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듯 잉글랜드에서 축구 티켓을 구입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대부분의 프리미어 팀들은 일단 시즌 티켓 보유자들에게 티켓을 판매한 뒤 남은 분량을 일반인들에게 판매한다.
일반인들에게 그 기회가 온다 해도 이를 노리는 팬들의 숫자가 엄청날 것은 자명하다. 물론 경기장 주변의 암표상들을 비롯해 최근에는 박지성, 이영표의 이적으로 한국인 티켓 브로커가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마저도 유학생의 얄팍한 주머니를 열기에는 적지 않은 액수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던 중에 맨유가 버튼과 재경기를 벌이게 된 것은 엄청난 호기였던 것이다. 주중에 벌어지는 경기, 컨퍼런스에 소속된 상대팀, 명예회복을 위해 베스트 멤버가 출전할 것이라는 전망은 이번에야말로 맨유 경기를 보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부풀렸다.
맨유 홈페이지는 전세계 클럽 홈페이지 중에서도 가장 깔끔한 인터페이스를 자랑한다. 홈페이지의 안내에 따라 티켓을 신청한 뒤 나에게 남은 일은 기도뿐. 첫사랑에게 마음을 고백한 뒤 대답을 기다리는 심정이 이러했던가. 티켓은 고사하고 내 신청이 접수됐을 때 보내준다던 메일조차 도착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급한 내가 먼저 무릎을 꿇고, 전화를 걸었다.
맨유와 전화연결은 정말 쉽지 않다. 5분 넘게 기다리는 것은 예사이며 연결조차 되지 않을 때도 있다. 세계적인 인기팀답게 수많은 팬들로부터 티켓에 대한 문의를 받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맨유팬이라면 걱정마시라. 전화 연결을 기다리는 동안 챔피언스 우승의 순간을 비롯해 맨유의 황금 시절 코멘테이터의 생생한 중계 음성은 전혀 지루함을 주지 않을 것이다.
5번의 시도 끝에 연결된 통화. "티켓을 신청했는데 왜 아무것도 안보내는거요?"라는 나의 퉁명스런 질문에 담당자는 내 신원 확인 절차를 거친 뒤 "이미 보냈는데?"라는 대답을 건넨다. 나는 어찌나 좋았는지 우리말로 고맙다고 대답을 했을 정도. 그리고 다음날 도착된 티켓.
가자, 올드 트래포드(Old Trafford/OT)로!

(사진1-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티켓. 이 작은 종이 한 장을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의 고속버스에 해당하는 내셔널 익스프레스와 메가버스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맨체스터까지 운행하고 있으며, 예약을 빨리한다면 단돈 1파운드에도 맨체스터까지 갈 수 있다.
맨체스터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한 젊은 친구에게 올드 트래포드까지 가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는 "난 시티팬인데?"라며 관심 없다는 듯 무성의한 대답을 반복한다. 맨체스터에는 유나이티드와 시티팬의 수가 비슷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보다.
맨체스터는 생각보다 현대적인 도시였다. 시내 대부분의 건물들이 큼직큼직했고, 빨간 벽돌이 유난히 눈에 띈다는 특징이 있었다. 세계 최대의 과학박물관이 끌리기는 했지만 ‘우주 최대’라 해도 올드 트래포드를 향한 내 발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올드 트래포드까지 가는 방법을 물었다. 그는 맨유 레플리카와 레인 자켓으로 뒤덮인 우리를 보고 알 수 없는 웃음을 던지더니, 불친절한 설명을 건넨다. 이런, 또 시티팬이었나보다.
올드 트래포드까지는 버스, 기차 그리고 트램까지 모두 3가지 수단으로 갈 수 있다. 나와 일행은 그 중에서도 한 번도 타보지 못한 트램을 이용했다. 경기 시작 한참 전이라 인상적인 서포팅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오늘 경기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말을 건네는 노신사의 모습에서 저녁 무렵 이 트램의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을 듯하다.

