하게 되었다.

 

1999년 3월 군대를 제대하는 날, 난 푸른 하늘을 보면서 홀가분한 기분과 미래에 대한 부푼 꿈과 이제 현실에 부딪치는구나 하는 느낌에 어깨가 묵직해졌다. 그래도 집안 사정은 처음 일이 벌어졌을 때 보다는 호전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분 중 한 분이 새로 다세대 주택을 구입하면서 아버지에게 방이 3개 있는 2층을 헐값에 빌려주셨고, 아버지도 빌딩 경비원으로 일하시고 있으셨다. 하지만 여전히 살림은 어려웠고, 어머니와 동생 모두 일을 하고 있었으며 동생은 다니던 학교를 휴학한 상태였다.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면서 적어도 부모님한테는 손을 벌리지 않게 다고 각오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 뜻과는 다르게 IMF 직후의 한국은 경제적으로 폐허의 상태여서 내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신이 아무 쓸모도 없다는 서글픔에 몇 달을 보내었다. 그 짧은 시간은 정말 지옥과도 같았다. 다행히 5월 달 즈음 정부에서 ‘정보화 공공근로’라는 사업을 한다는 공고가 게재되었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곳에 지원해 보았다.

 

“특기가 뭡니까?”

 

“네, 저는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3D MAX 등등 2D, 3D 그래픽 툴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5년 가까이 제품 디자인을 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제 포트폴리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옆에 앉은 30대 중반의 아저씨는 이렇게 열성적으로 말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한 달에 70만원 남짓 받는 공공근로 사업의 경쟁률이 7대1. 그것도 지원자 대부분이 대졸자. 
 
“흐음, 능력은 좋으신데……우리 사업에서 일하시기에는 너무 경력이 좋으시군요.”

아저씨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면서 “저, 아무 일이라도 괜찮습니다.”라고 변명처럼 말하였다.

 

“다음 분은 특기가 어떻게 됩니까?”

 

내 차례가 되었다.

 

“네…… 저……저는 컴퓨터 타자수가 분당 200타 정도되고요…… 워드, 엑셀 등을 잘 다룰 수 있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대답하였다. 특기라고 하기에 너무나 별볼일 없는 것이었으며 같이 소개한 면접자들 중에서 가장 어리고 사회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난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 예상하였다. 그런데 2주 후 내가 합격되었다고 통보가 되었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 합격소식이 대학교 합격 소식만큼 기쁘게 들렸다.

 

공공근로사업은 갑자기 늘어난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에서 재정적으로 지원을 하는 국책사업이었다. 사실 딱히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한다기 보다는 일단 실업자들에게 돈을 쥐어주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하자는 취지의 사업이었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고는 단순한 작업들이었고 관리도 엄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에 한 시간 정도만 일을 하고 나머지는 놀더라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갓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나, 갑작스레 회사에서 정리해고 된 젊은 사람들이 한방에 모여 모두 한숨을 쉬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의 정보화를 앞당기자는 정책 덕분에 인터넷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닐 당시만 해도 전화선과 모뎀으로 마음 졸여가며 통신을 하였던 나로서는 초고속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상에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고,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떤 나라의 사이트도 검색 할 수 있다는 재미에 하루 종일 웹 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었다. 그리고 경품을 준다는 인터넷 사이트, 이메일, 전자상거래, 채팅, 온라인 게임 등등 새롭게 선보이는 인터넷 서비스들에 하나씩 도전해 갔다. 이러는 사이에 뉴스에는 IT붐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경품사이트인 ‘골드뱅크’의 주식이 연일 상한가를 기록하고 인터넷 전화서비스를 하는 새롬기술의 주식이 폭등하고, 이곳 저곳에서 벤처다, 스톡옵션이다 하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인터넷에서 더욱 색다른 것을 찾던 중에 남의 것 보는 것은 이제 질렸으니까 내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HTML로 직접 만드는 홈페이지 제작법’이라는 책을 사서 하나씩, 하나씩 나만의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글들, 게시판과 홈페이지 제작에 필요한 아이콘 모음이 들어 있는 이 홈페이지에 방문객수는 하루에 몇 백 명이나 되었고, 그때서부터 인터넷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구나 생각하여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웹 디자이너, 웹 기획자가 되면 연봉 수천 만원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열심히 공부하였다. 거기다가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바탕으로 사업을 벌여 젊은 벤처기업가가 될 수 도 있었다. 난 이제 정말 가족의 위기상황을 돌파 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았다고 믿었다. 내 학비뿐만 아니라 집안 살림에도 보탬이 되고 전문가의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학하는 나의 모습을 꿈꿨다. 그리고 1999년 말에는 그 일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 지는 듯 했다. 독학으로 공부를 했을 뿐인데, 한 벤처기업에서 나를 웹 디자이너로 고용하겠다고 부른 것이다.

 

2004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나의 상황은 참담하였다.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가 다니던 벤처회사는 허무하게 망해버리고 말았고, 그 후 일자리를 찾으러 방황하였으나 쉽게 구할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인터넷 관련 학원들이 수많은 웹 디자이너, 웹 마스터를 배출하였고, 손쉽게 돈을 벌어보겠다고 했던 수많은 벤처기업들은 하나 둘씩 자취를 감춰가기 시작하였다. 거기다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만들게 된 신용카드로 무분별하게 돈을 써버린 결과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학비를 하겠다고 모아두었던 적금마저 까먹게 되었다.

 

내년에도 복학은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편의점과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겨우 밀린 빚을 갚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생활은 회색이었고, 미래는 보이지 않았으며, 현실은 고달팠다.

 

“친구에게,

언제나 변함없는 우정을 약속해 주길 바라며,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곳으로 찾아와줘.

-성현으로부터 "

 

당장 내일 갚아야 할 신용카드 빚을 걱정해야 하는 나에게 성현을 메시지는 받아들이기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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