(사진2-트램을 타고 도착한 올드 트래포드 역)
한 5분쯤 걸어가니 노점상들이 하나씩 눈에 띄기 시작한다. 경기 당일마다 열리는 이같은 노점상은 유럽 축구에서 빠질 수 없는 볼거리. 명문팀들마다 백화점 못지않은 휘황찬란한 전문 매장을 관리하고 있지만, 노점상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면 축구는 여전히 서민의 스포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머플러, 깃발 등을 구경하고 있는데 박지성의 얼굴이 담겨 있는 티셔츠가 보인다. 생뚱맞게 이소룡과 연관시켜 놓았지만, 몇몇 스타 선수들의 티셔츠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박지성이 맨유 팬들에게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사진3-박지성 티셔츠. 아무리 서양애들에게 이소룡이 동양을 대표하는 인물이라지만, 조금은 쌩뚱맞다)
조금 더 걸으니 60년대 맨유의 전성기를 이끈 매트 버스비 경의 이름을 딴 길이 보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장관. 꿈의 무대라 불리는 올드 트래포드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올드 트래포드는 현대적 세련미와 전통이 어우러져 묘한 느낌을 빚어낸다. 그 모습에 압도당해 경기장 오른쪽에서 진행 중인 공사에 정신없다는 느낌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 경기장 왼쪽에는 1958년 뮌헨 원정길에 비행기 사고로 죽은 관계자들을 이름을 기린 조형물과 유명한 '58년 2월 6일 5시 5분' 시계가 눈에 띈다.
그러나 경기장 구경보다 자꾸 ‘메가 스토어’에 눈이 가는 것이 사실. 메가 스토어는 전세계 최대 규모의 팬숍으로 모든 종류의 상품들은 맨유 마크가 찍힌 채 판매되고 있었다. 당신이 만약 맨유팬이라면 지갑을 숙소에 두고 오시라. 맨유팬들의 혼을 빼놓을만한 상품들은 당신의 여행기를 메가 스토어에서 끝낼 수 있을만큼 팬들을 자극할 테니까.
나 역시 우리의 박지성 관련 물품을 찾았지만 몇 개의 사진 이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별다른 수요가 없다’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사진4-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으로 매트 버스비 경 도로, 비행기 사고로 죽은 관계자들의 이름이 적힌 조형물, 올드 트래포드의 외관, 한창 공사중인 올드 트래포드 )
( 사진5-메가 스토어에서 살 수 있는 박지성 관련 상품. 그래도 개리 네빌, 실베스트레, 반 데 사르, 플레처, 스콜스 등보다는 훨씬 많은 숫자다)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데 웬 여자가 말은 건넨다. ITV에서 이번 경기와 관련하여 취재를 하는데 인터뷰에 응해줄 수 있냐는 것. 흔쾌히 응한 나는 ‘이번이 첫 관람이고 박지성의 팬이며, 맨유가 조만간 부활할 것이라 믿는다’ 등등 주저리주저리 대답을 했지만, 버튼에 대해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신문을 좀 자세히 읽을 걸. 당황해 땀을 뻘뻘 흘리는 나에게 기자는 더 이상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나보다. 난 맨유가 내 첫 관람을 위해 멋진 경기를 보여줄 것이라는 생뚱맞은 대답으로 영국에서의 첫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사진6-ITV와 인터뷰한 모습. 당당한 초반과 달리 얼굴이 빨개진 채 마무리하고 말았다)
맨유의 박물관은 구장의 첫인상처럼 깔끔하고 재기발랄하다. 단순히 역사와 트로피 진열에 그친 다른 구장 박물관과는 달리 선수들에 대한 정보와 영상을 볼 수 있는 터치 스크린과 기타 게임 등 참여할 요소가 많은 것이 그 특징.
전설적인 맨유 선수들의 연대와 대표팀, 맨유 유니폼, 축구화 등을 차례로 전시한 ‘레전드실’과 얼마 전 사망한 조지 베스트를 기린 ‘추모의 방’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맨유를 세계 최고 구단으로 만든 99년의 그 유명한 ‘트레블 섹션’은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월마다 구별된 6개의 진열관은 당시 맞붙었던 주요팀들의 유니폼과 기념품들을 진열해 놓고 있었으며 스크린은 끊임없이 그 달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 마무리는 솔샤르의 골로 이긴 그 유명한 뮌헨과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하이라이트다. 
(사진7-선수들의 정보와 영상을 볼 수 있는 터치 스크린. 박지성은 단 4장의 사진만 있었지만, 그의 활약이 더해질 때마다 그 수가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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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8-맨유 박물관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맨유가 획득한 트로피, 조지 베스트 추모실, 레전드실의 칸토나, 트레블실의 전시물)
6시 무렵 드디어 경기장에 들어섰다. 상암 구장과 비슷한 분위기의 올드 트래포드는 아무래도 시설 면에서는 상암에 미치지 못하나 피치의 몰입도 면에서 더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경기장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아담하다는 느낌이 이채로웠다.
코너 플래그 바로 앞자리를 배정받은 우리는 경기를 전체적으로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라 걱정했지만 경기 전체를 판단하는데 있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광고보드와 관중석 사이의 작은 공간에는 안전 요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그 공간에 음식 판매원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올드 트래포드는 잉글랜드 여느 구장처럼 전광판이 매우 작았다. 우리나라의 현란한 전광판에 익숙한 나에게 잉글랜드나 유럽 경기장의 전광판은 항상 의아한 대상이다. 올드 트래포드에는 작은 전광판 3개만이 경기장에 걸려있었는데, 크기는 작았지만 티켓 관련 소식이나 이날의 베스트11, 생일 축하 메시지 등 유용한 정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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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올드 트래포드 내부의 모습. 불균형하면서도 아담한 내부가 인상적이었다.)
평일 경기에다 비까지 내리는 궂은 날씨라 관중석이 비어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경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모든 좌석이 관중들로 들어찼다. 버튼같은 팀과의 경기에도 경기장을 메울 수 있는 맨유팬들의 사랑이 현재의 맨유를 만들어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날 맨유의 베스트11에서 가장 많은 환호를 받은 선수는 주장 완장을 찬 솔샤르. 2년만에 극적으로 복귀한 이 왕년의 스타에 대해 팬들의 애정은 여전해서, 경기 중에도 부진한 솔샤르를 위해 계속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이날 올드 트래포드에서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오히려 상대팀인 버튼팬이었다. 그들에게 이미 승패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버튼 관중석의 응원가가 가장 컸을 때는 버튼이 골을 허용한 때였으며, 버튼 관중석의 박수가 가장 컸을 때 역시 버튼 선수들이 몸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흙 한번 묻히지 않은 깨끗한 바지를 유지하며 우아하게 볼을 차는 맨유 선수들. 이와 비교해 점점 더 흙으로 뒤덮이는 버튼 선수들의 유니폼이 그팀의 팬들에게는 더 빛나보였을지도 모른다. 굴삭기 기사, 스포츠용품점 점원, 물리치료사 등 저마다 생업을 갖고 있는 버튼 선수들. 버튼 관중들에게 오늘만큼은 그들의 가족이자 친구들이 아닌 '꿈의 구장' 올드 트래포드에서 뛰고 있는 영웅인 것이다. '꿈의 구장' 올드 트래포드는 이날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실현시켜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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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0-인상적인 서포팅을 보여주던 버튼팬. 이날의 진정한 승자는 이들이었다)
당연한 승리였던 만큼 경기 후 맨유팬들의 모습은 편안해보였다. 인상적인 장외 서포팅은 보이지 않았고, 팬들 모두 조용히 집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을 뿐이다. 경찰을 태우고 있던 말 역시 평화로워 보였을 정도. 노점상들은 마지막으로 손님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벌이고 있었으며, 주변의 햄버거 가게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려던 팬들로 가득 차있었다.
박지성과 루니의 플레이를 보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남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구단의 거대함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뛰고 있는 박지성의 존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보다 더 소중했던 것은 꿈을 만드는 구단과 그 꿈을 함께 꾸어주는 팬들의 존재를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하루는 저물고 있었다.
런던(영국)=박찬준 통신원
